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7화 (37/510)
  • 00037 발푸르기스의 밤  =========================================================================

    “아무리 어지러운 심신을 달래러 휴양 왔다 해도 정도를 지켜주십시오.”

    “하지만 봐봐. 돈도 꽤 벌었고…….”

    “자랑이 아닙니다.”

    라피스가 노려보았다. 히익, 나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취해버렸다.

    “마왕이 일개 도박꾼과 어울리고 다니면서 그들의 돈을 빼앗다니요. 전하의 명성에 누가 되면 누가 되었지 결코 이득이 될 리가 없습니다.”

    여기엔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라피스는 도박이 잘못되었느니 하는 논조로 비난하지 않았고, 단지 내 이름값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맞는 말이었다.

    “만약 단탈리안 님이 훗날 좋지 않은 처지에 놓인다고 해보세요. 그때 일부 사람들은 당신께서 도박이 빠지신 바람에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반대로 단탈리안 님이 성공을 거두어도 똑같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저렇게 성공한 사람이 도박끼가 있다면서 흉을 볼 것입니다.”

    “으으.”

    구구절절 옳은 주장.

    “총 얼마를 벌었습니까?”

    “대, 대충 사천 골드.”

    “……많이도 땄군요.”

    라피스가 살짝 질린 기색이었다.

    그녀는 삼천 골드를 시민들에게 기부하라고 조언했다. 별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말대로 삼천 골드를 고아원에 쾌척했다. 의외로 돈을 기부한 게 아깝지는 않았다. 심리상태창을 이용해서 도박꾼들을 홀라당 벳겨먹은 것이 스스로도 조금 치사하다고 느껴서 그런 듯했다. 기부로 인해서 니블헤임 시민들은 더더욱 날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카지노에서 탈출하여 다시금 니블헤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부프에가 안내해줘서 마족의 창녀촌을 가보기도 했다.

    온갖 종족의 창녀가 테라스에 서서 길손을 유혹하는데, 고블린 창녀가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어머 마왕 전하! 잠깐 쉬다 가세요!'라고 말하면서 윙크를 날렸을 때는 정말이지……설명을 생략하겠다. 다만 마왕 중에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섭취해대는 변태도 있다는 정보를 새롭게 입수했다. 서열 제12위의 마왕 시트리는 성적 취향이 독특하기로 유명하여 한꺼번에 여러 종족과 난교하는 것을 즐긴다나 뭐라나.

    그렇게 휴식의 시간이 흘러갔다. 마왕들의 회합이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오늘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안 돼, 싫어. 그걸 입으라고?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최근 마계에서 유행하는 색입니다. 대체로 단탈리안 님은 너무 복장에 초연합니다.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나, 이런 행사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란 것이 있습니다.”

    의상실. 수많은 옷이 진열된 이곳에 나는 라피스와 함께했다. 많고도 많은 의상 중에서 라피스가 고른 것은 하필이면 상아색 코트였다. 그걸 껴입고 안에는 핑크색 조끼를 입으라면서.

    상아색 코트, 게다가 핑크색 조끼라니! 라피스의 심미안을 심각하게 의심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이것이 지금 시대에 유행하는 복장이라는데 얼척이 없었다. 로코코 시대의 명화에서나 볼 법한, 우스꽝스러운 귀족 의상이지 않은가.

    “너처럼 차라리 깔끔하게 단색 양복을 입을게.”

    “제가 평소에 입는 검은색 양복은 평민 전용입니다. 마왕 전하가 입을 물건이 아닙니다.”

    라피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원래 세계에서도 히피 스타일을 애용하던 나로서는 쓸데없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복장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이 매스끄러울 지경이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단탈리안 님의 옷 고르는 눈은 최악입니다.”

    “…….”

    아니야! 옷 고르는 눈이 이상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시대라고!

    “아무튼 코디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우선 옷의 색깔을 고르고 마왕 전하가 파트너로 삼을 여인에게 쪽지를 보내겠습니다. 본래 옷은 남성이 여성에게 맞추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마왕은 예외이지요.”

    “응? 파트너?”

    “회합 첫날에 무도회가 있습니다. 당연히 마왕 전하도 한 분의 여인을 에스코트해야 합니다.”

    금시초문이었다.

    “야, 야. 나 춤은 완전 잼병이야. 게다가 파트너라니, 그런 걸 어떻게 구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도회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연회입니다. 춤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요. 파트너 역시 심려치 마시기를. 쿤쿠스카 상회에서 이미 적당한 여인들을 물색해두었습니다.”

    하고 라피스가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거기에는 여인들의 인적사항이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그녀가 여인 한명한명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설명했다.

    “저는 이 분을 추천합니다. 독사지옥 대공의 따님입니다. 대공의 영애가 파트너가 되기에는 단탈리안 님의 위상이 약간 부족합니다만, 어째서인지 쿤쿠스카 상회 상부에서 적극적으로 주선했습니다. 인맥을 만들 기회입니다.”

    “어, 음.”

    “아니면 이 분도 좋습니다. 흑암지옥 대공의 수하에 있는 변경백작의 딸로, 미모가 출중할 뿐더러 사교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을 애첩으로 삼는다면 단탈리안 님의 미래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내가 질겁했다.

    “뭐시라, 애첩?”

    “마왕이 애첩을 여럿 거느리는 건 추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랑거리이지요. 또 다른 후보로는…….”

    여인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장황하게 이어졌다. 나는 정신이 쏙 빠졌다. 난데없이 무도회라니, 도대체가 내 인생에서 인연이라고는 파리 손톱에 낀 음식물 찌꺼기만큼도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난생 처음 본 여자를 파트너 삼아서 하루종일 돌아다니라고? 애첩? 그건 또 뭐냐?

    “잠깐만. 잠깐만! 라피스, 일단 말 좀 멈춰봐라. 나 숨 넘어간다. 애첩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쳐. 무도회에 참석한다 치자. 파트너를 정해야 한다는 것까지도 이해하겠어. 그런데 쿤쿠스카 상회에서 왜 나의 파트너를 결정해?”

    라피스가 뭐라 말하려고 입술을 열었으나 내가 손을 내저었다. 대충 예상가는 일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안드로말리우스 건으로 협박했다는 사실이 쿤쿠스카의 상부에 알려진 모양이었다. 나를 유력자와 이어줄 테니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눈감아 달라, 이런 의도이겠지.

    자기들 딴에는 보상이랍시고 대안을 내놓은 듯한데 송구스럽게도 나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유력자의 딸인가 뭔가 하는 애들도 죄다 쿤쿠스카 상회의 아군인 게 분명했다. 애첩 하나를 붙여두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제어하려 들 것이다. 요컨대 겉모습만 탐스러운 독사과였다.

    “……하지만 단탈리안 님.”

    나의 추론을 듣고도 라피스는 여전히 파트너를 고르라고 말했다.

    “이로써 유력자는 물론이고 쿤쿠스카 상회를 거의 완벽하게 단탈리안 님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블랙 허브로 거금을 벌었다 하나 단탈리안 님의 세력은 아직 미약합니다. 이때 유력자의 비호를 암묵적으로 얻어내면 그 누구도 단탈리안 님을 우습게 보지 못할 것입니다.”

    “흐음.”

    그녀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고민에 잠겼다.

    내 일차적인 목표는 생존이고, 두 번째 목표는 이 세계를 '클리어'하는 것……즉 비너스빤스의 암시에 따르자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목표에 비추어볼 때 누군가의 강력한 비호를 받는 것이 현명해보이기도 했다.

    유력자의 딸을 애첩으로 삼고, 그녀를 이용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녀마저 배신하여 더욱 거대한 세력을 비축하고……그런 방법도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나한테 이용해 먹을 건덕지가 있다고 봤으니까 접근했을 터.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관계에 불만을 표할 순 없겠지.

    하지만.

    “라피스. 지금부터 내 진짜 심정을 말할게.”

    “경청하겠습니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라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누구보다 가까이서 나를 지켜본 너라면 알겠지만, 난 기본적으로 인격이 불안정한 사람이야.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어. 마왕증후군이라 했던가? 맞아. 마왕으로서 다른 이의 감정까지 느끼다보니 이렇게 되더군. 나에게는 내가 분노하는 감정과 상대방이 즐거워하는 감정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 완전 뒤죽박죽이야.”

    라피스의 무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하지만……니블헤임에 오고 난 이후로는 안정되지 않았습니까?”

    “임시방편이지. 내가 예상하기로 조울증은 시작에 불과해. 언제까지 내 자아가 이렇게 카오스나 진배없는 감정의 상태를 견뎌낼지 원.”

    내가 착잡한 마음으로 털어놓았다. 이러는 사이에도 라피스가 걱정하는 감정이 전달되고 있었다. 착잡함과 걱정스러움이라는 감정이 서로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는가. 거의 같은 감정이었다. 격차가 얼마 크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내 감정이고 어디서부터 라피스의 감정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단지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건 확실하지.”

    “균형, 입니까?”

    “휴식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야. 바깥에서는 다른 놈들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읽어가면서 전투를 치루든 정쟁을 치루든 다 해야 돼. 그건 맞아. 하지만 내 마왕방 안에서는 다른 이의 감정에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쉬어야 한다. 잔뜩 지친 마음의 그릇을 어느 정도 식혀주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카지노가 꽤 좋았다. 내가 승리하면 나는 기뻐했고 상대는 슬퍼했다. 승부의 결과에 따라 나와 타인의 감정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애써 자타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나 혼자 숙소에 틀어박히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지나치게 심심했다.

    “그런데 속마음이 어떨지 모르는 녀석을 애첩으로 삼는다고? 녀석이 자기 집안을 위하는지, 아니면 쿤쿠스카를 위하는지 알 도리가 없어. 그러니 나는 다시 녀석의 감정에 신경을 쏟아부어야 해.”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별안간 말을 끊었다. 그녀가 이러는 적은 무척 드물었다.

    “어?”

    “혹시 저와 함께 계실 때도……그럽니까?”

    초조함. 그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라피스가 예의 무표정 너머로 수없이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제법 오래 전에 알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냉철한 그녀였지만 가끔씩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항시 냉정하기에 그녀 곁에 있으면 편하다. 별다른 감정이 전해지지 않으니까. 아예 인형처럼 무미건조하지 않기에 때때로 마음이 통한다. 그녀는 나에게 적당하게 멀리 있었고, 적당하게 가까이 서 있었다.

    내가 약하게 웃었다.

    “아니. 내 곁에 계속 있어라.”

    “알겠습니다.”

    라피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 속으로는 안도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굳이 지적해서 창피를 줄 이유는 없겠지. 이래 봬도 난 무척 배려심 깊은 남자였다. 사람들이 그걸 잘 몰라주더라고.

    그녀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허면 내일 무도회에서 파트너를 정하기가 곤란해집니다.”

    “참. 그것도 문제이지……음, 뭐. 어때. 라피스 너가 파트너 해주면 되잖아.”

    “…….”

    잠깐 침묵이 있었다.

    “예……?”

    “그럼 됐네. 자, 이제 이 문제는 끝이다.”

    방금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되돌이켜 보아도 괜찮은 해결법이었다. 어찌되었든 쿤쿠스카 상회에서는 나를 아군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무조건 파트너를 거부하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상회의 직원인 라피스를 파트너로 삼는다면 '난 당신들과 척을 질 생각은 없소'라고 의도를 전달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쪽에서 정해준 대로 움직일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는 사실을 피력할 수도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는 내가 그들과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알아서 좋고, 나는 내 입지를 손상시키지 않아서 좋고, 또 괜히 낯선 여인네랑 돌아다니지 않아서 정신건강에도 좋았다. 실로 완벽했다.

    “남자가 여자 옷에 맞춰서 입어주는 게 관례라고 했지? 얼른 드레스 골라잡아봐. 본인이 친히 네 옷에 맞춰주지.”

    “전하. 저는 하프 서큐버스입니다. 순혈 서큐버스를 대동해도 마왕으로서 평판이 염려되는 마당에, 저같은 이를…….”

    “아이고. 또 그놈의 순혈이니 혼혈이니, 앞으로 딱 한 번만 더 말하면 질리겠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잠자코 따라.”

    나는 의상실을 가로지르면서 대충 라피스한테 어울릴 만한 드레스를 찾아나섰다. 라피스가 당황해하면서 내 뒤를 쫓아왔다. 마왕의 체면인지 뭔지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그냥 무시했다.

    “이건 어떠냐. 순백의 드레스. 고급스러운데다 청초해서 딱 좋네.”

    “……연회에는 지나치게 점잖은 복장입니다. 아니, 그보다 단탈리안 님. 저는 아직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 검은색 드레스는. 장식도 들어간 게 화려한 듯하면서도 진중하네. 마왕의 파트너가 입기에 제격이구만.”

    “전하.”

    라피스는 어조가 꽤나 다급했다. 난 모르쇠로 일관했다.

    세 시간이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라피스가 백기를 들어올렸다. 계속 반항하면 콱 파트너 없이 가버리겠다고 협박하자 항복해 왔다. 결국 나는 라피스한테 반 억지로 검은색 드레스를 안겨준 다음, 파트너한테 맞춰 입는다는 명목으로 더없이 단아하고 평범한 검은색 코트와 검은색 조끼를 입게 되었다.

    “하아아……중요한 회합의 자리가 이렇게…….”

    라피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러건 말건 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의상을 입지 않아도 되어서 매우 즐거웠다. 고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도 상인의 중요한 임무라고, 라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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