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6화 (36/510)
  • 00036 발푸르기스의 밤  =========================================================================

    “마지막 이유가 무엇일까.”

    이바르가 중얼거렸다. 그가 넓은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고민, 그중에서도 유쾌한 고민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썩 불쾌한 고민에 빠질 때는 그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바르는 오랜만에 두뇌가 자극되어 약간 들떠 있었다.

    단탈리안이 장난스레 건넨 말이 떠올랐다.

    ─그대에겐 말해도 좋다. 왜냐하면 우리 둘은 공범이니까.

    이바르가 피식 웃었다.

    ‘감히 쿤쿠스카 상회를 협박하다니.’

    그는 단탈리안이 무슨 속뜻을 품고 자신에게 '우리는 공범이다'라고 말했는지 단박에 파악했다. 다만 순진한 청년을 연기하느라 얼빵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당혹스러워 하며 단탈리안한테 소리를 꽥 지를 때조차도 이바르는 머릿속에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렸다.

    이건, 충분히 협박거리로 사용될 수 있다.

    마왕을 살릴 수 있는데도 가만히 넋을 놓고 있었다? 마왕을 전문으로 대접하는 쿤쿠스카 상회에서? 제아무리 쿤쿠스카가 마계 제일의 상회라 할지라도 이를 대신할 상회는 꽤나 많았다. 쿤쿠스카의 신뢰도가 떨어지면 마왕들은 곧바로 파트너를 갈아치울 것이다. 여차하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회와 누가 거래하겠는가.

    상인에게 신뢰란 생명보다 무거운 법.

    상대방 쪽에서 상회의 생명줄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부프에, 아니 이바르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 상대방이 통상적인 방법으로 대적할 수 없는 마왕임에야. 그러나 상대측은 간단하게 말해버렸다. 농담이라고.

    ‘즉, 마왕 단탈리안은……우리를 협박하기보다는 보다 긴밀한 상호관계를 만들고 싶어한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번 실수를 넘어가주마. 대신 너희 나름대로 성의를 보여라.

    이바르는 동시에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마왕 단탈리안은, 자신의 협박을 상부에 전하라고 모조인격인 부프에한테 말하지 않았다. 희미한 암시만 줄 따름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우리 상회의 능력을 시험했다.’

    자기가 협박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과연 상회에서 파견한 자의 능력이 그 정도가 되는지 안 되는지……단탈리안은 시험했다. 웃으며 농담이라고 넘어가면서.

    도대체 왜? 협박을 전달하기만 했으면 쉽게 풀릴 일을 왜 굳이 어렵게 풀어나가는 것일까? 마왕에게는 마족을 다스리는 힘이 있다. 그 힘을 협박에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도 난해한 길을 선택했다.

    거기에 단탈리안의 진짜 의중이 있노라고, 이천 년을 살아온 흡혈귀가 생각했다.

    ‘만약 우리의 능력이 기대에 못 미치면, 쿤쿠스카가 아니라 다른 상회와 거래하겠다는 의미다…….’

    이바르는 미소를 지었다. 강자의 미소였다.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이를 향해서 기꺼이 미소를 보일 만한 여유가 이바르에겐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에서 마왕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정보는 비싼 값에 팔릴 게 분명했다. 경쟁 상회들이 앞다투어 단탈리안을 모시고 가겠지. 쿤쿠스카 상회에서 그저그런 고객으로 대접받던 것과 다르게 그는 경쟁 상회에서 최고급 고객으로 환대받으리라.

    ‘이것이, 마왕이 말한 세 번째 이유.’

    꽤 치밀하다. 더욱 더 재미난 점은 상대측에서 이 치밀함을 가볍게 처리해냈다는 사실에 있었다. 단탈리안 본인이 말했다시피 쿤쿠스카 상회를 협박하는 것은 첫 번째 이유도, 두 번째 이유도 아니었다. 마지막 이유에 불과했다. 다른 걸 처리하다가 내친 김에 협박도 해보았다는 얘기였다.

    자신을 모욕한 자에게 보복함으로써 권위를 지킨다.

    도시에 민폐를 끼치는 자를 처리함으로써 명예 및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실수를 범한 파트너를 위협함으로써 이득을 챙긴다.

    “후후.”

    이바르가 웃었다. 웃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마치 거장의 깔끔한 붓칠을 눈앞에 두고 모종의 숭고심을 느끼는 것처럼. 단 한 수,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여서 권위와 명성 게다가 이득까지 쟁취하다니. 그 짧은 순간에 마왕 단탈리안은 모든 것을 계산했다.

    좋다. 그 협박, 기쁘게 받아주겠다.

    이바르가 미소를 지었다. 마왕이면서도 강압적인 수단을 쓰지 않고 순전히 지략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마왕답지 않은 마왕이라.

    “저번에는 최악의 전염병, 이번에는…….”

    이바르가 혼잣말하며 눈앞을 바라보았다. 방안이 어두웠다. 흡혈귀인 그에게 어둠은 더없이 안락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안락함뿐만이 아니라 왠지 모를 기대마저 어둠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그렇게까지 우리의 조력을 얻으려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바르가 대답을 들은 양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어떻게 단탈리안을 절대적인 아군으로 삼을지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면서.

    그와 똑같은 시간대, 단탈리안의 숙소에서는――.

    “왜 마왕을 죽였습니까? 미쳤습니까?”

    “아, 아니. 라피스! 그러니까, 내 얘기를.”

    “마왕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어야 합니다. 그걸 전하 스스로 깨부수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혹시 일부러 고통을 즐기시는 변태입니까? 그런 겁니까? 솔직히 가증스럽습니다. 실망스럽습니다. 절망스럽습니다.”

    “으윽……죄송합니다…….”

    만일 단탈리안이 라피스에게 실시간으로 와장창 깨지고 있음을 알았다면, 이바르는 어쩌면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절레절레 흔들었을지도 몰랐다.

    *  *  *

    일주일 동안 실컷 놀았다.

    이곳 니블헤임이 지구의 요하네스부르그 뺨따구를 십육분의 일 박자로 신나게 후갈겨댈 정도로 범죄와 폭력이 넘실거리는 도시라 해도, 결코 마왕이 위협당할 일이 없었다. 마왕은 말하자면 니블헤임이라는 이름의 다소 살벌한 놀이공원을 마음껏 쏘다니게 해주는 자유이용권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니블헤임 시민들이 남녀노소, 상인에서 깡패에 이르기까지 나한테 호의를 표시했다.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다는 소문이 도시의 맨 구석탱이에 쳐진 거미줄까지 퍼져 있었다.

    안드로말리우스 그 자식이 오죽 원한을 많이 사고 다녔는지, 어딜 봐도 어깨인 마족들이 다가와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내 살다가 조폭한테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도 머리가 늑대 모양인 조폭한테 말이지.

    특히 나는 카지노를 애용했다.

    마계도 늦여름 더위에 신음하고 있었는데 카지노에선 하루 내내 공기가 시원했다. 카지노측에서 고용한 마법사들이 교대로 얼음계열 마법을 써준다고 하는데, 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덕택에 제대로 여름 피서를 했다.

    “웨이타.”

    “예, 전하.”

    “여기 시원한 맥주 한 잔.”

    “알겠습니다, 전하.”

    말끔하게 생긴 고블린 웨이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참고로 카지노에선 마실 것도 공짜였다. 본인이 직접 떠올 필요도 없었다. 카지노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웨이터 한 명을 불러서 살짝 혀 꼬인 발음으로 '맥주 한 잔'이라고 말해주면 그만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시선이었다. 살짝 눈을 뜨면서 미소를 지으면 아무리 고블린일지라도 나의 매력에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홀라당 반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내가 기품 있게 맥주잔을 잡았다. 시원한 밀맥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절로 탄성이 튀어나올랑 말랑 했다. 안타깝게도 주변에 보는 눈이란 게 있어 최소한의 권위를 차리느라 참았다.

    시원하고, 게임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혹시 여기는……천국인가?

    왜 나는 원래 세계에서 카지노와 담을 쌓고 소위 모범적인 생활을 영위한 거지?

    “후우.”

    과거의 어리석은 모습에 비웃음이 나왔다. 이미 마왕으로서 격심하게 겪던 스트레스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움으로 충만했다. 안녕, 과거의 나. 안녕, 지옥 같은 던전 생활. 그리고 어서오렴, 천국의 나날들아.

    “전하. 슬슬 수가 다 떨어지신 모양입니다요?”

    테이블 맞은편에서 리저드맨이 히죽 웃었다. 그는 테이블에 카드 두 장을 뒤집어 놓은 채, 오른손으로 배팅칩을 솜씨 좋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누가 연필을 잘 돌리는지 자랑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내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면서 응수해주었다.

    “글쎄. 수가 다 떨어진 것일 수도,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일 수도 있지. 그러는 자네야말로 투 페어밖에는 답이 없어보이는데.”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흠. 과연, 스트레이트를 노리고 있는가.”

    리저드맨의 안색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왼쪽 눈끝이 살짝 미동한 것이었다. 저런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줘야 할 텐데.

    “적중했나? 본인에게 웬만하면 말로 이기려 들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군.”

    “흐흐,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요.”

    리저드맨이 능글맞게 웃었다. 나 역시 마주 웃었다. 그리고 내 카드를 테이블 정중앙을 향해 던졌다.

    “죽겠다.”

    “쌰아아아앙!”

    리저드맨이 벌떡 일어났다.

    “스트레이트! 스트레이트였는데, 고작 5골드라니! 5골드라니! 얼마만의 스트레이트였는데!”

    리저드맨이 방방 날뛰었다. 주변에서 플레이어들이 껄껄 웃었다. 모두 카지노 단골손님으로서, 우리는 벌써 오래된 친구처럼 친했다. 종족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외양까지 할아버지에서 꼬맹이로 다양했으나 도박꾼이라는 점에서 다 똑같았다.

    “포기해. 전하는 못 당해.”

    “그래, 저 전하께선 마왕이 아니었음 천생 타짜였을 양반이여.”

    현재 나는 이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다. 사실 카지노에 와서 대부분의 시간을 포커에 쏟아부었다. 순수하게 운빨이 중요한 여타 게임에 비해 포커는 사람의 실력으로 좌지우지되는 면이 비교적 더 많았다. 도박인 이상에야 포커도 운에 의해 승부가 결정나기 마련이었지만.

    나는 예외였다.

    “하아. 전하, 정말로 독심술이나 그런 거 터득하신 거 아닙니까요? 무슨 양반께서 게임하는 족족 족보를 꿰뚫어보셔 그래?”

    “생사람 잡는군.”

    내가 넉넉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세상에 독심술이란 게 어디 있는가? 다 미신이다.”

    “그건 그렇지만……에잉!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리저드맨이 투덜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다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 나, 정말로 독심술을 쓰고 있으니까.

    바로 눈앞에 매우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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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라이칼

    종족: 리저드맨  소속: -

    속성: 중립(-15)

    레벨: 31    악명: 72

    직업: 겜블러(B+)

    통솔: 7   무력: 25  지력: 24

    정치: 11  매력: 10  기술: 47

    호감도: 32

    현재심리: ‘제기랄, 오늘도 흑자 내긴 글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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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로말리우스를 해치운 일로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날 좋게 보았다. 도박꾼도 마찬가지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녀석, 카지노에서도 깽판을 수백 번이나 벌였다고 한다. 게임에서 져도 마왕의 권능을 사용하여 막무가내로 돈을 따갔다나. 도박판이 쓰레기들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그건 쓰레기를 뛰어넘는 쓰레기, 요컨대 초대형 쓰레기였다.

    덕분에 나는 아주 손쉽게 호감도를 20까지 찍을 수 있었다. 반사효과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안드로말리우스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쌓은 만큼, 내가 게임에서 깔끔한 매너를 취하자 기하급수적으로 호감도가 올라갔다. 그것 때문에 자기들이 패배한다는 사실은 죽어도 모르겠지, 으하하.

    “몰라. 다음판! 다음판 가자고!”

    “괜시리 없는 허세 부리기는. 쯧쯧. 저러다 있던 운도 도망치지.”

    “장담컨대 쟤 카드 받자마자 죽을걸.”

    “이거 우연이구만. 내 생각도 그러네.”

    “아니 이런 후라질 놈들이!?”

    다시 웃음이 터졌다. 우리 테이블만이 아니라 옆 테이블 사람들도 웃었다. 흡혈귀 딜러가 끅끅 웃음을 참으면서 우리 모두에게 카드를 배분했다. 나는 적당히 어른스러우면서도 또 적당히 유머러스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게임을 이어나갔다.

    내 마음은 비유하자면 한없이 청정하고 고요한 연못. 여유 그 자체. 이 사람들은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다. 적어도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고 난 다음 도전해주었으면 한다. 그런 경지에 올라서도 여전히 도박을 하고 싶다면 말이지.

    딜러가 첫 번째 커뮤니티 카드를 오픈하려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오픈…….”

    “전하! 똡니다! '그분'이 또 왔습니다!”

    고블린 웨이터가 테이블에 다가오더니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속으로 뜨악했다. 얼른 도망쳐야 했다. 겉으로나마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나를 다른 플레이어들은 아쉬움 반 기쁨 반의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쉬운 것은 내가 썩 재밌는 양반이라서 그런 것일 테고, 기쁜 까닭은 만만치 않은 적수가 사라져서 그런 것이리라.

    “미안하다. 이만 가봐야겠다. 이번 판은 죽은 것으로 치지.”

    “미안할 게 뭐 있습니까요!”

    리저드맨은 마냥 싱글벙글했다. 아이구야, 상태창을 볼 필요도 없이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정말로 독심술이라도 터득한 기분이었다.

    “얼마든지 또 오십쇼, 전하. 전 금요일만 아니면 여기 죽치고 있으니까요.”

    “안녕히 가십시오!”

    “다음에도 칵테일 쏴주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웨이터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서둘러 걸어갔다.

    우리가 카지노 구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가 이어졌다. 웨이터는 발걸음이 조급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자신만만했다.

    “이쪽이 비상구입니다. 직원들만 아는 통로죠.”

    “오호. 그거 다행일세.”

    “아무리 그분이라도 여긴 모를 겁니다. 자아, 다 왔습니다. 여기 코너만 돌면 출구가…….”

    따악, 하고.

    구부러진 길목에서 우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웨이터가 경악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그러나 웨이터의 감정 따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앞쪽에서 어마어마한 감정의 폭풍이 몰아닥치고 있었으니까.

    그곳에는 라피스가 여느 때처럼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고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중해서 더 공포스러웠다. 현재 그녀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나는 아주 잘 알았으니 말이다. 가히 불가사의에 가까운 카오스가 라피스의 가슴을 차지하고 있었다.

    적의, 분노, 증오, 경멸, 실망, 절망, 안타까움, 세상의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란 감정은 거기 다 있었다.

    그리고 라피스는 무표정이었다.

    한점의 빈틈도 없이 무표정이었다.

    대리석 조각상 같은 무표정이었다.

    겁나게 무서웠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지되던 포커 페이스는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아, 아. 라피스. 수고하네?”

    “예. 제법 수고하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인지 저도 다소 궁금합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웨이터는 그 시선을 마주치고 어깨까지 움찔거렸다.

    “저, 전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본인을 두고 지금 도망가겠다는 건가!”

    내가 헐레벌떡 웨이터를 붙잡으려 하자, 라피스가 냉랭하게 말했다.

    “도망이라니요? 무엇으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것인지요, 단탈리안 님.”

    “에? 아, 그, 그것이…….”

    “설마 저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의미는 아니리라 믿습니다만.”

    “물론! 물론이지! 당연한 얘기 아니겠어. 하하!”

    내가 라피스에게 휘말린 틈을 타서 웨이터가 줄행랑을 쳤다. 저런 치사한 새끼, 나한테 팁으로 얻어먹은 골드만 해도 황금산을 쌓을 놈이!

    결국 좁은 통로에 라피스와 나만이 남겨졌다.

    “하핫, 으하하.”

    “…….”

    “하하…….”

    “…….”

    침묵이 찾아왔다. 마치 도박으로 돈을 날린 사실을 어머니한테 막 들켜버린 듯한, 지극히 괴로운 시간이 흘렀다. 거기에 더해 날려버린 돈이 사실은 대학교 등록금에 쓰라고 부모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이었다. 나는 고통을 참지 못해 결국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하아아.”

    길고 긴 한숨이 내 귓구멍을 관통했다. 그와 함께 죄책감이 내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실로 어머니의 한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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