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5화 (35/510)
  • 00035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듬뿍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네가 성실하게 대답해주어 무척 흡족하다네.”

    “살려주십쇼……끅, 목숨만은…….”

    “물론이지. 본인이 자네를 굳이 죽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포션, 회복포션을…….”

    내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안타깝게도 본인에게 포션 따위는 없네. 다른 사람에게 구해보게나. 하지만 먼저 일어나서 술집 주인장에게 사과하게! 노인을 공경해야지 어디 그래서야 쓰겠나.”

    허벅지에 상처가 있는 탓에 안드로말리우스는 일어나면서 연거푸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그에게 '저런, 괜찮은가' 하고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렇다고 발걸음 속도를 늦추거나 그러지 않았음을 물론이었다. 아마 상대방은 속으로 나를 무진장 욕하고 있겠지.

    “이제 본인이 바라는 것은 그것뿐일세.”

    “아, 알겠습니다.”

    그를 부축해서 술집 바깥으로 나왔다. 마족들이 여전히 전열을 이루고 있었으나 내 목적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골렘들을 심각하게 경계하지 않았다. 전열에 뒤섞여 있는 이들 중 묘족 노인을 향해서 걸어갔다.

    “주인장! 이 사람이 그대에게 사과할 일이 있다고 한다.”

    묘족 노인네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른 마족들이 수군거리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구경꾼이 몰려와 술집에 들어가기 전보다 두 배는 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예, 예에.”

    “아직 세상 경험을 많이 하지 못해 실수한 모양이다. 그대가 너그롭게 용서해주지 않겠는가? 자아. 자네는 무엇하나. 얼른 사죄하지 않고.”

    내가 예고도 없이 부축했던 팔을 빼냈다. 그러자 안드로말리우스가 허벅지의 통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는 신음을 참으면서 느릿느릿 땅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죄송하오……내 실수했소.”

    “허어!”

    안드로말리우스의 손등을 꾸욱 밟았다.

    “끄읍, 끄으으읍!”

    “사죄하는 사람이 말투가 그게 무엔가! 조금 더 정성을 담아서!”

    “끅, 죄, 죄송합니다……!”

    “그렇지. 이마를 땅에 바싹 갖다 붙이고. 그렇게.”

    “죄송합니다, 히끅, 죄송합니다…….”

    사죄가 계속되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하도 머리를 땅에 박아 이마에서 자갈과 피 그리고 머리카락이 엉겨 붙었다. 평소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지 구경을 하러 온 마족들이 낄낄 웃어댔다.

    웃음소리를 들은 안드로말리우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마족들을 노려보았다. 마족들이 움찔했다. 그러나 내가 손등을 짓밟자 비명소리와 함께 안드로말리우스는 오체투지할 수밖에 없었다. 묘족 노인이 보다 못해 이만 됐다고 말할 때까지 사죄가 계속되었다.

    “사과를 받아준 주인장한테 감사의 말을 올려야지.”

    “감사합니다. 흐끄윽, 감사합니다…….”

    묘족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살펴보니, 상대에 대한 적의가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컸다. 이런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흐으윽, 끅……흐윽.”

    서러움이 밀어닥쳤는지 안드로말리우스가 울었다. 아이고야,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자기가 잘못해서 자기가 벌 받는 일에도 억울해하는 게 어린애의 특징이었다. 어쩌다 이런 애가 마왕이 되어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지 모르겠다.

    상태창을 확인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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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안드로말리우스   1/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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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력이 1밖에 남지 않았다. 허벅지에서 출혈이 지속되고 있으니 얼마 뒤면 바닥날 것이었다. 나는 다시 그를 잡아서 몸소 일으켜세웠다. 그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좋네. 됐어, 그만 하면 충분한 것 같군. 이제 자네 갈 길을 가게나.”

    “……감사합니다…….”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와 무릎을 쓸어주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출혈에 낯빛이 쌀뜨물처럼 허얬다. 그가 나에게 고개를 푸욱 숙여 인사하더니, 이윽고 광장에 모인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호, 혹시 포션을 가진 사람 없습니까……?”

    서른 명은 족히 넘는 마족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일부러 침묵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항쟁과 폭력이 일상사인 니블헤임의 주민에게 포션 하나가 구비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침묵했다.

    “제발, 포션을……나중에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회복마법이라도……누가…….”

    싸늘한 눈초리가 집중되었다. 뭐라고 쑥덕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모르긴 몰라도 좋은 내용은 아니리라.

    안드로말리우스의 두 뺨에 눈물이 흘렀다. 그는 도움을 구하기가 글렀음을 깨닫고 망가진 다리를 이끌면서 광장 저편으로 갈팡질팡 걸어갔다. 몇 걸음을 채 걷지 못하고 넘어졌다. 딸꾹질과 신음이 뒤섞인 목소리를 내며 안드로말리우스가 기어갔다.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바닥에 길게 붉은 선분을 그리고 있었다.

    “흐끄윽……끅……흐끅…….”

    나는 담배라도 피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타깝거나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냥 이런 순간에는 담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왕의 감정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저 작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기 싫다는 감정밖에 없을까?

    “전하.”

    부프에가 다가와서 속삭였다.

    “저에게 포션이 있습니다.”

    “주지 마라.”

    “허나 저런 죽음은 너무나 외롭나이다.”

    “몇 분 보지 못한 사이에 박애주의자가 되었군.”

    내가 피식 웃었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마는.”

    “…….”

    “잠자코 지켜봐라.”

    안드로말리우스는 얼마 기어가다 그만 멈추었다. 광장 끄트머리까지 갔다는 점을 칭찬해줘야 할까. 등이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아 아직 숨이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간이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상태창.’

    홀로그램이 뜨지 않았다. 죽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뒤돌아섰다. 광장에서 이어지는 아무 골목 하나를 잡아서 걸어나갔다. 부프에가 말없이 쫓아왔다. 장소를 벗어나자마자 마족들이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죽었다느니, 꼴보기 좋다느니 하는 말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거닐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부프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어, 굳이 죽이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침묵하는 분위기가 싫었기에 쾌히 대답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본인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강자가 모욕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인내하겠으나, 약자의 모욕에 가만히 당해줄 수는 없다. 그보다 더한 약자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이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벌써 소문을 듣고 맞은편에서 마족 아이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마왕이 죽었다고 서로 소리치면서 우리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얼른 가자는 아이와 조금 기다려달라는 아이가 차례대로 뛰어갔다.

    “두 번째로, 이곳 니블헤임에서 좋은 명성을 얻을 기회였다. 주민들에게 수시로 민폐를 끼치는 자를 처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본인에게 호감을 가질 이가 생기겠지. 그중엔 본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고로 왕에게 인상이란 중요한 법이지.”

    “……맞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런 말씀을 입에 담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부프에가 약간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대에겐 말해도 좋다. 왜냐하면 우리 둘은 공범이니까.”

    “고, 공범이요?”

    “포션이 있는데도 살리지 않았잖은가.”

    그가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전하께서!”

    “어허. 그대가 무슨 나의 신하인고. 눈앞에 죽어가는 이를 살릴지 말지는 온전히 그대가 판단하는 것인바, 죽게 내버려둔 것도 최종적으로는 그대의 책임일세. 쿤쿠스카 상회에서 마왕의 죽음을 방치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될까 꽤나 궁금하군.”

    부프에가 입을 떠억 벌렸다. 잠시 뒤에 정신을 차리고 그가 소리쳤다.

    “궤, 궤변입니다!”

    “농담이다.”

    “…….”

    차디찬 공기가 절묘하게도 우리 둘 사이를 지나갔다. 겁나게 질색하는 감정이 상대방한테서 느껴졌다.

    음, 방금 내가 우회적으로 쿤쿠스카 상회를 협박한 것을 이 친구는 알려나 모르겠다. 부디 눈치 채줬으면 한다. 아니면 라피스를 통해서 협박을 전달하는 수밖에 없거든. 라피스한테는 곤란한 역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내가 싱긋 웃었다.

    “비밀이다.”

    “예에?”

    “비밀이라고 말했다. 어찌 본인의 뜻을 사사건건 헤아리고자 하는고? 그대가 제량껏 추론해보아라.”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로 원망의 감정이 맹렬히 전달되었으나 알 바 아니었다. 용사를 죽이기 위해, 또는 훗날 용사를 각성시키지 않기 위해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다고 말한들 그가 믿어주겠는가. 저 혼자 열심히 머리에 열을 올리며 추론해주기 바란다.

    원래 남자는 비밀이 한 개 정도 있어야 매력적인 거다.

    *  *  *

    저녁, 부프에가 쿤쿠스카 상회의 본부에 도착했다. 막 단탈리안과 함께 니블헤임 전통 레스토랑에서 저녁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해산물 요리가 맛있었지만, 솔직히 부프에는 음식 맛을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부프에 님.”

    상회 본부의 1층 접수대에서 안내원이 말했다. 풍성한 금발이 아리따운 호족(虎族) 아가씨였다. 상회의 간판으로 삼기에 적절히 아름답고 유사시에 전투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인재로, 특별히 부프에가 인사에 개입하여 고용한 자였다.

    부프에가 습관적으로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늦은 시간에 수고하십니다.”

    “아뇨, 이게 제 일인걸요.”

    호족 여인이 뺨을 붉혔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을 부프에는 진작부터 알았다. 그러나 그는 여자관계에서 깨끗할 필요가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엔 그런 인물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상회의 주인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회장님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여인의 표정에 선망이 스며들었다.

    상회 회장, 이바르 로드브로크.

    그 전설적인 진조는 쿤쿠스카 상회의 일곱 간부 중에서도 필두를 차지했다. 명목상 회장은 일곱 간부와 동등하며 회의에서 의장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지만, 그것이 정말로 명목이라는 사실을 여인도 알고 있었다. 간부 중에 로드브로크 회장에게 대립하는 자도 있긴 했다. 그러나 소수파에 불과했다.

    눈앞의 사내는 회장에게 직접 보고를 할 만큼 전도유망한 인재였다. 여인이 부프에와의 만남이 짧은 걸 안타까워하면서도 텔레포트 장치까지 그를 안내했다. 부프에가 품속에서 목걸이를 꺼내들자, 텔레포트 장치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텔레포트가 승인되었다는 표시였다.

    “그럼 이만. 수고하십시오.”

    “저기, 부프에 님. 혹시 시간이 되시면……그.”

    여인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언제 저녁을 한번 대접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저녁, 말입니까.”

    “예! 항상 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또, 그……그러니까, 개인적으로도 감사를 표시하고 싶기도…….”

    이런, 하고 부프에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려하던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처럼 묘령의 여성이 고백해온 적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프에는 어디까지나 유망하고, 예의바르고, 실력이 있는 미청년으로 머물러야만 했다.

    그런 자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과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따로 있었다. 예컨대 순수한 미청년을 선호하는 마계의 귀족부인에게 접근할 때라든가. 이 때문에 부프에라는 존재가 허락되고 있었다.

    ‘이런 역할이 필요하긴 해도, 조금 귀찮군.’

    부프에가 최대한 온화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아…….”

    여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호족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자신이 차였다는 생각에 몹시 부끄러운 것이리라, 하고 부프에가 짐작했다. 그 치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부프에는 즉각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렸다.

    “안델리나 양은 저에게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관심을 보이시고 계시는 지금, 저에게 내려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그렇군요. 그렇지요.”

    여인의 표정이 다소 침착해졌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청년의 미래를 생각했다. 확실히 쿤쿠스카 회장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더없는 영광이요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약간이나마 방해했다는 생각이 들자, 도리어 그녀는 자책감이 들었다.

    부프에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회장님을 이 이상 기다리게 만들면 후환이 두렵거든요.”

    “아, 네! 당연하죠! 죄송해요, 제가 괜히 시간을 잡아서…….”

    “아닙니다. 안델리나 양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저도 즐거웠습니다.”

    하고 부프에가 텔레포트 장치 안의 마법진으로 걸어 들어갔다. 1인용 텔레포트였다. 부프에의 작업멘트에 여인이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부프에는 다시 한번 미소를 날려주고 주저없이 마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눈앞에 붉은빛이 점멸했다.

    상회 본부 최상층. 오직 극소수의 텔레포트 장치를 통해서만 올 수 있는 장소였다. 부프에는 적막하기 그지없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 목재로 된 문이 서 있었다. 고급스럽지만 흡혈귀의 취향에 따라 다소 기괴한 문양이 문짝에 새겨져 있었다.

    ─끼이이익.

    방안에 아무도 없었다. 부프에가 익숙하다는 듯 거침없이 걸어갔다. 넓은 방을 가로질러 창가에 당도하자, 그곳에는 흡혈귀 전용의 관(棺) 열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요즘에는 흡혈귀도 촌스럽다고 침대로 쓰지 않는 관이었다. 하지만 부프에는 관에서 자는 것이 좋았다. 지금도.

    천 년 전에도.

    부프에가 여러 관 중에서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관짝이 소리없이 열리고 닫혔다. 잠시 후, 부프에가 들어간 것과는 다른 관에서 문이 열렸다. 거기서 초로의 신사가 일어섰다. 남자가 세수하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그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니블헤임의 붉은 저녁이 골목과 골목에 번지고 있었다.

    “마왕 단탈리안……흥미로운 인물이군.”

    노인은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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