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4화 (34/510)

00034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안드로말리우스 전하! 말씀이 지나칩니다!”

부프에가 말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반응이 시큰둥했다. 나와 악수한 손을 얼른 빼내서 오물이라도 묻은 양 탁탁 털어댔다.

“지나치긴. 71위? 그럼 내가 이름을 못 기억하는 것도 당연하지. 어이, 친구. 뭐 좋을 거 보겠다고 이 촌구석까지 오셨나? 얼른 꺼지게.”

“단탈리안 님은 저희 쿤쿠스카 상회의 손님입니다.”

부프에가 안드로말리우스와 내 사이로 끼어들었다.

“더 이상의 모욕은 저희 상회에서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좌시하지 않을 거면, 어? 날 잡아서 곤장이라도 치시려고? 어이구야. 아무런 명분도 없이 마왕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상회라고 소문 나면 다른 마왕들이 참 좋아라 하겠다. 그래서 네놈이 건방지다는 거야, 박쥐 새끼야.”

안드로말리우스가 부프에를 곁눈질로 노려보았다.

“네깟 것들이 꼼수로 언령(言靈)에서 벗어나본들 누군가의 노예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 그래, 네놈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응? 아마도 이름이 있을 거 아니냐. 그 이름으로 자기를 지칭하는 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어?”

“…….”

“하찮은 노예 새끼들. 천한 벌레들 같으니라고. 결국 너희는 우리 마왕의 노예야. 그걸 기억해라.”

부프에가 침묵했다. 마음속으로는 절찬리에 이를 갈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프에는 모종의 방법을 써서 마왕에게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 같았다. 별로 자랑스러운 수법이 아니어서 모욕을 당하는 것이고. 마왕의 힘에 대항하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흥미로웠으나, 잠시 머릿속 한켠에 호기심을 밀어두었다. 노예니 뭐니 하는 단어를 들으면서 대충 진실이 유추되기도 했다.

“퉷.”

안드로말리우스가 침을 뱉었다. 도중에 나를 한번 꼴아보고, 술집으로 다시 걸어갔다. 뒷모습이 무척 왜소했다.

부프에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그대는 소신을 다했다.”

내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하문할 것이 몇 개 있다. 마왕들 사이에도 법률이 있는가?”

“없습니다. 마왕이 법을 전해도 오직 본인의 영토에 적용될 따름이지요. 마왕 위에는 그 어떤 것도 군림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마법을 쓸 줄 아는고?”

“예.”

“아주 좋군.”

결심이 섰다.

나는 품속에서 마법스크롤을 꺼냈다. 예전에 라피스한테 석 장 사들인 물건이었다. 노예경매소에서 한 번 쓰고 아직 두 장이 남아 있었다. 그중 한 두루마리를 부프에한테 건네주었다. 부프에가 얼떨결에 마법스크롤을 받았다.

“이것은……?”

“중규모 소환마법이 담긴 스크롤이다. 여기서 거행하라.”

“저, 전하.”

부프에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송구합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 니블헤임에서 소환마법은 엄격한 제도 아래 금지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전하께서 지금부터 하실 일은…….”

“마왕 위에 그 어떤 법률도 군림할 수 없나니.”

내가 그를 빤히 보았다. 굳이 연기 스킬을 쓸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소 강하게 밀어붙이면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묘하게 확신이 들었다.

“그대가 그리 말했다. 본인이 잘못 들었는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더 이상의 반문은 허가하지 않겠다. 거행하라.”

부프에의 눈동자에 내 눈동자가 고스란히 비추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안드로말리우스가 난장판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묘족 노인이 죄송하다는 말만 고장 난 기계처럼 반복했다. 보고 있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광장에 모인 몇몇 마인들이 느끼고 있는 억울함, 분개, 적대심까지 전부.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프에가 스크롤을 펼쳤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술집 방향을 쳐다보았다. 안드로말리우스, <던전 어택>의 플레이어에게 조작법을 알려주는 데 소모된 마왕. 튜토리얼용 적군이 필연적으로 그러하듯 주인공 용사한테 곧바로 죽는다. 어째서 자신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냐고 묻는 용사에게, 안드로말리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벌레를 밟는 데 이유가 왜 필요하지?

용사가 마왕에 대해 적대적인 견해를 가지게 된 데 지대한 공언을 한 발언이었다. 안드로말리우스 때문에 용사는 마왕이란 존재 자체를 이 지상에서 몰아내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되니까.

“아르체시투스(Arcessitus).”

부프에가 중얼거렸다. 직후, 광장 한가운데에 붉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종족에 따라 마법진은 색깔이 달라진다. 붉은색은 아마도 흡혈귀의 상징이겠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들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 했다. 부프에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여유롭게, 조금 두근거리면서 마법진을 관망했다. 곧이어 마법진에서 골렘 부대와 요정 부대가 붉은 빛에 휩싸여 소환되었다.

“소환마법이잖아!”

“미친, 어떤 새끼가 저 따위 마법을 써갈겨!?”

“쿤쿠스카 상회 자식이 썼다네. 스크롤을 찢는 걸 내가 봤어.”

사람들이 광장 한구석에 급히 모여들었다. 각양각색의 종족이 알아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바로 전열이 완성되었다. 품속에서 능숙하게 단검 따위를 꺼내드는 모습이 싸움에 아주 익숙해보였다.

‘야아.’

조금 감탄했다.

‘저거, 기습해도 별반 성과가 없겠네.’

노예경매소에서 인간들이 보여준 태도에 비하면 이곳 주민들은 능숙한 전사와 같았다. 만일 내가 이번에 노리는 목표가 저들이라면 크게 고생할 것이 분명했다.

안드로말리우스만 홀로 동떨어져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는 듯했다. 어이쿠야, 입까지 떠억 벌리고 계셨다. 저러다 입에 파리가 들어갈 텐데.

두 번째라서 익숙해진 걸까. 갑작스러운 소환에도 몬스터들은 침착했다. 이번에도 마음껏 날뛰면 되는 거냐, 하고 골렘과 요정이 맹렬하게 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미 급한 요정 서너 마리가 벌써부터 날개짓하며 광장 상공을 날아다녔다. 귀여운 것들.

“윈드커터.”

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일제 사격.”

손가락 끄트머리가 가리킨 곳에는 안드로말리우스가 멀뚱하게 서 있었다. 요정들이 즉각 바람의 칼날을 쏘아냈다. 열 마리의 요정이 발사한 마법은 이미 안드로말리우스에겐 오버킬이나 다름없었다.

최하급요정의 기본 공격력이 3. 여기에 내 요정들은 평균 레벨이 3이니까, 대략 평균 공격력이 4 정도 된다. 안드로말리우스의 방어력은 3이다. 공격력 4에서 방어력 3을 빼어서 마지막엔 공격력 1이 남는다. 즉 이번 한번의 공격에 모두 10 가량의 데미지가 안드로말리우스에게 들어간다. 체력이 고작 5에 지나지 않는 안드로말리우스는 한 번의 공격조차 감당하지 못하리라.

당장에 그가 죽어버리면 곤란했다. 나는 팔다리같이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를 노리라고 우리 귀여운 요정들에게 주문했다.

“히, 히이이익!?”

안드로말리우스가 기겁했다. 녀석은 곧바로 뒤돌아서서 뛰어갔다. 하지만 바람보다 더 빨리 뛸 리는 없었다. 윈드 커터가 녀석의 허벅지 등에 명중했다. 녀석이 넘어지면서 비명을 터트렸다.

“끄아아아악! 시바아알!”

그래도 근성이 있는지 안드로말리우스가 엉금엉금 기어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느긋하게 요정들과 함께 술집으로 돌입했다. 요정들이 나를 중심으로 타원을 그리면서 날았다. 골렘은 덩치가 커서 건물에 들어올 수가 없으므로 바깥에 대기시켰다.

“으, 으으. 이거 뭐야, 어? 이거 뭐야!”

안드로말리우스는 술집 구석탱이에 주저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기어가는 와중에 피를 제법 많이 흘렸는지 바닥에 붉은 액체가 묻었다. 내가 오는 모습을 보고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너 이 새끼, 뭐냐고!”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군.”

약간 유쾌해져서 내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일단 무척 멍청한 질문이라고 말하겠네. 내가 뭐냐고 묻는다면 마왕이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지.”

“끄으윽! 마왕 새끼가 왜 나를 죽이려 들어!?”

“그것도 우문이로군. 벌레를 밟는 데 무슨 이유가 달리 필요하나? 음, 대화를 나누기 앞서 일단 그 못돼먹은 말투부터 고쳐먹게나. 무얼.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자동으로 말투를 교정하게 해주겠네.”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무, 무슨――끄하아아아악!”

요정들이 윈드 커터를 정확하게 상대방의 팔뚝에 쏘았다. 핏방울이 튀겼다. 안드로말리우스는 한손으로 다친 팔뚝을 잡고 바닥에 굴렀다. 그의 얼굴이 금방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자. 비명만 지르지 말고 본인 말도 좀 들어보게.”

“끄윽, 끄으으윽…….”

“본인은 요사이 꽤나 피곤했어. 조금이라도 심신에 안정을 취하기 위해 모처럼 마계의 도시로 휴양을 왔지. 그래서 기분 좋게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웬 깡패 새끼가 시비를 걸어오는 것 아닌가. 이거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자네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죄송합니다, 끄윽! 죄, 죄송…….”

드디어 상황을 파악했는지 안드로말리우스가 사정하기 시작했다. 다리와 팔이 엉망이 되고 나서야 빌어대는 것이니 지각해도 한참 지각한 것이었다. 나는 조금 전에 안드로말리우스가 묘족 노인에게 한 말을 그대로 똑같이 들려주기로 했다.

“말로만 사과하지 말고 진심을 보여주게. 진심을.”

“도, 돈을 드리겠습니다! 끅!”

안드로말리우스가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내 발치에 가져다 놓으려 했다. 나는 사정없이 그의 손등을 짓밟았다. 그 손에서 돈주머니가 아래로 떨어졌다.

“끄흐으으윽!”

“지금 본인을 한낱 불량배로 모는 것인가? 실망스럽군. 만일 내게 보여줄 수 있는 진심이 이것이 전부라면 본인은 그대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어.”

“무엇, 무엇이든지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목숨만은…….”

이제 그는 아예 이마통을 바닥에 꼬라박은 채 중얼거렸다. 고통에 침이 계속 흐르는지 침에 의해 발음이 다소 막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잭에게 이와 똑같은 짓을 했을 때는 우울함과 죄책감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통쾌했다. 하긴 잭은 애송이 호구였으나 결코 쓰레기가 아니었다. 이 놈은 쓰레기였다.

“본인이 그대에게 알고 싶은 바가 한 가지 있다네.”

“무엇이든, 무엇이든…….”

“그대가 정직하게 대답해준다면 그대의 목숨에는 안전을 보장하지. 어떠한가. 대답할 마음이 생기는가?”

안드로말리우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다기보다 발버둥친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지만. 내게는 그 정도 제스처도 만족스러웠다.

“안드로말리우스. 자네의 마왕성이 어디에 있는가?”

“프랑크, 끄으으……프랑크 제국에 있습니다. 로렌 지방의……라엘리아 산중턱입니다.”

“훌륭하군.”

내가 만족스러워서 미소를 지었다.

“마왕성 근처에 있는 마을 이름이 무엇인가?”

“포메트라, 깜파뉼……그 외엔 이름 없는 마을밖에…….”

아주 좋다. 이것이 내가 노리는 바였다.

얼마 전부터 내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바로 십 년 후에 용사가 되어 마왕들을 족치고 다닐 용사, <던전 어택>의 주인공 캐릭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시나리오에 따르면 안드로말리우스 다음에 바로 내가 용사한테 토벌당한다.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서라도 용사에 대한 사전준비는 어떤 측면에서든 필요하다.

‘문제는 내가 용사가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는 것.’

게임에는 용사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만 나왔지 상세하게 어느 지방,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사실상 용사를 직접적으로 견제하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드로말리우스를 보자 좋은 수가 떠올랐다.

튜토리얼에 따르면 안드로말리우스의 마왕성 근처에 용사의 마을이 있다. 그렇다면, 안드로말리우스 마왕성 주변 일대를 집중적으로 수색하면 용사의 마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지금 꼬맹이에 불과한 용사를 미리 처리하면……내가 이 세계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대폭 올라간다.’

본격적으로 적이 성장하기 전에 애당초 싹부터 제거해버린다. 약간 치사한 짓이었으나 겨우 약간의 치사함에 내가 지레 물러설 리가 없었다. 여하간 마왕인 내게 용사란 무서운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끄허어어억!”

안드로말리우스의 손등을 깔아뭉개고 있는 내 오른발에 힘을 더 주었다. 또 비명이 터졌다. 역시나 듣기 좋은 비명소리였다. 스트레스가 풀려가는 게 현재진행형으로 느껴졌다. 이러다가 스트레스를 남 괴롭히는 것으로 푸는 변태가 되어버리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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