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부프에의 말씨에 자부심이 한아름 담겨 있었다. 마치 자기가 도시를 일으켜세운 당사자라는 듯이.
조직에다 자신의 정체성을 투사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간부도 아니고 일개 직원이 그런 자부심을 갖는 것이 다소 우스꽝스러웠으나, 그냥 넘어갔다. 지금은 상대방의 심리구조보다 도시 풍경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희여멀겋게 회칠한 빌라가 줄지어 섰다. 빌라는 골목 양옆으로 늘어섰는데, 골목이 좁은지라 건물과 맞은편 건물 사이로 빨랫줄이 거미줄처럼 추욱 처져 있었다. 옷가지와 담요가 어디를 한참 날아다니다가 우연히 여기에 걸렸다는 듯 나풀거렸다. 그렇게 미로와 같은 골목을 걷다보면 가끔씩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부분 늙은 마족들이 벤치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이! 대접이 엉망이잖아!”
광장 한구석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거기엔 작고 허름한 술집이 있었다. 오픈 카페를 겸업하는 동네 술집이었는데, 그곳에서 묘족(猫族) 노인이 사내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저희 가게가 많이 미흡해서…….”
“망할 고양이 새끼. 깡촌 술집 따위가 별 볼 일 없다는 거야 당연하지. 나는 말이야, 모처럼 토속적인 향내를 맡고 싶어서 여기까지 행차한 거란 말이다. 어? 그런데, 어? 서비스는 엉망이고 술은 미지근하고 탁자는 더럽고, 아주 기분이 망가졌다 이거야.”
서비스가 엉망이고 술이 미지근하고 탁자는 더러운 것이 바로 토속적인 향내일 텐데, 하고 내가 마음속으로 딴지를 걸었다. 노인도 똑같이 생각했겠지. 술집주인인 노인에게서 실시간으로 맹렬한 적개심과 증오가 전달되고 있었다.
옆에서 부프에가 한껏 목소리를 낮춰서 내게 귓속말 했다.
“……제가 길을 잘못 안내했습니다. 유쾌하지 않은 장면을 보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 자는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사과할 필요없다. 이곳으로 오자고 제안한 것은 본인이었으니. 왜, 저 자가 권력자인가?”
“권력자라기보다는, 그. 저 자의 머리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그때 깨달았다. 묘족 노인의 감정은 전달되는데 저 난봉꾼의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부프에 말대로 머리를 살펴보니 자그마한 뿔 하나가 뒤통수에 솟아 있었다.
‘아하. 그렇군.’
어찌된 영문인지 파악했다. 나는 인간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하고도 내가 감정을 읽지 못하는 종족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또 하나 있는 것이었다.
“저 분이 서열 제72위의 마왕, 안드로말리우스 전하입니다.”
우와, 나 말고 마왕은 처음 본다.
그런데.
“말로만 사과하지 말고 진심을 보이란 말이다, 진심을! 묘족 아니랄까봐 야밤에 발정 난 고양이마냥 시끄럽게 앵앵거릴 줄만 아는구나. 어?”
안드로말리우스가 묘족 노인의 옆구리를 뻥 찼다.
……어째 꼬락서니가 동네 불량배랑 다를 바가 없다. 나도 마왕이라 자칭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위엄이나 권위 이런 게 부족하다마는, 저 안드로말리우스인가 안드로메다인가 하는 녀석보다는 낫다. 그렇게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부프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름한 동네술집이라도 모두 조직 한두 개를 뒷배로 갖고 있습니다. 본래 저렇게 술집주인을 핍박하면 조직 차원에서 보복에 들어갑니다만.”
“마왕이라서 아무도 제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부프에가 진절머리를 치며 말했다.
“안드로말리우스 전하는 이곳 니블헤임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거의 언제나 말썽을 피고 있지요.”
“여기서 거주한다니? 마왕성은 어쩌고.”
“아랫사람한테 맡겨준 채 자신은 휴양지에서 노는 것입니다. 소문에 따르자면 안드로말리우스 전하의 마왕성은 거대한 탄광과 같다고 하더군요. 고블린들이 끊임없이 마광석을 채취하여 벌어들이는 돈으로 여기 니블헤임에서 사치와 향락을 즐깁니다.”
세상에. 전형적인 악덕이었다. 저런 마왕도 있구만.
“특히 카지노를 즐기는데, 며칠 전에는 카지노에서 일만 골드를 날렸다고 합니다. 그 일만 골드를 모으기 위해서 고블린들이 밤새서 곡괭이를 휘둘러야 했음은 물론이지요.”
“쓰레기 버러지로군.”
“적절한 표현입니다.”
게임 <던전 어택>에서 안드로말리우스는 튜토리얼에 등장한다. 용사의 칼질에 손쉽게 죽어버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부하라고는 약해빠진 고블린 몇 마리밖에 없어서 레벨 1짜리 용사한테도 당하는데, 이런 사정이 숨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최악의 마왕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보니 나는 양반이었다.
저거 살려둬봤자 괜히 용사한테 경험치나 가져다바칠 텐데 그냥 여기서 죽여버리면 안 되려나. 안드로말리우스의 이벤트가 주인공을 본격적인 용사로 각성시키기도 하고.
‘상태창.’
혹시 몰라서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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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체력] [공격] [방어]
- 안드로말리우스 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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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핫!’
겁나게 약하잖아!
맙소사. 최하급골렘 레벨 1짜리가 가진 능력치가 7/5/5(체력/공격/방어)이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쉽게 말해 최하급골렘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능력치를 가졌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저렇게 허약한 놈을 왜 니블헤임 주민들이 방관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기 어려웠다.
“왜 저 따위 애벌래 새끼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냐.”
“실례합니다만, 전하. 안드로말리우스 전하 또한 명색에 마왕입니다.”
“마왕이라는 이유만으로 떠받든다는 얘기라면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왕이든 아니든 누구나 자기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법. 저 자는 마왕의 호칭이 아까운 돼지 자식에 불과하다.”
부프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족은 천성적으로 마왕에게 대항할 수 없나이다.”
“천성적으로?”
“모르셨군요. 마족이 마왕을 적대하려는 순간 극심한 고통이 피어오릅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지요.”
뭐시라.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마왕은 적어도 마계에서 누구한테 해꼬지 당할 일이 없다는 뜻 아닌가. 마계까지 인간이 쳐들어올 리는 없고, 설령 쳐들어올지라도 니블헤임까지 함락시키지 못할 공산이 크니까.
한 마디로 마계에선 마왕이 낱말 그대로 왕이라는 소리였다. <던전 어택>에 그런 설정이 있었나? 게임 폐인인 나에게도 금시초문인 정보였다.
‘어……아니. 짐작 가는 일이 있긴 한데.’
<던전 어택>에서 대략 중후반부에 한 마왕의 간부가 주인공 일행에 합류하는 이벤트가 있다. 간부가 인간들과 싸우는 와중에 용사한테 그만 애정을 품어버린다는, 아주 쉬어빠진 이야기이다. 간부가 미녀라는 건 당연하고.
간부가 '난 마왕에게 저항할 수 없는 몸이다'라며 용사한테 울고불고 늘어지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 용사는 특별히 강력한 노예각인의 마법을 써서, 간부로 하여금 오직 자신의 명령에만 복종하게 만든다. 그 이후로 간부는 용사한테 시시때때로 몸을 들이대면서 섹스 어필을 해대는데……아무튼.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거였냐.’
나는 그저 간부한테 모종의 저주가 새겨졌겠거니 여기고 있었다. 마왕한테 적대할 수 없는 저주라느니 뭐 그런 것이 있을 법하지 않은가. 주연 히로인도 아니고 조연 히로인이라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는데, 지금 보니까 중대한 설정이 숨어 있었다.
‘얼마 전에 고블린 부락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이유가 따로 있었군!’
화전촌 주변의 고블린 부락을 토벌할 때도 고블린들이 영 맥없이 쓰러졌다. 내 골렘 부대가 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마왕인 내게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엄청난 정보였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이 단박에 늘어났다. 예컨대 고블린 부락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고블린들을 협박해서 특정 마을을 습격하게 만들 수 있다. 내 명령을 거부할수록 고블린들은 고통에 시달릴 것이고, 고통이 무서워서라도 결국은 복종할 수밖에 없겠지.
허, 휴양차 들른 도시에서 어마어마한 걸 얻어가네.
“술집주인인 묘족도 일신의 전투력으로는 안드로말리우스 전하를 압도합니다. 하지만 저렇듯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만 합니다. 마왕이란 저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이지요.”
부프에는 증오를 느끼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묘족 노인에게서 점점 더 짙은 적개심이 느껴질수록 나 또한 안드로말리우스에 대한 증오가 생겨났다. 평소라면 적당히 감정을 관망하겠으나, 상대방이 송사리 중의 송사리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런지 굳이 감정을 제어하지 않았다.
“궁금한 점이 있다. 마족은 마왕에게 대항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인가?”
“통상은 그렇습니다. 마왕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같은 마왕뿐이지요. 아, 물론 하등한 인간종도 전하께 반항할 수 있습니다만.”
부프에가 피식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
내가 잠깐 고민에 잠겼다.
마왕 안드로말리우스는 <던전 어택> 튜토리얼에 등장하는 잡몹이다. 고블린 부대를 이끌고 겁대가리 없이 주인공의 마을을 습격해서, 주인공의 부모님과 여동생을 비롯하여 마을사람을 학살한다. 주인공이 사는 마을이 안드로말리우스의 던전에 가깝게 위치한 것이 불운이었다.
그것이 분명히 게임 시나리오가 시작하기 7년 전. 앞으로 대략 3년 뒤에 벌어질 일이다. 졸지에 가족과 마을사람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우연히 『하얀 날개』라는 A급 모험대에 주워지고, 모험대의 막내로서 실력을 쌓고 동료를 얻는다. 그리하여 7년이 흐른 뒤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의 던전에 쳐들어간다. 당연히 잡몹에 불과한 안드로말리우스는 그대로 썰려버리고.
“부프에. 마왕 안드로말리우스를 비호하는 세력이 따로 있는가?”
“아니요, 없습니다. 저희 쿤쿠스카 상회가 단탈리안 전하를 보조하듯, 예전에는 안드로말리우스 전하를 보조하는 상회도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흐음.
“안드로말리우스를 좋아하거나 그와 친분이 있는 마왕은 없는가.”
“역시 없습니다. 마왕 전하들 사이에서도 안드로말리우스는 좋지 않은 취급을 받지요. 방금 전에 단탈리안 전하가 쓰레기 버러지라고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전하.”
부프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 하문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별 것 아니다.”
내가 너털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애도하지 않을 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재밌어서 말이다.”
“……전하.”
부프에의 목소리가 놀라움으로 인해 한 옥타브 높아졌다.
“설마……?”
“아니, 이게 누구야! 위대하신 쿤쿠스카 상주 나으리의 꼬붕 아니신가.”
그때 안드로말리우스의 목소리가 우리 쪽을 향했다. 아마 자신을 두고 멀리서 쑥덕거리는 우리 두 사람이 눈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묘족 노인의 머리를 오른발로 걷어찬 다음,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부프에가 고개를 숙였다.
“안드로말리우스 전하를 뵈옵니다.”
“딱딱하기는. 어? 불철주야 박쥐 새끼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시느라 고생 많겠어. 그러고보니 댁도 박쥐 새끼였지! 내 참, 그걸 까먹고. 미안해. 뱀파이어들을 박쥐 새끼라고 부르는 버릇이 하도 입술에 붙어버려서 나도 모르게 박쥐 새끼라고 불러버렸네. 내 작은 실책을 용서해주겠나? 어?”
와우, 옆에서 부글부글 끓는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부프에는 현재 한 시간 내내 물 끓인 냄비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실책을 논하겠습니까.”
그러고도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으니 과연 상인은 상인이구나 싶었다. 라피스도 그렇고 쿤쿠스카 직원들은 표정 관리에 도가 텄구만. 아니, 라피스는 애당초 표정이 없는 거지만.
“그래, 그래.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야. 어? 자기가 좁쌀만한 권력을 가졌다고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그러면 안 돼요. 박쥐 새끼야. 내가 너를 오래동안 지켜봤는데 말야, 너 아주 인성이 못 됐어. 건방지단 말이지. 황금 조금 만지작거렸다고 감히 마왕을 우습게 보고 말이야. 어?”
“……새겨 듣겠습니다.”
부프에의 감정이 냄비에서 가마솥으로 진화했다.
“근데 옆에 이 양반은 누구신가? 멀대처럼 생겨서 표정이 뚱하구만. 속도 아주 텅 비었고. 어? 내 무슨 현자 나으리라도 되는 줄 알았네.”
“단탈리안 전하입니다. 곧 있을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행차했습니다.”
“뭐? 전하?”
안드로말리우스의 눈빛에 경계심이 들어섰다. 그가 몸을 완전히 내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 조심스럽게 악수를 건넸다.
“크흠, 미안합니다. 제가 미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실례를 범했습니다요.”
말투도 대번에 바뀌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느낄 순 없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손바닥 보듯 뻔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최하위의 마왕. 행여나 자기보다 서열이 한참 높은 마왕을 건드렸다가 곤혹을 치룰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방긋 웃으면서 손을 마주잡았다.
“아니오. 안드로말리우스 님의 명성은 예전부터 익히 들어 언제 한번 찾아뵙고 싶다 생각했는데 이리 우연히라도 만나 반갑소.”
“무슨 명성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 실례지만……단탈리안 님은 서열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가 동지들의 사정에 관심이 적어 미처 단탈리안 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씨구. 칠십일 명밖에 안 되는 자기 천적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했다. 하긴 본인도 그걸 아니까 인간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니블헤임에서만 죽치고 있는 것 아닐까.
“부끄럽게도 서열 제7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소외다.”
“뭐? 71위?”
안드로말리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기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서열의 마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럴까, 태도 또한 다시금 일변했다.
“하, 쓰레기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