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헛, 헛. 마침 급한 용무가 생각났군. 안타깝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세나, 젊은이.”
그 말을 끝으로 은랑족이 빠르게 경보로 떠나갔다. 리저드맨을 큰소리로 욕하면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호구 벳겨먹을 기회를 놓쳤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은랑족이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넓은 대로에서 수백 명의 몬스터가 꾸역꾸역 도시로 향했다. 크고 작은 난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새끼야! 왜 어깨를 치고 지랄이야!”
“괜히 시비를 걸고 앉았네요. 프로그맨의 창자에선 돼지 냄새가 난다더니 정말인지 확인해보고 싶은걸요.”
“아앙? 창녀 같은 여우 년, 똥통에다 처박은 다음 썰어버려주마.”
“염병이 문둥병 도져 발광하는 소리하고 있네요. 저질스러운 바보에다 돼지우리 같은 냄새가 진동하는 양서류 님, 대가리를 오픈 카페로 만들어줄까요? 그 멍청한 머리통도 한번 숨을 쉬어보면 조금 쓸 만해질지 누가 알겠어요.”
“창녀 년이 보드카에 절어 대가리가 삐꾸가 되어버린 모양이군. 흐리멍덩한 낯짝에 칼질 한방 갈겨줄까? 앙?”
각각 머리가 여우처럼 생긴 몬스터와 개구리처럼 생긴 몬스터가 얼굴을 맞대고 으르렁거렸다. 여타 몬스터는 일상적인 광경을 지나치듯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당사자의 친구로 보이는 이들끼리 여우와 개구리 중 누가 이길 것인지 소소하게 내기판을 벌였다.
오케이.
대충 마계란 게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 알겠다.
비유하자면 대항해시대의 리베르탈리아, 버마의 앵글로타운, 엘 레이, 요하네스부르그, 원래 세계의 악명 높은 도시처럼 이곳도 무법자들이 법률을 만들고 무법자 중의 무법자가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장소였다.
사람들이 오가는 대낮에도 사기와 싸움이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낮이 가고 밤이 찾아왔을 때 이들이 어디까지 잔인해지고 교활해질지 예상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지독한 개인주의와 구역질 나는 파벌싸움을 산소인 양 호흡하며 돌아다닐 것이다.
‘하. 고블린 안내원이 정말로 좋은 교육을 시켜줬네.’
숨을 돌릴 겸 휴양지에 왔다는 기분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법의 도시일수록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한다는 사실은 여러 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다. 라피스는 진심으로 내 휴식을 도와주겠지. 하지만 라피스와 만나기 전까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비호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모자를 바로잡았다. 마왕의 뿔을 감추려고 쓴 모자. 내가 마음을 새로하고 검문소로 걸어갔다.
“눈빛이 좋아졌네요.”
검문소 직원이 통행료를 받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푸근한 너구리처럼 생긴 랫서맨이었다.
“아까 전에는 영락없이 순둥이였는데 지금은 마치 노련한 건달패가 된 것 같군요. 아, 참고로 칭찬이에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니블헤임에서 웬만큼 잘 나가는 건달패는 중급 마족보다 위세가 좋거든요.”
하고 그녀가 주소 적힌 종이를 한 장 건넸다.
“제가 속한 조직에서 운영하는 여관이에요. 조무레기가 건드릴 수 있는 곳이 아니죠. 평범한 여관보다 숙박비가 두 배 비싸지만 적어도 잠자고 일어나니까 내장이 사라질 일은 없습니다.”
“감사히 받지요.”
랫서맨이 찡긋 윙크를 날렸다.
검문소에서 빠져나오자 저 멀리 수평선에 도시가 서 있었다. 거대한 항구도시였다. 바다에서 쉴 새 없이 함선이 돌아다녔고, 땅에서는 열 몇 개의 대로가 도시까지 이어졌다. 내가 서 있는 장소는 대로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금도 수천 명의 몬스터가 각 대로를 따라 우글우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찌이익, 찌익.
나는 랫서맨이 건네준 종이를 갈가리 찢었다. 대화를 하면서 그녀의 감정이 전해졌다. 바로 탐욕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안내원으로 활동하며 부업 삼아 나 같은 뜨내기들을 자기와 맥이 닿은 여관에 소개시키는 것이리라. 대가로 소정의 의뢰비를 받으면서 말이다. 그 소정의 의뢰비가 여관 손님의 신장 한짝을 팔아서 마련한 게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타지인이라서 살인멸구해도 찾을 이 하나 없어 묻히기 딱 좋다.
라피스 측에서 마중 나오기로 한 북쪽 대로를 따라 쭈욱 걸어갔다.
잠시 뒤에 나는 쿤쿠스카 상회에서 파견왔다는 인물과 조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는데, 그는 자기 자신을 뱀파이어라 소개했다. 도시 입구에서 『단탈리안』이라고 큼직하게 적힌 팻말을 들고 있어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전하. 상회에서 마련한 숙소까지 전하를 안내할 3급 사무마 부프에라고 합니다. 먼저 니블헤임 안에서 전하에게 신변의 위협이 생겨날 일은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없음을 약속드립니다.”
악수한 손에서 친근함을 전달하기에 적당한 악력이 전달되었다. 실제로 느껴지는 그의 감정도 친근함이었기에 나는 부담없이 기쁜 마음으로 악수했다. 뱀파이어이기 때문일까? 손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서열 제71위의 단탈리안이다.”
지금까지는 혹시나 소동이 일어날까봐 정체를 숨겼으나, 마왕은 모름지기 최소한의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고 라피스가 신신당부 조언해준 바에 따라 반말을 쓰기로 했다. 지금의 상대에겐 마왕임을 숨겨야 할 까닭도 없었다.
허나 되도 않게 마왕의 권위를 내세울 필요 또한 없지.
“니블헤임은 처음이니 본인이 모르는 바가 많다. 이 도시에 관해서는 그대가 한참 전문가일 테지. 모쪼록 잘 부탁한다.”
“물론입니다.”
청년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가 이윽고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호감도가 1 올랐다고 홀로그램이 알려주었다. 생각과 달리 마왕인 내가 겸손하게 나오니까 호감이 생긴 것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하는 마왕 전하들 중에 단탈리안 님께서 제일 먼저 도착하셨습니다. 행사가 열리려면 아직 일주일 가량이 남았지요. 그동안 불편하시거나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쿤쿠스카 상회에서 진심을 다해 단탈리안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고맙다. 그런데 라피스 라줄리는 어디 있나?”
“단탈리안 님께서 묵게 되실 숙소 근처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본래 전담원인 라줄리 님이 전하를 보필하는 게 당연합니다만…….”
부프에가 장난스레 미소를 지었다.
“여성이 남성을 안내하는 데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뒤따르기 마련이지요. 니블헤임은 마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이자 최고의 휴양지입니다. 휴양지에 으레 그러하듯 니블헤임에도 금녀(禁女)의 구역이 적지 않습니다.”
다소 직접적인 화법에 낯이 부끄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기대되는군.”
“이를 말씀입니까. 우선 숙소부터 들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여장을 푸신 이후에 괜찮으시다면 좋은 레스토랑에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마차로…….”
젊은 뱀파이어 부프에가 날 안내하려는 참이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마차는 타지 않겠다.”
“예?”
“그리고 본인은 여장이라고 할 만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다. 숙소에 먼저 갈 필요도 없다.”
내가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이곳은 도시 입구에 차려진 간이 시장이었다. 식료품을 사려는 몬스터, 파는 몬스터, 대낮부터 병나발을 불며 친구들과 히히덕거리는 몬스터 등, 폭력적이지만 생기가 넘쳐흘렀다.
“도시를 조금 둘러보고 싶군. 맨발로 말이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유흥지로 안내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선 몬스터들이 어찌 생활하는지 보고 싶다. 지금 본인에게 수많은 감정이 전달되고 있구나. 기쁨, 흥분, 권태, 피곤함, 역겨움, 수없이 많은 감정이. 저들 역시 본인과 다를 바 없이 하나의 생명임이 느껴진다.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곳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지 생생하게 바라보고 싶다.”
원래 내가 여행에 대해 가진 생각이 그러하다.
명승지나 유적을 중심으로 관광하는 것도 좋다. 거기에도 큰 의미와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몸으로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다. 내가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추앙하는 하나의 유적지가 그곳 사람들에게는 지겹고 역겨운 공간일 수 있다. 내게 따분한 공간이 그곳 사람에겐 성스러운 장소일 수 있다. 하나의 장소를 둘러보아도 단지 겉모습을 향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 섞여 들어간 사람의 심리까지 즐기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뭣보다 몬스터들이 어떻게 도시를 이루고 있는지 궁금하고.’
이곳 몬스터들은 대부분 높은 지성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주점에서 어떤 대화를 나눌지, 데이트는 또 어떻게 하는지, 주거 공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전하의 의중이 짐작됩니다. 오늘 예정을 변경해야겠군요.”
부프에가 조금 놀랍다는 듯 말했다.
“2지구와 4지구를 다니겠습니다. 모두 니블헤임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입니다. 토착민들이 주로 살아서 니블헤임의 지역성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근처엔 전통음식점밖에 없어 전하의 입맛에 다소 거칠지 모릅니다.”
“어차피 본인은 영양 섭취가 필요없는 몸이다.”
그렇다. 마왕이 된 이후로 식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본래 <던전 어택> 설정에서 마왕은 생명체인 동시에 정령이다. 대지에 있는 마력으로 신체를 구성하고 유지한다.
“생애 처음으로 이곳의 음식을 맛볼 생각을 하니 오히려 기대되는군. 자, 안내해라.”
“…….”
부프에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이상한 감정이 전달되었다.
‘응? 이게 뭐지?’
호감과 그리움? 그리고 약간의 분노? 지금 상황에서 상대방이 내게 느낄 법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내가 살짝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인가.”
“송구합니다, 전하. 보통의 마왕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습니다.”
부프에가 고개를 숙였다. 뭐, 그동안 들은 얘기에 따르면 아마도 마왕들은 제멋대로에다 성격파탄자이자 권위주의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라피스가 나한테 놀랐다. 다른 마왕들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지만.
‘여타 마왕과 달라서 호감을 느꼈군.’
분노는 다른 마왕들에 대한 것이겠고. 감정의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그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언제 이상한 감정을 느꼈냐는 듯이 부프에한테서 나에 대한 호감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그가 방긋 웃으면서 나와 나란히 대로를 걸어나갔다.
‘그리움은 뭐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오묘해서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참. 전하, 이곳 시민들을 몬스터라고 부르는 것은 큰 실례입니다. 시민들은 문명권 바깥에서 본능적으로만 살아가는 동족을 가리켜서 몬스터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그들 자신은 마족 혹은 마인이라고 지칭하지요.”
“마족? 그렇다면 몬스터와 마족 사이에는 종족적인 구분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사실 몬스터와 마족을 구분하는 기준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으로써…….”
나는 부프에의 상세하고 재치 있는 안내를 들으면서 니블헤임 관광에 나섰다.
길이 점차 좁아졌다. 번화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니블헤임은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얼마 전까지 니블헤임은 그저 덜떨어진 어촌에 불과했지요. 다 썩어가던 일개 항구마을이 악덕의 도시로 변한 지 고작 삼백 년이 흘렀을 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씩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석재로 지어진 2층 주택이었다. 옥상에 올라와 한가로이 빨래를 걷는 몬스터, 아니 마족의 모습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저건 그냥 대한민국 아줌마랑 똑같았다.
“이 거칠고 법을 모르는 도시가 마계의 무시무시한 귀족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지난 삼백 년 동안 이곳에 모여든 마족들이 생각과 뜻을 한데 모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호이익을 위해, 우리들의 전문적인 '직업'이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합쳤습니다.”
부프에는 니블헤임이 일종의 도시공화국이라고 설명했다. 다섯 개의 거대 상회가 모여 있고, 그들이 도시의 우두머리를 자처했다. 쿤쿠스카 상회도 다섯 상회 중 하나였다.
“물론 저희도 사사건건 반목하고 대립합니다. 조직 간의 거대 항쟁도 적지 않게 일어나지요. 하지만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만큼은 굳건하게 연합합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도박과 사기, 폭력의 도시가 바로 이곳 니블헤임입니다.”
부프에가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내부의 대립을 극복하고 서로 협력해왔기 때문에 삼백 년의 번영을 일구어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