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화 (31/510)

00031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천박한 것, 벗으라고 말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라피스가 상의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치마가 종아리를 따라 미끄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

마광등이 그녀를 가느다랗게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소녀의 여린 윤곽이 연하게 빛났다.

이바르가 일어섰다. 그는 라피스의 주위를 맴돌면서 오른손에 쥔 지팡이로 그녀의 신체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지팡이 끝이 그녀의 가슴을, 목덜미를, 둔부를 꾸욱 눌렀다. 마치 상품이라도 품평하는 것 같았다.

“처녀인가?”

“예.”

“비천한 하프 서큐버스 주제에 잘도 정조를 보존했군.”

“자기 한몸을 호신할 정도의 실력은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처녀가 가진 상품가치를 아무데나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바르가 피식 웃었다.

“상인의 사고방식이다. 그럼 지금 나에게 처녀를 바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예.”

“상황 판단도 재빠르군.”

그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라피스는 이바르가 애당초 자신을 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큐버스의 피를 이른 자로서 그녀는 상대방의 정욕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시험임을 알아차리고 순수히 행동한 것이었다.

이바르가 지팡이를 짚으며 라피스 주위를 걸었다.

“나는 마계에도 다섯 명밖에 남지 않은 진조이다. 수천수만 년을 이어온 고귀한 핏줄의 태생이지. 마계에서 핏줄을 중히 여기는 까닭은 단지 시답잖은 권위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유구한 세월을 돌파해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 세대가 성공하는 것은 쉽다. 지금도 수많은 자가 성공을 이루고 있지. 두 세대 동안 성공하는 것은 어떨까. 이미 앞선 세대가 성공을 거두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을 게다. 하지만 세 세대는? 네 세대는? 오십 세대, 백 세대, 이백 세대는 어떠한가?”

이바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나 자신이 첫 세대인 것처럼, 가문에서 미리 성취한 바에 자만하지 아니하고 끝없이 자기 자신을 단련해야만 한다. 고통과 인내가 수만 년에 걸쳐서 단 한번도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그것이 가문이 갖는 위대함이다. 고작 한 세대의 성공 따위로 견줄 게 아니지.”

한때 뱀파이어는 모두 순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재 순혈 뱀파이어는 다섯 개체밖에 남지 않았다. 마족들은 존경을 담아 그들을 진조, 진정한 핏줄이라 불렀다.

“마왕이래봤자 후손도 남기지 못하는, 단지 찰나에 반짝이는 영광일 뿐. 우리 마족의 진실한 긍지는 그런 것에 기대어 이뤄지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자만이 진정토록 위대한 마인이 되는 것이다. 라줄리. 마왕을 이용해라. 결코 마왕의 빛에 이끌려 희생되는 불나방이 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마왕이란 허상에 불과한 것이야.”

이바르가 생각에 잠겨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가로 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라피스로부터 몸을 돌렸다.

“너를 4급 사무마에서 2급 사무마로 승진시킨다.”

“……!”

실로 파격적이었다. 라피스가 수습직원에서 5급 사무마로 올라가는 데 장장 백 년이 걸렸다. 마왕 단탈리안에게서 실적을 뽑아내더라도 최소 오십 년이 지나야 4급 사무마가 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흑사병 건으로 4급으로 승직하더니 이제는 심지어 2급 사무마가 되었다.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는 쿤쿠스카 상회에도 2급 사무마는 많아야 이백 명 정도밖에 없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것이었다.

‘드디어――.’

라피스가 조용히 전율에 감싸였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어.’

여태까지 핍박 받아온 기억들이 한순간에 뇌리를 스쳤다. 하프 서큐버스라는 이유로 서큐버스 집단에 끼지도 못했다. 오히려 서큐버스들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치했고 따돌렸다. 강자생존이 법도인 마계에서 동족한테조차 기대지 못한다는 것은 거의 죽음과 이음동의어였다.

쓰레기통을 뒤졌다. 창녀로 위장하여 뒷골목에서 부랑자를 살해했다. 구걸했다. 애원했다. 살기 위해 검술을 익혔고 마법을 배웠다. 겨우 한몸을 지킬 정도의 실력을 갖추자마자 쿤쿠스카 상회에 투신했다. 백 년 동안 온갖 잡다한 일을 떠맡았다. 그러고도 제대로 된 기회 하나 얻지 못했다.

이백 년의 시간.

어느 순간부터 표정을 잃고, 목소리의 고저를 잃고, 패배로 점철되어 세월을 보내온 끝에, 드디어 그녀에게도 기회가 내려왔다.

기회인 동시에 시험이었다. 이바르 상주는 지금 그녀한테 마왕 단탈리안을 이용하라고 주문했다. 철저하게 상회의 편으로 만들라는 얘기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쩌면 육체까지 써가면서.

‘할 수 있어.’

자신도 단탈리안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 상대방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그 호감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단탈리안이 정욕에 휩싸여 파르네세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성욕은 있는데 풀 대상이 없어서 곤란하겠지.

라피스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단탈리안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상회에서 성공을 거둘 방법을 고안했다.

문득 그것이 정말로 단탈리안이 원하는 바였는가 의문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담당자인 그녀가 쿤쿠스카 상회에서 요직을 차지하면 단탈리안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감사의 말이 아니다.”

“예. 단탈리안은 우리 상회의 영원한 아군이 될 것입니다.”

이바르가 웃었다.

“영리하군. 나는 영리한 부하가 싫지 않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바르가 지팡이로 강하게 바닥을 내리쳤다. 축객령이었다. 라피스가 그의 등에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녀가 방을 나간 이후 이바르는 한참이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인 니블헤임이 눈에 비추었다.

그가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그래. 마왕은 다 사기꾼이야.”

중얼거림은 아무런 메아리도 만들지 못하고 허공에 녹아들었다. 그가 앉은, 호화스러운 의자 옆에는 흡혈귀 전용의 관짝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  *  *

휴가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던전 방비를 라우라에게 일임하고, 라피스한테 받은 순간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화아악!

시야가 녹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귀가 멍멍했다. 눈을 뜨자 내가 새로운 장소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눈앞에 널찍한 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하얀 돌이 가지런히 뒤덮인 포장도로였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니,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텔레포트를 하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미노타우르스나 어인족처럼 몬스터들이 저마다 배낭을 맨 채 녹색빛에 휩싸여 순간이동되었다.

“거기! 얼른 나오지 않고 뭐하세요!”

암컷 고블린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가 했더니 나한테 하는 소리였다. 녀석은 왼팔에 완장을 차고 있었는데 아마 이곳 대규모 순간이동소의 안내원인 것 같았다.

“당신 때문에 뒷사람이 이동하지 못하잖아욧!”

“아.”

내가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러자마자 뒤쪽에서 녹색빛이 피어올랐다. 작달막한 드워프가 자기 키보다 네 배는 큼직한 짐을 들쳐매고 등장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코를 훌쩍이면서 내 곁을 지나쳤다. 마음속으로 나를 무진장 욕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니, 또 뭘 멍하게 서 있어요! 교통체중 만들 일 있어욧!?”

얼떨결에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녹색빛이 터졌다. 넓은 대로에는 대략 스무 개의 발판이 주르르 튀어나와 있었다. 텔레포트 장치였다. 몬스터들이 그곳에서 나와 검문소를 지나쳤다. 검문소에서 고블린들이 통과비를 받았다.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어휴. 이래서 촌사람들은.”

암컷 고블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당신, 니블헤임에 처음 온 거죠?”

“어? 아. 예에.”

“도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것부터 읽어요.”

고블린이 팜플릿 비슷한 뭔가를 건냈다. 앞면에 『니블헤임의 모든 것! 단 10쪽으로 니블헤임 달인이 되어보자!』라고 과장스러운 폰트로 글자가 쓰여 있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베이는 게 여기예요. 당신 같은 촌뜨기가 암것도 모르고 도시에 가면 장담하건대 삼 초만에 골수까지 탈탈 털릴걸요!”

“어, 어.”

고블린한테 촌뜨기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멍해졌다. 길쭉한 코를 휘둘러대며 '요'자 체를 쓰니 정말 안 어울렸다. 설마 너 그 말투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설령 고블린들 사이에서 매력 터지는 말투라 할지라도 지극히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나의 시각에서는 매우 좋지 않은 쪽으로 위장을 자극하는 말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구나.

“어느 여관이 안전하고 어느 골목이 안전한지 알려주는 책자예요. 이거 하나만 달달 외우고 다니면 적어도 팔다리 한쪽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잘릴 일은 없어요. 원래 2골드 받는 물건인데 저희 도시에 처음 오신 거 같으니까 깎아드릴게요. 자, 단돈 1골드. 얼른 내놔요.”

“에? 응. 어, 고마워.”

“천만에요. 교육실습비라고 여기세요.”

교육실습비? 고개를 갸웃거리려니까 고블린이 헐레벌떡 저편으로 달려갔다.

“아싸, 1골드 벌었다! 호구 등처먹는 재미 없으면 텔레포트 안내원도 못할 짓이야!”

고블린이 양팔을 벌리면서 환호했다. 녀석의 등이 순식간에 멀리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나는 멀뚱하게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멍한 정신이 아예 가출해버린 기분이었다. 방금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쯔쯧. 자네, 사기당했구만.”

늙은 은랑족이 옆을 지나치면서 말했다.

“사, 사기요?”

“가장 기본적인 수법이지. 얼뜨기 여행자한테서 도시 정보를 알려주겠답시고 시시한 안내책자를 바가지 씌워서 팔아재끼는 거 말일세.”

머리 위로 오 톤짜리 돌덩이가 떨어진 듯했다.

“하지만 쟤는 도시의 정식 안내원이잖아요! 어떻게 안내원이 여행자한테 사기를 칩니까!”

“딱 봐도 자네는 니블헤임 주민이 아니구만. 같은 도시 주민도 아닌데 사기 좀 치면 어떤가? 어차피 니블헤임의 법도 니블헤임 시민한테만 적용되거늘. 쯧!”

즉 마계에는 국가법이 없고 도시법만 있다는 얘기였다.

아까 전에 고블린이 한 말이 떠올랐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베이는 게 여기예요. 당신 같은 촌뜨기가 암것도 모르고 도시에 가면 장담하건대 삼 초만에 골수까지 탈탈 털릴걸요!’

정말 그랬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삼 초가 아니라 삼십 초라는 것이었다. 왜 고블린이 '교육실습비'라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녀석은 손수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 사기를 친 것이었다. 그것도 안내라면 엄청나게 친절한 안내였다. 빌어먹을! 비 오는 날에 자빠져라!

“자네처럼 어수룩한 젊은이를 보니 내 불안해서 못 견디겠군. 어떤가, 자네? 한동안 나와 같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은. 어디서 등골 빠지지 않게 옆에서 조언은 해주지.”

“아, 감사…….”

잠깐만.

이 녀석도 의심스러웠다. 안내원한테도 당한 마당에 생판 모를 은랑족에게 당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내가 손사레를 쳤다.

“아닙니다. 모르는 분께 폐를 끼칠 수 없죠.”

“어허, 이 시퍼런 놈 보소. 어디서 어른을 의심해?”

은랑족이 인상을 바락 썼다.

“꼭 손자 생각이 나서 그러는 거야. 그놈도 작년에 니블헤임에 왔다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빼앗겼어. 자네에게 하는 말이지만, 여기 도시놈들은 다 도적 새끼야, 도적 새끼. 우리 같은 외부인끼리 서로 도와야지 피해를 보지 않…….”

“오오. 이거 누구야? 빌헬름 아니야!”

뒤에서 또다른 은랑족이 말을 걸어왔다.

“이웃도시에 상행은 잘 다녀왔는가? 자네 없는 니블헤임은 영 재미가 없어서 혼났네. 자네 애인들도 똥줄 타게 기다리더군 그래. 역시 고향이 최고지?”

리저드맨이 은랑족의 팔뚝을 친근하게 쳤다.

“오늘밤은 언제나 보는 그 술집에서 만나자고. 지각하면 사형일세!”

리저드맨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길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고,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빌헬름이라 불린 은랑을 쳐다보았다.

“…….”

“…….”

“외부인이 뭐가 어쩌고 저쨌다고요?”

은랑족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맺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