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0화 (30/510)
  • 00030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마계라 하니 여전히 우락부락하고 잔인한 이미지가 떠올랐으나 그동안 라피스한테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서 안다. 마계에도 고급스러운 문명의 도시가 많다는 사실을.

    아무렴 라피스가 나를 살벌한 장소로 안내해줄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휴식하겠다 싶었다. 나는 본격적인 휴가에 앞서 던전의 앞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하고자 마음먹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어찐 일로, 누추한 장소에 행사하셨나이까?”

    백발의 노인이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고 오들거렸다. 노인의 뒤로도 백 명 가량 사람들이 오체투신하고 있었다. 화전민들이었다. 짐승과 몬스터로 가득한 산중턱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그들은 평범한 인간보다 강력하고 대담했다.

    그런 이들이 내 앞에 무릎 꿇은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도 사람들 주변으로 삼십 개체 가까운 골렘이 기립하고 있었다. 재산의 여유분까지 탈탈 털어서 장만한 몬스터 부대였다.

    내가 연기 스킬을 사용한 채 말했다.

    “누추? 지금 누추한 장소라고 말했느냐?”

    “그, 그렇사옵니다.”

    “고개를 들어라, 인간.”

    노인이 매우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갈빛 얼굴에 주름살이 계단식 논두렁처럼 차곡차곡 들어섰다. 성실하고 힘든 세상살이가 그대로 박힌 얼굴이었다. 다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나는 목적을 위해 공격적인 어투를 썼다. 첫만남이 인상을 결정한다. 지금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됐다.

    “이곳은 나의 영토이다! 감히 짐의 영토를 누추하다 불렀으니 그 죄가 무겁다.”

    노인의 얼굴이 경악과 당혹으로 물들었다. 당연했다. 갑자기 웬 사내가 몬스터를 이끌고 마을을 에워싸더니 '여기 원래 내 땅' 이러고 있는데 어이가 실종하겠지.

    일종의 교통정리였다.

    던전 주변에는 화전촌을 비롯해서 몇 개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모험대가 이런 마을에서 며칠 숙박하고 피로를 푼 다음에 내 던전으로 진군했다. 마을사람들은 모험자들에게 소소한 숙박비를 챙겨받으면서 용돈벌이를 했으니, 간접적으로 나한테 위협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해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마계로 떠나기 전에 한번 으름장을 놔줄 생각이었다.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거기에다 무단으로 짐의 영토에 상주했으니 죄의 무게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미처 몰랐습니다.”

    노인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

    “이곳은 몬스터의 군집지라 모든 나라가 꺼리는 곳. 제국의 흡혈귀 같은 세금징수관도 여기까지는 오지 않습니다. 높은 세금에 시달리다 가렴주구를 피해 이런 산맥까지 도망쳐온 저희를 용서해주십시오…….”

    “허, 자기네만 피해자라고 주장하니 역겹기 그지없다. 그대들은 이 근처에 짐의 터전이 있고, 모험자가 그곳으로 행군함을 알았을 터. 그런데도 그대들은 모험자에게 숙박을 제공했다. 그러하지 않았느냐?”

    촌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헉. 그, 그것은.”

    “진실만을 고하라!”

    “위대한 존재이시여……산맥에서 살아가기란 너무나도 어렵나이다. 때때로 외부인이 찾아와 내주는 숙박비가 아니라면 한 철을 버티기도 힘듭니다. 사,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대들이 살기 어려우면 짐에게 위협을 가해도 좋다는 것이냐? 감히? 네놈이 아직 상황이 덜 파악된 모양이로구나.”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마을사람을 에워싼 골램들이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서른 마리의 골렘이 한꺼번에 발을 내딛자 땅이 쿵, 하고 진동했다. 마을사람들이 질겁했다. 아낙네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흐윽,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십시오!”

    아이구야. 마음이 다 짠해지네. 하긴 인간 입장에서 마왕을 토벌하러 간다는 모험대한테 적대적일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인간계에서 마왕을 몬스터의 끝판왕쯤으로 여긴다는데 딱히 잘못된 인식도 아니었다.

    “제발, 위대한 존재이시여! 죄송합니다, 다시는 아니 그러겠습니다…….”

    “너희를 여기서 싸그리 멸살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나!”

    촌장의 목덜미에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빤히 보였다.

    내가 짐짓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주겠노라.”

    “오오!”

    촌장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명심하라. 나는 무조건적으로 관대한 이가 아니다. 너희가 씻지 못할 죄를 범했으니 그에 대한 반성이 먼저 필요하다.”

    “물론입니다. 당연합지요! 무엇이든 하명해주십시오.”

    내가 품에서 푸른색 수정구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가볍게 던지자 촌장이 얼떨결에 받았다.

    “이것은……?”

    “앞으로도 모험대가 종종 너희 마을을 들릴 터이다. 지금껏 해온 대로 모험대를 재워주고 먹여주어라. 단, 모험대가 오자마자 그 수정구슬을 손으로 네 번 두들겨라.”

    내가 히죽 웃었다.

    “그렇다면 밤이 되고 나의 충직한 부하들이 마을에 잠입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모험대를 암살하라. 그리 되면 그대들이 수익을 잃을 일도 없을 것이요, 날 배신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죽음으로 사죄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앞으로 모험대는 더 레벨이 높아져서 공격해올 거다. 그러기에 앞서 던전 주변의 마을들과 이렇게 협력 체제를 마련해놓는다면 모험대에 대응할 방법이 훨씬 더 많아진다. 촌장이 감읍한 표정으로 몇 번씩이나 나의 관대함을 칭송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추가적인 이익이 없는 이상에야 사람은 간단하게 계약을 파기한다. 만일 모험대가 마왕을 토벌할 만큼 강력하다고 판단하면, 마을사람은 모험대의 편에 들러붙을 게 틀림없다.

    “이것은 짐과의 계약이다. 만일 계약을 어긴다면 죽을 것이고.”

    떡고물이 필요하다. 날 배신하지 않아야만 얻을 수 있는, 모종의 이익이.

    “계약을 준수하면 나 역시 그대들에게 안전을 제공할 것이다.”

    “아, 안전이라 하옵시면?”

    “이 마을은 항시 몬스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들었노라.”

    “예에. 당장 이번 주만 해도 장정이 고블린에 물려 명을 달리했습죠.”

    “짐과 계약을 지키는 이상 몬스터가 그대의 마을을 노리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저, 정말입니까!?”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꼼짝없이 골렘한테 맞아 죽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몬스터로부터 보호해주겠다니 꿈만 같으리라.

    내가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짐은 모든 몬스터의 제왕이다. 짐의 언사를 의심하는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다, 다만 너무나 황송한 제안인지라.”

    “지금부터 알아두어라. 짐은 공정하다.”

    숨을 들이키고 큰소리로 외쳤다.

    “짐의 이름은 단탈리안! 서열 제71위의 마왕이자 모든 질병과 몬스터의 주인일진저! 신민에게 관대하되 적에게 잔혹할지어니, 그대들이 짐의 충실한 신민이 된다면 그만한 이익과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니라!”

    연기가 먹혀든 것일까.

    “이제 몬스터에 습격당할 일이 없어!”

    “살았다!”

    “단탈리안 폐하 만세!”

    화전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걸쳐서 던전 근처의 마을을 모조리 돌아다녔다. 열두 개의 작은 마을이 내 발밑으로 복속했다. 골렘 서른 마리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감당키 어려운 적이었고, 무엇보다도 몬스터의 위협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것이 크나큰 매혹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을들이 앞으로 침입자에 대한 조기경보로써 기능할 거라고 기대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의 마을뿐만 아니라 몬스터 부락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몬스터들한테 ‘이제부터 얘네들 습격하지 마!’라고 언질을 해두어야 했지만, 본래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수고가 들어가는 법이었다.

    몇몇 몬스터 부락에서 반항했다. 내가 고용한 몬스터와 다르게 야생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험악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반항하는 몬스터는 나의 골렘 부대로 깔끔하게 쓸어버렸다. 서열 제71위 마왕의 던전 근처라서 그런지 레벨이 높은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기껏해야 질 낮은 고블린 부락이 즐비할 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러니까 <던전 어택>에서 단탈리안의 마왕성이 프롤로그용으로 등장했지.

    “에구구, 할 일 다 끝냈다!”

    모든 몬스터 부락에 다짐을 받아놓고 내가 쭈욱 기지개를 폈다. 큰일을 끝마쳤다는 성취감이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이제 쉬어도 돼!

    단지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이상하게도 고블린들이 영 힘을 못 썼단 말이지.’

    아무리 레벨이 낮은 고블린 부족이라 할지라도 최대한 반항하거나 그런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싸움이 시작하자 왠걸 나한테 전혀 반항하지 못했다. 골렘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전멸당할 뿐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만큼 골렘 부대의 위력이 대단해졌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현재 내 휘하의 골렘은 평균 레벨 5를 자랑하고 있었다.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능력치가 렌덤으로 1씩 오르니까, 기본 능력치가 7/5/5(체력/공격/방어)인 최하급골렘이 대충 7/7/7 가량의 능력을 보유했다.

    참고로 잘센 마을의 모험대장 리프가 능력치가 6/5/2였다. F급 모험자 중에 가장 잘 나가는 축에 속하는 리프가 그 정도에 불과했으니, 골렘 부대는 이제 E급 모험대도 너끈히 상대할 만큼 강해진 것이었다. 여기에 요정 부대도 평균 레벨 3을 찍었으니 웬만한 E급 모험대는 피해없이 전멸시킬 수 있었다.

    ‘마계에 내려가 있는 동안 설령 E급 모험대가 출현해도 라우라가 잘 막아내겠지.’

    근심걱정이 싹 사라졌다. 설마 F급 모험대만 오는 던전에 곧바로 D급이나 C급 모험대가 출현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라우라에게 던전 관리를 몽땅 일임한 채 마계로 휴양을 떠났다. 나는 이 사건이 어떤 파장을 불러들일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라피스가 침을 삼켰다.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그녀로서도 긴장되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반백의 노신사가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온몸을 검은 망토로 감추고 있었으나 노신사의 창백한 얼굴은 그가 깡마른 체격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거의 병적인 무언가가 남자에게서 풍겨졌다. 다만 침착한 어투가 그를 아슬아슬하게 신사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이 노인이야말로 쿤쿠스카 상회의 정점.

    이바르 로드브로크.

    흡혈귀 중에서도 그 드물다는 진조(眞祖). 이천 년을 넘게 살아온 괴물 중 괴물이었다.

    “라피스 라줄리. 무슨 일로 네가 나와 대면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겠지.”

    “예, 상주.”

    라피스가 절도 있게 상반식을 숙였다.

    “마왕 단탈리안에 대한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머리가 아주 안 돌아가는 아이는 아니군.”

    라피스가 정확한 각도를 맞춰 인사한 것이 흡족스러웠는지, 이바르의 입끝이 살짝 올라갔다. 거기에는 푸근하거나 자비로운 인상 따위가 없었다. 되레 을씨년스러웠다. 입가만 움직였을 뿐이지 얼굴의 다른 부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 번에 토르켈이 직접 파견되었다. 그러나 문전박대를 당했지. 라줄리, 너와만 거래하겠다는 이유로 말이다. 과연 반푼어치라도 밤의 일족은 밤의 일족이라는 얘기이겠지.”

    “…….”

    밤기술로 마왕을 꼬셔낸 게 아니냐, 하고 이바르가 비꼬고 있었다. 하프 서큐버스인 라피스를 대놓고 모욕한 것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피스의 얼굴에선 그러나 아무런 표정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같은 모욕은 일상다반사나 마찬가지였다.

    마계의 창녀 서큐버스.

    그중에서도 더러운 인간의 피가 섞인 잡종.

    “호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군.”

    “저는 쿤쿠스카의 사무마입니다.”

    그러자 이바르가 웃었다.

    “당연하지. 쿤쿠스카의 상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득을 추구하되, 상대방의 마음까지 얻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너는 합격이다. 일개 4급 사무마가 본연의 실력을 발휘하여 마왕의 마음을 얻었으니 어찌 칭찬하지 않겠느냐.”

    툭, 하고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라피스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이바르의 발 앞에 묵직한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에서 사용하는 돈주머니였다. 크기를 보아 백 골드 이상이 들어간 게 분명했다.

    “포상이다. 받아라.”

    이바르는 현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돈주머니는 그의 사타구니 아래에 놓여졌다. 그것을 포상이라면서 가져가라는 얘기는, 즉 라피스 보고 사타구니까지 '기어와서' 돈주머니를 받으라는 소리였다.

    길거리의 창녀한테도 이만한 무례는 저지르는 법이 없었다.

    더없는 치욕.

    “예.”

    그러나 라피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바닥에 엎드려서 네 발 짐승처럼 진조한테 기어갔다. 쿤쿠스카의 검은색 정복이 착 달라붙어 라피스의 엉덩이를 부각시켰다. 그녀가 엉금엉금 기어오는 광경을 이바르는 턱을 괸 채 여유롭게 구경했다.

    이윽고 이바르의 사타구니 사이로 그녀의 머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공손히 돈주머니를 잡은 다음에 그렇지 않아도 숙인 고개를 다시 한 번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고 라피스가 뒤쪽으로 물러서려는 순간이었다. 이바르가 말했다.

    “벗어라.”

    그녀의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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