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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9화 (29/510)
  • 00029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여가시간을 요구한다.”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때는 한낮. 장소는 마이 프리티 홈, 이른바 마왕성. 늦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동굴이라는 공간이 적당하게 시원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던전이라는 최고의 피서지에서 여름을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우중충하기만 했다.

    “……예?”

    블랙 허브를 집단재배하는 것과 관련하여 상담차에 들린 라피스가, 이 마왕 전하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지, 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쉬고 싶다. 놀고 싶다. 게으름 피고 싶다.”

    “하아…….”

    그녀의 눈초리가 '뭐 이런 쓰레기가 다 있을까' 정도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쪽의 진지함이 조금이라도 덜어지지 않았다. 던전 어택의 세계에 들어온 지 어언 서너 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성실하게 지냈다. 지나치게 성실하게.

    모험대를 격파하고, 광석을 캐고, 상행을 위장하고, 인재를 모집하고. 원래 세계에서 백수나 다름없이 지내던 나에게 충분히 과부하로 느껴질 만한 작업량이었다. 사실 말이지 나는 애당초 성실이라는 명사와는 거리가 제법 먼 부류에 속했다.

    ‘내일 죽을까 말까 걱정하던 때에는 마음이 급해서라도 견딜 수 있었다지만……어휴.’

    최근 들어서 모험대에 의한 위협 또한 약해졌다. 어차피 겨우 F급밖에 오지 않으니까. 전술을 단련해보라는 의미에서 라우라한테 몬스터 부대의 군권을 맡겼더니 그야말로 능수능란하게 모험자들을 요리했다. 요새 내가 할 일이 부쩍 줄어든 것이었다.

    여기에 묘한 조울증까지 겹쳤다. 잭이 죽은 이후로 계속 이런 상태였다. 매사에 감정기복이 심했다. 하기사 이렇게 사람들을 무더기로 죽이고 있는데――보름에 한 번 꼴로 꼭 모험대가 던전에 방문했다――정신질환이 찾아오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지금 본인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이런 취지를 설명하자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증후군이군요.”

    “응?”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임의로 별명이 붙은 증상입니다. 아시다시피 마왕은 아인종과 몬스터 등의 감정에 가감없이 공감합니다. 그 때문에 마왕들은 주기적으로 조울증에 걸리곤 합니다.”

    세상에.

    이제보니 마왕이란 3D 업종이었다. 항시 목숨 노려지랴, 돈 벌랴, 던전 관리하랴, 여기에 아예 직업병으로 조울증까지 있다고?

    “혹시 최근에 전혀 생뚱맞은 감정이 생기거나 하지 않습니까?”

    “……맞아. 막 뜬금없이 기운이 솟고 슬프고 그래.”

    “마왕은 타자의 감정을 생생히 느끼는지라 자아의 경계가 무척 불안합니다. 자신 안에 여러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 있는 것이니 당연하지요. 그래서 다른 마왕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자아를 유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은 그런 방책을 갖고 있지 않았군요.”

    거기다가 약한 다중인격증상까지.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이 우울감 또한 직업병의 일환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우울해졌다. 난 안 될 거야 아마…….

    “흐하하. 난 쓰레기 자식이야. 원래 세계에서도 누구한테 도움이라곤 한 웅큼조차 안 되던 새끼가 뭐 잘 살겠다고 잭 같은 인간을 죽이나. 쓰레기보다 더한 쓰레기, 더 킹 오브 쓰레기. 히히, 내가 쓰레기왕이다……어머니, 죄송해요…….”

    마왕방 구석에서 땅을 파고 있자 라피스가 담당의사처럼 말했다.

    “중증이군요.”

    “그러니까 여가시간을 요구한다!”

    내가 꽥꽥 소리질렀다.

    “우울해도 너무 우울해! 삶이 삶 같지가 않아. 모험자 새끼들은 먹을 게 파리 다리털밖에 없는 곳에는 왜 만날 처들어오고 난리야! 너희들이 뒈질 때마다 내 마음속의 무언가가 팍팍 깎이고 있단 말이다!”

    그때 라우라가 마왕방에 들어왔다. 리프의 도끼날에 문이 날아가버린 이후, 마왕방은 여태까지 상쾌하고 편안한 출입구를 자랑했다. 소녀는 오른손에 둥그런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라줄리 공, 오랜만이다.”

    그녀가 간단하게 라피스에게 인사한 다음 손에 든 물건을 나한테 훅 던졌다. 둥그런 물체가 내 발밑까지 굴러왔다.

    “침입자를 격퇴했다.”

    인간의 머리였다.

    “녀석이 대장이다. 제법 끈질기게 저항하더군. 훗.”

    물론 나에게는 못 당했지만 말이다, 하고 미소 짓는 라우라. 향년 열여섯 살에 세 달의 소녀는 어떻게 자기가 물경 스물다섯 명의 모험대를 전술적으로 전멸시켰는지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그러더니 냉큼 뒤로 빠지려는 게 아닌가. 미리 숨겨둔 복병으로 뒤를 후갈기니 녀석들의 전열이 금방 붕괴했네. 작전대로였다. 솔직히 소녀가 병법에 이토록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단탈리안, 소녀는 그대의 혜안에 감복할 수밖에 없다.”

    방긋 웃으면서 말하는 소녀의 금발에는 인간의 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액체가 응고되어 엉켜 있었다. 내가 모험자의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고통과 절규로 범벅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절망했다.

    “싫어……이건 삶이 아니야, 이런 게 삶일 수는 없어…….”

    내가 마왕방의 침대에 뛰어들어 이리저리 굴렀다. 뒤에서 라우라와 라피스가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그런데로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못난 상사를 둔 부하직원 간의 공감대라고 할까, 그런 게 성립한 모양이었다.

    “음? 소녀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로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단탈리안 전하가 가벼운 우울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란 것이 무엇인가?”

    “……인간계에는 아직 정신질환의 개념이 없었지요. 마계에서는 신체가 병에 걸리듯 정신도 병에 걸린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우울증이란 정신의 어떤 측면이 왜곡되거나 비틀려서 당사자에게 우울감을 유발시키는 증상을 뜻합니다.”

    라우라가 자그맣게 탄식했다.

    “허, 괴이하다. 어찌 신체와 정신을 둘로 나누겠는가. 정신의 문제는 신체의 문제이다. 정신이 허약하다는 것은 곧 육체가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녀가 다가와서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일어나라. 대체로 그대는 운동을 너무 안 한다. 하루 운동량이 기껏해야 쇠뇌만 몇 발 쏘고 끝나니 언제 근육이 붙고 지구력이 좋아지겠는가.”

    “싫어요! 일어나기 싫어……!”

    내가 이불을 부여잡으며 침대에서 뻐팅겼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자아, 단탈리안. 소녀와 운동하자.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운동법을 알려주겠다. 그대와 같이 비실한 자도 두 달만 열심히 운동하면 뭇 여성을 설레게 하는 근육남이 될 것이다.”

    “뭐든지 운동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뇌가 근육질입니다! 저는 지금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태라고요. 휴식이 필요해요!”

    그러자 라우라가 쿨하게 말했다.

    “죽은 다음에는 영원히 휴식할 수 있다.”

    “난 살아서 휴식하고 싶다고!”

    침대를 두고 사투가 벌어졌다. 무력 능력치가 비슷하기에 우리의 공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한참이 지나서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흐엑, 그러는 라우라도, 허어억, 별 거 없잖아요, 허억.”

    “남자와 여자가, 후윽, 후읏, 어떻게 같은가, 후으으.”

    복날에 닭싸움을 마치고 난 닭들처럼 헉헉거렸다. 라피스만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우리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괜찮은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싶어 좋아했는데 알고보니 근무처가 정신병원이어서 주변에 미친 인간만 가득하게 되어버린 사람 같았다.

    “……블랙 허브의 재배지에 대해서는 저희 쿤쿠스카 상회가 전적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단탈리안 님은 자문위원으로서 블랙 허브 전체 수확량의 5%를 차지합니다. 계약기간은 2년입니다. 이것으로 괜찮으련지요.”

    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손바닥을 저었다.

    라피스 말에 따르자면 쿤쿠스카 상회에선 흑사병이 여느 돌림병처럼 아주 오래가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약초길드를 통하여 무제한으로 블랙 허브를 사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흑사병이 앞으로 십 년 가량 줄기차게 대륙인을 괴롭히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장 블랙 허브를 내다파는 것보다 차라리 집단재배로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 어떻냐고 쿤쿠스카 상회에 제안했다. 그쪽에서 곧바로 긍정적인 답변을 해왔다. 이로써 정기적으로 돈이 들어오는 창구 하나가 마련된 셈이었다.

    ‘대충 순조롭게 모든 일이 풀리고 있는데.’

    문득 코앞에서 숨을 가다듬는 라우라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살결 때문에 땀방울마저 색깔이 새하얀 것 같았다. 제대로 성욕을 풀어본 지 꽤 오래된 탓일까. 가까이서 살만 봤을 뿐인데도 아랫도리가 근질거렸다.

    내가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살만 하니까 난리도 아니로군.’

    라피스도 라우라도 나이가 어릴 뿐이지 미인이었다. 그런 소녀들이 거의 같이 살다시피 들락날락거리니 내 한심한 인내심에 벌써 한계가 느껴졌다. 만일 지난 번 상행에서 도시에 들렸을 때 창관을 써먹지 않았다면 폭발해도 진즉에 폭발했겠지.

    시선을 느꼈는지 라우라가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알아차리진 않았겠지.’

    쪽이 팔려도 바가지까지 박박 팔릴 터. 혹시나 몰라 라우라의 심리상태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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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라우라 데 파르네세

    종족: 인간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7    명성: 520

    직업: 학자(D), 책사(E), 성노예(E)

    통솔: 30  무력: 10  지력: 33

    정치: 9   매력: 49  기술: 1

    호감도: 21

    현재심리: ‘음, 내일은 반드시 억지로라도 운동을 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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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이 한 자릿수인데도 불구하고 휘황찬란한 능력치였다. 장래에 대륙 전역에 이름을 떨칠 책사답게 통솔과 지력이 삼십 대였고, 약간 뜬금없지만 매력 수치도 오십에 가까웠다. 능력치만 보면 전형적인 팜므파탈이었다. 원래 중립(0)이었던 성향이 최근 인간을 죽여서 중립(-10)으로 떨어졌지만 이건 내가 알 바 아니었고.

    ‘오케이. 아무 문제없어.’

    라우라의 심리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혹여나 속마음이 들킬까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때 라피스와 똑바로 눈이 마주쳤다.

    “…….”

    헉. 의심하고 있다!

    약간의 경멸과 무시가 섞인 감정이 여과없이 전달되었다. 반푼이 서큐버스래도 과연 정욕을 관장하는 마족이라서 그런가. 라피스는 곤란하게도 이쪽 방면에 눈치가 재빨랐다.

    겉모습이 열여섯 정도밖에 안 되는 소녀한테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아본 적 있는가? 쉽게 말해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방구석폐인이 되고 싶었지만, 이대로 인정했다가는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질 것 같아 뻔뻔하게 말했다.

    “왜 그래? 계약에 관련해서 더 할 말 있어?”

    “……확실히 단탈리안 님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군요.”

    라피스가 묘하게 휴식에다 방점을 찍으면서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괜히 구차스럽게 발뺌하지 말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으윽.

    “다음달에 마계에서 마왕들 간의 대회합이 열립니다.”

    “응? 그런 것도 있어?”

    “전통적으로 어느 마왕에도 영합하지 않는 쿤쿠스카 상회에서 중립을 자처하며 회합을 열지요. 십 년마다 한번 열립니다만, 이번에는 단탈리안 전하께도 정식적인 초청장이 날아갈 것입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이쪽을 노려봤다.

    “그때 파르네세 영애의 노예각인을 처리할 겸해서 마계에 들리는 것 어떻습니까. 마침 인간의 노예각인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를 물색했습니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휴식시간이 될 것이라고 제가 장담합니다.”

    “……어어. 그냥 지금 마계에 가면 안 될까. 생각해보면 나 마계에 가본 적도 없고, 다음달까지 정신머리가 견뎌줄 것 같지도 않고.”

    그러시든지요,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그렇게 스케줄에 여름철의 마계 휴가가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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