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8화 (28/510)
  • 00028 인간 사냥  =========================================================================

    눈물을 닦아준 자리에 계속해서 물기가 차올랐다. 나는 개의치 않고 잭의 눈가를 계속해서 닦았다. 대화란 모름지기 서로 마주보고 해야 하니까.

    “끄으윽……거짓말……크프흐으읏……!”

    “우선 내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가져야겠어. 이건 결정 사항이야. 그리고 자네에게는 삼천 골드를 지불할 용의가 있어. 내 생각에 이 정도면 합리적인 거래인 것 같아. 어차피 데 파르네세의 몸값이 대략 이천 골드였어. 천 골드는 자네의 오른팔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줘. 왜, 어디 사는 거지한테 팔 한짝에 천 골드를 주겠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거짓말이야……크릅, 거짓마아알!”

    쯧.

    내가 혀를 찼다. 안 되겠다, 이거. 상대방은 팔이 잘린 고통에 머리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듯했다.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아프겠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 또한 오른발이 완전히 잘게 부스러진 상태에서 잘센 마을의 모험대를 상대했다.

    혹시 고통이 아니라 출혈 때문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인지 몰랐다. 나는 라피스에게 간단히 치료마법을 외워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소위 치료마법을 구사했느냐면, 이게 또 가관이었다. 라피스가 손바닥에 작은 불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잭의 절단면을 지져버린 것이었다.

    “크하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엔 나도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귀청이 찢어지라 잭이 비명을 토해냈다. 생살이 불태워지는 감각이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울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아직 불에 태워진 적이 없으니까.

    “라피스……치료해주랬지 언제 지지랬어?”

    “실례합니다만, 저는 치료마법에 능숙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치료해본 경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치료법을 실행했습니다.”

    겉모습으로는 십 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라피스가 쿨하게 말했다. 이런 터프한 아가씨를 다 봤나.

    “괜찮아? 미안해. 얘가 무척 똑똑한데 이상한 구석에서 좀 그래.”

    “그르륵……크푸륵…….”

    잭이 개거품을 물었다. 거의 눈이 뒤집혔다. 내심 걱정이 들었다. 진심으로 걱정했다. 이대로 잭이 기절하면 여러모로 일이 난잡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설령 익숙치 않더라도 잭한테 치료마법을 써달라고 라피스한테 부탁했다. 적어도 고통을 줄이는 효과 정도는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

    라피스가 치료마법을 외자 눈에 띄게 잭의 안색이 나아졌다. 요컨대 눈동자가 똑바로 위치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잭은 폐병환자가 기침하듯이 때때로 신음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띠링! 하는 효과음이 들렸다.

    「하급 상인 잭 올란드의 호감도가 50 하락합니다.」

    「하급 상인 잭 올란드가 당신을 적대합니다!」

    나는 이걸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상대를 싫어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돌아왔다는 뜻 아니겠는가. 잭은 허공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왼팔로 오른팔의 어깨를 끊임없이 쓰다듬었다. 잠시 후에 잭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어째서……?”

    아직 사태가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새삼 잭과 내가 천성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잭은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더 궁금해하고 있다.

    반면에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 모험자들한테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내가 가장 처음 소리친 문장들은 무엇이었던가.

    쏘지 마세요.

    제가 아니에요.

    살려주세요――.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나선 것은 그 이후였다. 당장은 상대방에게 애원하고,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게 급했다. 그것이 상식적이고 보통이 아닐까.

    아니, 굳이 잭을 비방하고 싶지는 않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우리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그것은 언어가 다른 두 사람에 비유할 만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차이가 잭과 나 사이에는 놓인 것인지 몰랐다. 나는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풀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땅바닥에 누운 잭을 향해서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너는 팔이 잘렸어. 그것도 내가 잘랐지. 만약 여기에 거짓말이란 게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라고 말해야겠지.”

    “……왜? 어째서?”

    잭이 이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내가 데 파르네세를 얻고 싶어서야.”

    “아니야……모르겠어……모르겠어.”

    “생각을 바꿔봐. 잭, 간단한 논리야. 왜 상대방이 정식으로 상인길드에서 거래하는 것을 거부했을까.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왜냐하면, 하고 곧바로 논리가 성립하지.”

    “정식으로……거래할 수 없는 신분……?”

    내가 짧게 박수를 쳤다. 꼭 외지인이랑 처음으로 바디 랭귀지가 통한 원주민과 같은 심정이었다.

    “바로 그거야. 사실 도시에 제대로 출입하기도 힘들지.”

    “상인이 아니었구나……로리타!”

    잭이 벌떡 일어섰다. 증오에 번들거리는 두 눈동자가 내게 꽂혔다. 그가 괴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라피스가 재빠르게 검집째로 그의 가슴팍을 찔렀다. 제법 뾰족한 검집 끄트머리에 가격 당하자 잭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라피스에게 제압당한 잭을 내려다보며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

    “예.”

    또 한 번 비명이 터졌다. 그 다음에 이어진 수순은 똑같았다. 신음, 치료를 명목으로 한 불고문, 비명 그리고 안정화 단계. 팔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것에 비해서 약지를 잃은 고통은 다소 덜했는지, 아니면 벌써 익숙해졌는지, 잭이 예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이것도 못해먹을 짓거리로군.

    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상인이 아니야.”

    “전염병을 치료하는 약제가 있다는 것도, 큭! 전부 거짓말이었어!”

    잭은 눈동자에 증오가 더 진하게 서렸다. 고통이 여전한지 곧잘 이빨을 물었는데 그 탓에 발음이 살짝 뭉개지고 있었다. 그래도 알아듣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아닌데. 그건 진짜야.”

    “장난치지 마! 저주 받을 악마 새끼! 뒈져라, 죽어버려!”

    “잭, 멍청한 친구야. 거짓말을 하려면 적당히 진실을 섞어줘야 하는 법이야.”

    “그랬어! 그랬던 거야! 경매소에서 몬스터를 소환한 것도 네 새끼였어!”

    잭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맞아. 인정하지.”

    “도시에 불을 지핀 것도!”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그가 욕지거리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세상의 모든 욕이 전시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마음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왜 저렇게 자신의 명줄을 줄이려고 발악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어서 약간 신기한 기분으로 잭을 지켜봤다.

    “좋아.”

    내가 말했다.

    “자네가 요 1분 동안 내민 의견을 종합하자면 나는 악마에다 사기꾼이고 천하의 쌍놈이자 미친개자식이며 지옥에 떨어질 후레자식이군. 전적으로 인정하겠어. 그러니까 이제 생산적인 논의에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

    “일단 내가 데 파르네세를 가져간다는 건 확정된 사항이야. 명심하길 바랄게. 이것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해 우리는 협상할 필요가 있어. 잭, 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야. 너는 내 얼굴을 알 뿐더러 내 범죄행각까지 알고 있어. 즉 너를 이대로 살려두면 이쪽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문제는 내가 웬만하면 널 살려주고 싶다는 것이지. 한 마디로 네 목숨을 두고 협상하자는 얘기야.”

    “악마 새끼……!”

    내가 쓰게 웃었다.

    “지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군. 원하는 게 뭔가? 자네를 동정해주길 바라나? 내 끔찍한 행위를 반성하길 원해? 진심 어린 사과가 고프나?”

    나 역시 마음이 쓰라렸다. 모험자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에게 해를 끼치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몇 년 지나지 않아 인간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마왕을 증오하게 되겠으나 아무튼 지금 그들은 마왕에 대해서도 적당한 경계심과 적대심을 가질 뿐이었다. 아마 이웃나라에 대해 품는 적대심과 비슷한 정도의 감정이리라.

    “미안하지만 나한테 그런 걸 기대하지 마.”

    만약 내 팔이 소중하다면 바로 그만큼 다른 사람의 팔도 소중하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윤리이다. 죄책감이란 윤리를 지키고자 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명백히 윤리를 어겼고, 앞으로도 거리낌 없이 어기고자 한다. 그런 내가 죄책감을 입밖으로 낸다? 표현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마음의 군살에 불과하다.

    “잭, 난 내가 한 행동에 추호도 후회하지 않고 있어.”

    “…….”

    “미래에도 되도록 후회하고 싶지 않아. 지금 자네를 놓아줬는데 만일 자네가 혹여라도 내 삶에 위협을 가한다면, 나는 지금의 결정을 무척 후회하겠지. 음. 그러니까 나를 설득해주었으면 좋겠어. 설혹 내가 미래에 후회하게 될지라도 지금 자네를 풀어줄 수밖에 없는 뭔가를 제시해봐.”

    잭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곧바로 그럴듯한 생각을 떠올릴 수 없겠지.

    오늘 그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생애 가장 큰 거래를 성사시킬 뻔했고, 경매소에서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고, 친우와 같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했고, 또 동경하는 친우에게 배신당해 한쪽 팔을 잃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적이 용량이 과다한 하루였다. 그의 입장을 이해해주기로 했다.

    우리가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잭의 손발에는 쇠사슬을 채웠다. 마차가 도시의 영향권에서 아주 벗어날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저녁이 되고 우리는 야영했다. 라피스가 맛깔나게 수프를 끓였다. 나는 그녀의 새로운 재주를 발견한 듯해서 신나게 수프를 먹었다. 다만 잭은 식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지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마차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나, 라피스, 라우라가 모닥불 주위에 누웠다. 나는 팔베개를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무리가 반짝거렸다. 원래 세계와는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하늘의 색깔이 다채로웠다. 밤하늘에 녹색빛, 붉은빛, 분홍빛, 파란빛, 보랏빛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여기 세계에 와서야 깨달았다. 중학교 시절 천문부로 활동한지라 별자리에는 빠삭했다. 그러나 하늘의 어디를 보아도 내가 아는 별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라피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기분 좋게 흘러들었다. 그때 하루종일 조용히 입을 다문 라우라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이해할 수 없다. 왜 당장 죽이지 않는 게냐.”

    “음.”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곧장 떠오른 문장부터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글쎄, 우연한 변덕입니다.”

    “……쓸데없이 적군을 만드는 것은 모든 병법에 있어 하책이다. 노예상이 이대로 살아돌아간다면 이번 사건의 전모를 밝힐 것이 틀림없다. 그대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자가 없다 하더라도, 더 이상 맨얼굴로 이 부근의 도시를 돌아다닐 수는 없게 된다.”

    “하하. 제가 그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는 어떻게 하면 그럴듯하게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까 고민하면서 밤하늘을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째서지. 될 수 있는 대로 위협을 줄이는 것. 그것이 생존을 위한 최선책 아닌가.”

    “맞습니다. 사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오, 저건 오리온자리 허리띠와 쏙 빼닮았다. 하긴 오리온의 삼태성이랑 비슷하게 생긴 별자리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만.

    슬슬 입에서 하품이 나왔다.

    “라우라. 당신은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이유로 삶을 곧 죽음이라 결정했습니다만……아직 더 살아가기를 원하는 저로서는 오히려 삶의 나머지 부분……우리에게 우연하게 다가오는 일들이 오히려 내 삶의 의미를 결정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의식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시간 감각이 흐릿해져서 이윽고 멈출 무렵에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그대가 그날 밤에 말한 삶이라는 것의 의미였군.”

    그러자 내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하지만 웅얼거림일 뿐이었다. 곧 있으면 잠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다음날 새벽, 상쾌하게 일어났다. 밤새 모래 따위가 들러붙어서 얼굴이 뻑뻑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막 비볐다. 머릿속은 시원한데 면상이 찝찝하니 뭔가 아쉬웠다. 크흠, 완벽한 아침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우라는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 있었다. 반면에 라피스는 벌써 아침준비를 끝마쳤다. 사실 라피스가 누구보다 늦잠을 자는 모습 자체가 상상되지 않았다. 쟤는 분명 한국의 고등학생으로 태어났음 열두 시에 자서 네 시에 일어나서 공부했을 거다. 징그러워라.

    라피스가 국자로 수프를 덜면서 내게 말했다.

    “단탈리안 님. 노예상이 도주했습니다.”

    “어, 그래?”

    다소 의외였다. 도망칠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정말로 도망칠 줄은 몰랐다. 잭에게 별로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라피스에겐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새벽에 일어나보니 마차에 없었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발로는 어차피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추격할까요?”

    “내비 둬. 거 살아보겠다고 뻘뻘거리는데 굳이 족칠 이유가 없지.”

    라피스한테 수프 한 그릇을 넘겨받으며 내가 진심으로 말했다.

    “이렇게 큰 노예 경매를 놓쳤는데 아버지나 상회에 어디 낯이나 들 수 있겠냐. 잭이 상인의 세계에서 권력을 쥘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

    “그의 아버지는 대상입니다. 이용할 방법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무능한 애를 이용하다가 내가 먼저 암 걸리겠다. 난 딱 라피스 너처럼 유능한 애가 좋아.”

    수프를 한입 머금었다. 묘한 향신료와 함께 닭고기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크으, 맛있다!”

    꼭 맵지 않은 똠얌꿍을 먹는 것 같았다. 중세에는 향신료를 거의 쓰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 어젯밤 내가 의문을 표시했더니, 인간과 달리 마족들은 향신료를 무척 즐겨 쓴다고 라피스가 알려주었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음식을 꽤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라피스, 넌 진짜 못하는 게 뭐니? 너 너무 잘났다!”

    “감사합니다.”

    라피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 상행에서 제공한 숙박과 이동, 식사 전부 다 합쳐서 10골드 되겠습니다.”

    “…….”

    라피스는 어디까지나 라피스다웠다…….

    아침을 먹고나자, 입맛이 즐거웠던 것과 별개로 피부가 항의를 해왔다. 안 그래도 퍽퍽했던 얼굴이 더 짜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영 거슬렸다.

    “혹시 이 근처에 시냇물 그런 거 없어?”

    “저 방향으로 팔십 걸음을 걸어가면 연못이 나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인간계의 지리를 전혀 모르므로 이번 작전에선 순전히 라피스의 계획에 따랐다. 그녀는 도망 경로에서 숙박까지 고려한 게 틀림없었다. 이런 완벽함이라니! 거금 10골드가 아깝지 않았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라피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이름 모를 풀이 높이 자라나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뱀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몬스터 및 짐승 등에게 마왕은 명령권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내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행진할 때처럼 당당하게 걸어갔다.

    마지막 수풀에서 빠져나가자, 마치 숨어 있듯이, 잭이 죽어 있었다.

    “…….”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놀라움? 안타까움? 아니었다. 도리어 경탄에 가까웠다.

    잭이라면 이럴 수도 있었구나, 그런 감정이 뒤늦게 따라나왔다.

    시체 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바위에는 시뻘건 핏자국이 몇 번이고 묻어 있었다. 그것과 함께, 잭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거무튀튀한 피가 응고되었다. 자기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박아서 자살한 것이었다. 끊임없이 종에 머리를 투신한, 어느 이야기의 까치처럼.

    “……죽었구나. 잭.”

    그가 밤새 어떤 고민에 시달렸는지. 어떤 사고를 거쳐서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모르겠지. 오직 시체와 바위라는 결과물만이 수수께끼처럼 남아 나의 뇌리에 영원토록 각인될 것이다.

    되도록이면 그가 살아남기를 바랐다.

    나처럼 비열한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이용당할지라도, 꿋꿋하게 살아주었으면 했다. 그것은 아직 마왕으로서 이 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한 내가 어느 마음 한구석에 자그맣게 품은 소망이었다.

    아침 햇빛이 숲의 나무 지붕을 뚫고 그 주변에 비추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시체를 바라보았다. 바위 너머에서 시냇물이 흘렀다. 하지만 시냇물로 가지 않고 발길을 되돌렸다. 잭 근처에 다가서는 것이 그의 죽음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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