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인간 사냥 =========================================================================
“후우……네 덕분에 한숨 돌렸어. 고마워.”
“뭘, 친구끼리 돕고 사는 거지.”
우리는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주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도시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느냐에 대한 얘기였다. 잭은 국제적인 식견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사르데냐 왕국의 친왕파와 귀족파의 대립이라느니 신전측의 계략이라느니 열성적으로 의견을 설파했다.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풀린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마차가 멈췄다. 그곳은 도시 근교에 있는 숲의 입구였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풀밭에 앉았다. 멀리 도시의 성벽 너머로는 아직도 연기가 보였다. 잭이 그 광경을 보면서 혀를 찼다.
“쯧. 파비아는 전통적으로 신전측과 대립했지. 파비아 백작은 대전염병에 대해 신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어. 신전에선 노예정책에 누누이 반대했으니까, 그 본보기로 테러를 가한 걸지 몰라.”
무척 그럴듯한 의견이라며 내가 매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전부 네 노예를 뺏기 위해서야’라고 말해주고픈 충동이 들었다. 간신히 참았지만 말이다. 우리 둘의 대화를 라우라는 옆에 앉아 앉아 듣기만 했는데 계속해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도 무시하느라 꽤 힘들었다. 인간의 감정은 직접 읽을 수가 없으니까 꽤 귀찮네.
잭이 괜스레 창문 너머를 보면서 말했다.
“당분간 노예시장이 침체하겠네.”
확실히 그랬다. 저런 사건이 벌어졌으니 설령 주모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더라도 당분간 사람들은 노예시장 근처에 가는 것을 꺼릴 것이었다. 내가 퍽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자네 사업이 곤란해지지 않겠어?”
“사실을 말하자면 그래.”
잭이 한숨을 쉬었다.
“이번 경매는 아버지가 나한테 거래의 형식으로 위임한 거야. 아버지의 상회는 비싼 노예를 공급해서 평판이 오르고, 내 상회는 그걸 다시 팔아서 평판이 오르지. 너도 알다시피 상인길드에선 실적이 중요하잖아……다 이렇게 주고받는 거지.”
척봐도 알려지면 곤란한 내부사정을 잭이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그만큼 날 신뢰한다는 뜻이겠지.
“잭, 내가 보기에 이거 보통 중요한 거래가 아니야. 아버지는 자네에게 기회를 준 거야. 네가 큰 거래를 완수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있는가 없는가 시험해보는 거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젠장, 일이 꼬였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저 노예를 구입하는 것은 어떠한가?”
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가? 정말인가?”
“상인은 거래에 관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야.”
잭의 안색이 급격하게 초조해졌다.
“하, 하지만 데 파르네세 영애는 비싸. 자네한테 심한 부담감이…….”
“흐음.”
정말로 거절할 의사를 가지고 한 말일까.
내가 잭의 상태창을 힐끔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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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잭 올란드
종족: 인간 소속: 메도라눔 상회(롬바르드 상회 산하)
속성: 선(+45)
레벨: 5 명성: 58
직업: 상인(E)
통솔: 10 무력: 5 지력: 23
정치: 20 매력: 9 기술: 6
호감도: 50
현재심리: ‘그렇게만 된다면……그래도, 나의 실책을 친우한테 떠넘길 수는 없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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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허허허.’
이쯤 되니 탄성마저 나왔다. 지금 우정을 염려하고 있는 것인가? 진심으로? 아버지의 기대를 배반하고 상회가 큰 타격을 입게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만약 내가 잭이었다면 상대방에게서 최대한의 가격을 불러내려고 고민했을 것이다.
‘잭. 너 뼛속부터 상인에 어울리지 않는구나.’
그 편이 이쪽 입장에서야 여러모로 좋지만. 처음에는 그저 바보 같았던 상대방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푸근함이 느껴졌다. 이 사람 앞에서는 딱히 연기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듣는 남자, 그가 바로 잭이었다.
“설마 자네, 나한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고민하는 거야?”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잭이 허겁지겁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야. 그게 아니라……그냥.”
“으이구. 이 진상 같으니라구. 나는 상인일세. 매사에 이윤을 추구하지. 내가 데 파르네세 영애를 구입하려는 까닭은 그녀에게서 그만큼의 상품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야.”
내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물론 자네를 도와주고 싶다는 개인적인 호의도 있지. 부정하지 않겠어. 그러나 자네에 대한 호의는 그저 자그마한 원동력에 불과해. 만일 내 이윤의 길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데 파르네세 영애를 사들이자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로리타…….”
잭이 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진짜 멋진 남자구나!’라는 시선이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자칫 날 섬기는 신흥종교라도 만들어낼 기세였다. 혹시 원래 세계에서 잘 나가는 기업을 하는 이들도 심정이 이랬을까.
“음, 분명 최고가가 천육백오십 골드였지.”
내가 한턱 쏜다는 느낌으로 툭 말했다.
“깔끔하게 이천 골드에 구입하지. 어때?”
“이천 골드?!”
잭이 화들짝 놀랐다.
“왜. 혹시 액수가 조금 적어?”
“아, 아니! 전혀 아니야. 너무 많아!”
“원래대로 경매가 진행되었다면 그 정도까지는 오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럴리가! 설령 그렇다손 쳐도 지금은 경매가 파토났잖아. 경매소에서 인건비를 줄 필요도 없으니 더 싸게 부르는 게 옳지. 천오백 골드로 팔겠어.”
이번에는 내가 인상을 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상품에는 정당한 값어치가 뒤따라야 해. 이천 골드야.”
“경매가 상품에 가장 올바른 가격을 책정한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 오히려 경쟁요소를 도입해서 가격을 불리지. 노예 한 명에 천오백 골드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과한 가격이야.”
“데 파르네세가 어디 보통 노예인가?”
잭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천오백 골드. 그 이상으로는 절대로 못 팔아.”
“이거 막무가내로군.”
내가 두손두발 다 들었다. 구매자가 최대한 높은 가격을 부르고 판매자가 최대한 낮은 가격을 부르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정말이지 잭의 호구스러움에는 끝이 없었다. 라우라가 걸어갈 미래를 생각해보면 이천 골드는커녕 물경 이십만 골드도 부족한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천육백 골드로 합의하세.”
“너, 정말이지……알겠어. 천육백 골드에 팔게.”
이 친구는 어쩔 도리가 없다니까, 하는 시선으로 잭이 말했다. 얼씨구.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천하의 호구야. 나는 우습지만 기쁜 마음으로 잭과 악수했다. 잭이 웃으면서 말했다.
“거래는 어디서 하겠어?”
“뭐, 귀찮은데 여기서 당장 하지.”
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노예를 보유하려면 관청에 신고해야지.”
“……어, 그래?”
“물론 관청에다 직접 신고하는 것은 번거로우니까 대충 근처의 상인길드에서 처리하면 좋고.”
“…….”
그때까지 말랑말랑하게 데워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렇군. 그랬지.”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식었다.
이런,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다시 목소리를 밝게 꾸몄다.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적당한 거짓말이 바로 물색되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늘어난 것은 거짓말 솜씨밖에 없었다.
“잭. 미안하지만 여기서 계약하면 안 될까.”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
“내가 흑사병을 고치는 약제를 가진 건 알고 있지?”
“그럼. 잊을 리가 잊겠어.”
“그거 때문에 파비아의 상인길드가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어. 어떻게 발목 하나를 걸칠 생각인가봐. 딱 봐도 돈냄새가 풍기니까, 욕심이 난 거겠지.”
“하, 뻔뻔한 놈들!”
잭이 분개했다.
“놈들은 언제나 그러지. 상인을 보호해야 마땅한 자들이 도리어 상인을 핍박하다니!”
“안타깝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웬만하면 상인길드에서 거래하고 싶지는 않아. 어떤 명목으로 나한테 빚을 덮어 씌우려는 건지 짐작조차 안 가…….”
“크음.”
잭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나는 그가 왜 상인길드에서 거래하려는 것인지 짐작했다. 지금 잭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라기보다 실적이다. 자금은 아버지한테 후원받을 수 있으나, 상인으로서의 실적은 어느 정도 자기가 실제로 이루어야 한다. 상인들의 실적을 관리하는 상인길드가 주관하는 자리에서 이천 골드짜리 거래를 성사시킨다면 잭으로선 더할 나위가 없겠지.
내가 자칭한 상회는 실제로는 없는 유령 상회에 불과하다. 상인길드에서 거래한다 쳐도 그쪽에서 내 신분을 인정할지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조금도 인간의 도시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언제 마족이라는 사실이 탄로날지 모르지 않는가.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줘라, 잭.’
어떤 측면으로든 잭은 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이 세계의 인간이 다소 순진한 구석이 있다 해도 순진한 것과 순수한 것은 엄연히 달랐다. 잭은 후자에 더 가까웠다. 비록 내가 순진함을 깔본다 하더라도, 아니 순진함을 깔보기에, 순수함이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고민에 잠긴 잭을 나는 냉정하게 지켜보았다.
“……좋아.”
잭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여기서 사흘 거리에 있는 도시에 우리 아버지가 경영하는 상회 지부가 있어. 그 도시의 상인길드는 아버지 상회가 거진 장악하고 있지. 그곳에서 거래한다면 행여나 로리타 네가 부당한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거야.”
훌륭한 방안이다.
정말로 최선의 해결책이야.
하지만, 잭. 그건 내가 원하는 답안이 절대로 아니다.
“친구. 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 천육백 골드가 아니라 이천 골드로 계약할게. 대신 이곳에서, 오직 우리 둘이서, 비밀을 간수하자고. 나는 우리 두 명 간의 계약을 원해. 빌어먹을 상인길드에겐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아.”
“나는 더 이상의 돈을 원하지 않아.”
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곳의 상인길드는 믿을 수 있어. 정말이야. 내가 자네에게 사기를 칠 사람으로 보여?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 로리타.”
“…….”
“물론 상인길드에 대한 너의 적개심은 이해해. 아니,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이해할 거야. 그놈들은 직접 장사에 나서지 않은 주제에 뒤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사채업자 같은 자식들이니까. 의리도 상도도 없지. 하지만 나에겐 상인길드의 간계를 막을 뒷배경이 있어.”
“삼천 골드.”
잭이 말을 뚝 멈추었다.
“뭐라고……?”
“삼천 골드로 구입하지. 잭. 이번이 마지막 제안이야. 진심으로,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나는 우리의 우정을 걸고 말하고 있어. 삼천 골드로 여기서 계약하자.”
“…….”
“자네는 내게 데 파르네세를 넘겨. 나는 자네한테 삼천 골드를 넘기지. 그걸로 계약은 깨끗하게 끝나.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 우리의 계약을 보증해줄 사람도, 뭐라고 탓할 사람도, 간섭하는 사람도 없는 거야. 일 대 일의 약속이지.”
삼천 골드 이상을 지출할 수는 없다. 마법스크롤을 구입하고, 도시방화를 의뢰하면서 많은 재산이 소모했다. 앞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면 꽤 많은 양의 투자금이 필요하다.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나는 자금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삼천 골드는 현재 지출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상대방은 그러나 내가 얼마나 간절한지 모르는 듯했다.
“로리타……나는 돈에 그리 욕심이 없어. 천오백 골드나 삼천 골드나, 이번 상행에서 천 골드 이상을 뽑아낸다는 것에 만족할 거야. 솔직히 말할게. 아버지한테, 그리고 상회의 사람들한테 보여줄 실적이 필요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무능하다고 여기고 있어. 그건 사실이기도 해. 하지만 그런 평판을 없앨 기회가 있는데도 놓치고 싶지는 않아.”
잭의 눈동자가 진지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어. 대상이 되어서 진정한 상도를 펼치겠다는 꿈이 그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평판과 실적이 필수적이야, 로리타. 나는 그저 꿈만 쫓다가 도태해버리는 꼬맹이가 되고 싶지 않아. 다행히 나에게는 여러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 일단 아버지가 거대 상단의 상주이지!”
그가 노래하듯이 말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이야? 짐마차 행상부터 시작하는 보통 상인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라고. 이런 조건을 가졌는데도 불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난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 지금이 나에게는 성실해져야 할 때라고 생각해. 삼천 골드? 당장은 좋을지 몰라. 하지만 나는 차근차근 지반을 다지고 싶어. 로리타. 너처럼 언젠가 대륙 전체에 도움이 되는 장사를 하기 위해서.”
“…….”
“정 상인길드에 출석하기 싫다면 이렇게 하자. 일단 나와 함께 도시에 가자. 그리고 거래현장에는 네 상회의 부하를 대신해서 보내. 내가 그한테 노예의 각인을 건네주겠어.”
후우.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쩔 수 없구나. 네 뜻이 그러한데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지.”
잭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해해주는 거야?”
“당연하지. 난 네가 언제나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네 진심이 눈에 선하게 보이거든. 지금 말한 내용뿐만이 아니라 잭 너는 노예거래를 비합법적으로 하는 걸 꺼리고 있어. 그렇지?”
“어? 아, 맞아. 그것도 문제야. 노예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청에 신고해두지 않으면 죄가 되니까.”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질리도록 올곧구나, 잭.”
“하하. 무얼, 너에 비하면 아직 한참 남았는걸.”
“아니야. 삶에서는 정도를 추구하지 못할 때가 많아. 아예 처음부터 정도를 추구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있지. 나도 얼마 전에야 그걸 깨달았어.”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잭 역시 푸근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마주잡았다. 우리 둘은 서로 손에 힘을 꽈악 주었다. 그의 악력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그런데도 로리타 너는 정도를 걷고 있잖아. 대단해.”
“글쎄. 참, 노예는 처음 거래해봐서 그런데. 그 노예의 각인이라는 건 어떻게 주고받는 거야?”
“간단해. 상인길드에 소속된 마법사가 마법을 써서 전달해주지. 굳이 노예거래에서 상인길드를 애용하는 까닭도 거기 있지. 관청에 신고를 의뢰하면서 겸사겸사. 그쪽 도시에서 거래하면 내가 마법사 인건비는 공짜로 해줄게. 하하.”
우리가 마주보고 웃었다.
“그 마법은 어려운 거야?”
“어……아니. 마법에 대해선 전혀 모르지만, 우리 상회의 마법사도 익힌 걸 보면 쉬운 것 같아. 아마도.”
“그렇구나.”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라피스. 오른팔 어깨를 잘라.”
“응?”
잭이 의문이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구겨지는 데엔 3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촤악!
장검이 잭의 팔뚝을 일도양단했다. 그는 곧장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경악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먼저 나를 쳐다보았다. 다음에 자신의 오른팔을 일견했다. 그렇게 1초 정도가 지나고, 잭이 뒤로 벌러덩 넘어지면서 소리질렀다.
“끄허, 끄하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풀밭 위에서 잭의 몸이 이리저리 비틀어졌다. 그는 왼팔로 오른팔의 어깨죽지를 잡았다. 본능적으로 피를 떨어트리지 않으려는 것일까. 목에 힘줄이 징그러우리 만치 툭 튀어나왔다. 그 힘줄에 가해진 압력이 그대로 비명으로 이어졌다.
“끅! 끄허어어어억! 끄하아악! 끄아, 끄하아아아아악!”
라피스가 칼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깔끔했다. 무력 능력치가 삼십 대에다 검술 스킬까지 터득한 그녀의 자세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적어도 문외한이 보기에는. 나는 수고했다는 뜻으로 라피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 또한 고개를 숙였다. 꼭 ‘별 것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슬쩍 라우라가 앉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라우라는 왠지 모르게 예상한 것처럼 표정이 덤덤했다. 하긴, 놀라고 있었다면 되레 실망스러웠을 거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절찬리에 바닥에서 전신을 펄떡이는 이 친구밖에 없다.
“하아, 잭……정말로 안타깝게 됐어.”
“크프으읍! 끄으윽! 로리타!? 로리타흐으으윽!?”
“나는 너한테 세 번을 제안했어. 세 번의 제안은, 정말로, 무척이지 관대한 거야. 거부해서는 안 될 제안이기도 했고.”
되도록 잭을 얌전히 보내주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너한테 호감이 없었으면 다짜고짜 죽였을걸. 잠깐만.”
잭의 배를 살포시 밟았다. 잭은 여전히 비명을 질러댔다.
“아픈 건 알겠는데 너무 시끄럽잖아. 잭! 잭! 내 말 들리지? 그렇지? 조금 조용해줬으면 해. 여기가 시끄러워서 좋을 거 하나 없거든. 잭! 그만 닥쳐! 만약에 내 부탁을 무시한다면 이번에는 왼쪽 어깨를 잘라버리겠어. 알았어? 네 왼쪽 어깨까지 썰어버리겠다고.”
등 뒤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딱히 뭔가를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라피스가 알아서 위협을 가한 것이었다. 과연 라피스의 몸짓에는 효과가 있었는지, 잭이 입술을 꽈악 물었다. 그래도 신음이 새어나왔으나 아까 전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끄윽, 흐으윽……끄흐으윽……!”
“아주 좋아. 훌륭해, 잭. 바로 그거야. 그렇게만 하면 더 이상의 출혈은 없을 거야. 약속하지.”
잭의 배에서 발을 치웠다.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잭과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벌써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내가 보이기나 할까 걱정스러웠다. 배려하는 차원에서 손가락으로 잭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닦으니까 드디어 상대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자아. 협상을 시작하자.”
============================ 작품 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