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6화 (26/510)
  • 00026 인간 사냥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소녀는 잘 짐작할 수 없었다. 사내가 나가고 교대하듯이 들어온 용병들에게 몸을 맡길 때, 그녀는 단지 마차의 밋밋한 천장을 보았다. 의식에서 어머니가 항상 들려준 말이 반복했다.

    ‘긍지를 가져라.’

    파르네세 저택의 복도에는 역대 가주들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딸아이를 저택에 익숙하게 만들 겸해서 가주들의 초상화를 일일이 가리켰다. 초대 가주 피에트로, 2대 가주 프루덴치오, 3대 가주――탁한 물감으로 그려진 그들의 시선에서 라우라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모든 초상화가 뒤섞여 회색 구정물이 되어 휘몰아쳤다.

    여태껏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정작 내 시선은 어떠했지?’

    라우라는 귀족 영애였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주 거울과 대면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헤집었다.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기억력이 뛰어난 소녀는 금방 떠올렸다. 기억 속에서 그녀는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천민.’

    ‘뭐야? 아가씨가 말을 걸다니 드문 일이구만.’

    용병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는 귀족 고객의 다양한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라우라의 몸을 이리저리 개조하고 있었다. 보통 귀족 영애는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한다. 몸이 자기 통제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서. 자기 신체의 새로운 일면,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일면에 타락해가는 모습을 용병은 아주 좋아했다. 달리 말해 라우라는 최악의 소재였다. 그런 모습이 눈꼽만치도 없으니.

    ‘내 눈이 어떠한가.’

    ‘엉? 눈? 왜, 어디 눈이 아파?’

    ‘아니다.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묻는 것이다. 내 눈에서 너는 무엇을 느끼느냐?’

    용병이 라우라의 둔부를 만지작거리면서 콧방구 뀌었다.

    ‘느끼긴 뭘 느껴. 뒈진 놈 시체처럼 아무것도 없구만. 아가씨랑 눈 마주치면 나 하루종일 기분 더러워지니까 행여나 이쪽 바라보지 마쇼.’

    ‘……그런가.’

    ‘암. 참내, 일하기 싫어진 것도 되게 오랜만이거든. 그것도 아가씨처럼 겉보기에 예쁘장한 소재를 두고 일하기가 싫어진다라. 이거 상상도 못한 일이지. 끌끌. 앞으로 아가씨 주인 될 새끼가 마음이 참 착하기를 기도하쇼. 나라면 이틀도 못 가서 채찍질로 죽일 때까지 때릴 거야.’

    용병이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더 이상의 말은 소녀에게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조용히 충격에 감싸였다. 누구보다 시선에 민감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자기가 도리어 본인의 눈이 어떠한지는 바라보지 못했다. 저택 복도에 걸린 초상화의 눈동자와 자신의 눈동자가 다를 점이 무엇인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다만 공간을 차지할 뿐인 초상화와 무엇이 다른가.

    내가 바라던 삶이 고작 그 초상화와 같은 것이었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자아. 오페라 데 파비아 경매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경매가 시작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어떤 뚜렷한 주제와 논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막연하게 단어 몇 개 따위가 마치 코르크 병마개가 바다에 가라앉다가 다시 떠오르듯이 의식에서 부유했다. 라우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에 그만 지쳤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대 뒤편에서 노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불안한지 칸막이 너머로 관객석을 힐끔 훔쳐보았다. 어떤 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노예 감독관이 매주마다 일어나는 이 지겨운 사태에 길게 하품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삶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다. 라우라는 자신의 철학 또한 그 다양한 모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여러분께 소개드릴 노예는 놀랍게도! 사르데냐 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파르네세 공작가의 제 2 계승권자입니다!’

    감독관이 말없이 그녀의 등을 두들겼다. 라우라가 무대로 걸어나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시선의 홍수에 맞닥트렸다. 천 명에 가까운 눈길이 오직 그녀한테 쏠렸다. 라우라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재능은 순식간에 수십수백의 시선에서 의미를 읽어냈다. 웃음, 비웃음, 분노, 불안, 경쟁의식, 성욕―― 갑자기 머리가 피잉 돌았다. 거의 원시적인 욕망이 더운 숨결이 되어 그녀의 전신에 들어붙는 것 같았다.

    ‘지난 번 국화 전쟁에서…….’

    ‘과연 신전의 파문령은 두렵군요. 천하의 파르네세가…….’

    ‘소문보다 더 아리따운 아가씨네요.’

    라우라는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하지만, 하고 그녀가 이를 악 물었다. 고개를 높이 들었다. 네 살 때부터 배워온 귀족의 걸음걸이로 무대를 밟았다. 지금 그녀를 버티게 하는 것은 십 년이 넘게 배우고 익숙해진 교육이었다. 그러나 시선에 질려버려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사회자가 그녀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는지 큰소리로 소리쳤다.

    ‘이름하여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 영애!’

    사람들이 갈채소리를 보내왔다. 이곳에는 파르네세 가문에 적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라우라는 치욕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인가? 이것이 나의 삶인가? 내 삶에서 저들을 그대로 용납해야만 하는가?

    ‘실례지만 이번 상품은 시작가부터 비쌉니다. 단연코 경매소 역사상 최고가를 달성하리라 예상합니다. 자그마치 500골드! 500골드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자신이 한낱 사물로 전락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가.

    ‘이럴수가! 경매가를 말하자마자 무려 여섯 분께서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가장 먼저 거수하신 213번 손님부터 셈하겠습니다. 231번 고객님, 550골드!’

    라우라의 심장이 조였다. 독기가 물들었다. 도대체 무슨 난리인가.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감춘 아버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는 가문의 가신들, 자신에게 허락된 위치, 그 어디에 나의 의지가 허락되었다는 말인가. 언제까지 내 삶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그저 용납하고 체념해야 하는가.

    라우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단탈리안.’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사회자의 소리만 더 거세게 울렸다.

    ‘예, 567번 고객님, 600골드! 13번 고객님, 650골드!’

    라우라가 다시 한 번 입술을 움직였다. 단탈리안, 하고. 여전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64번 고객님, 1650골드! 맙소사! 신이시여! 벌써 사상최고가입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유일하게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던 시선, 그것을 가진 자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설령 악마와 계약해도 상관없었다. 저택 복도에 장식된 초상화와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 끔찍한 장소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그녀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단탈리안!’

    그리고 빛이 퍼졌다.

    *  *  *

    기습은 효과적이었다. 극장 내부의 약간 어두운 조명이 몬스터의 실루엣을 더 공포스럽게 연출했다. 덩치가 인간보다 두세 배 큰 골렘이 날뛰자 난생 몬스터를 처음 본 귀부인들이 극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수백 명이 도망치면서 서로 부닥치고 넘어지고 짓밟았다. 그렇게 압사당한 인간이 골렘에 의해 죽은 인간보다 많으리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한다면 열 마리의 골렘쯤이야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내겐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거나 도시의 경비병이 몰려오면 곤란했다. 기습으로 인해 충격효과가 생긴 지금이 기회였다.

    “잭! 어디 있나, 잭!”

    “로리타!”

    관객석 맨 앞줄에서 잭을 찾았다.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그는 천국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바라보듯 날 반기었다.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얼른 도망쳐야 하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하, 하지만……데 파르네세 영애를 두고갈 순 없어……상회의 미래가…….”

    잭이 절망적인 눈으로 무대를 봤다.

    “내 상회뿐만이 아니야. 아버지의 상회도 큰 타격을 입을 거라고!”

    라우라를 파는 것이 그의 노예상회에 매우 중요한 사업이겠지. 공작가의 여식을 구하느라 얼마만한 인맥과 자금이 들었을지 상상만 해도 까마득할 법했다. 내가 그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정신차려! 당황할 필요 하나도 없어. 잘 들어봐. 파르네세 영애를 데리고 침착하게 여기서 빠져나가자. 알았어? 침착하게.”

    “그, 그래. 그러자고.”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거의 잭을 끌다시피 해서 무대로 올라갔다. 사회자가 무대에서 최대한 관객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침착하게 대피해주십시오, 하고 연신 울부짖었다. 관객을 내버려두고 먼저 도망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훌륭한 직업인이었다. 성노예 경매소의 사회자한테 훌륭하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가 우리를 보고 놀랬다.

    “여러분! 무대로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주인 상회요!”

    내가 소리쳤다.

    “롬바르드 상회 산하의 메도라눔 상회요외다. 직접 노예를 끌고 탈출하겠소!”

    “노예각인을 보여주십시오!”

    과연 판단이 재빨랐다. 가타부타 증거부터 보여달라는 얘기였다. 현재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한 것이겠지. 문득 사회자의 능력치가 얼마나 될지 궁금했으나, 아쉽게도 그런 걸 확인할 틈이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잭이 한 발자국 앞에 나와서 옷소매를 걷어올렸다. 팔뚝에 기이한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사회자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는 잭의 팔뚝과 종이를 번갈아 쳐다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십시오!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미리 사과드립니다!”

    하고 사회자가 성대를 두 번 두들겼다. 그러자 소리 확대 마법이 풀렸는지 사회자의 목소리가 평범하게 작아졌다.

    “무대 뒤편으로 가면 비밀문이 있습니다. 헤르메스의 가호가 있기를.”

    “고맙습니다! 헤르메스의 가호가 있기를!”

    허, 내가 감탄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거래손님을 챙기다니. 게다가 소리를 낮추어서 비밀문에 대해 알려주었다. 현재 오페라 정문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막힌 상황. 비밀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알면 관객들은 순식간에 이쪽으로 몰릴 게 뻔했다.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흐르겠지. 사회자는 그런 상황을 미리 방지한 것이었다. 인간의 진가는 위기가 찾아올 때 발휘된다더니, 일개 사회자로 지내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안타깝군.’

    객석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관객 중에 무예를 좀 할 줄 아는 자가 몇 명 남았다. 그들이 그런 대로 대열을 만들어 골렘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아직 혼란의 여파가 강하게 남은지라 제대로 된 대처는 못하고 있었지만, F급 모험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인간들이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지체하면 골렘 부대가 전멸할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대로 라우라를 낚아채서 극장 뒤편으로 내달렸다.

    “대체, 그대는.”

    “일단 조용히 하시지요.”

    라우라가 뭐라 말하려 했으나 딱 잘랐다. 지금은 도망치는 것이 중요했다. 무대 뒤편으로 주욱 달리자, 아니나 따를까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그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말했다.

    “라피스, 이제 됐어.”

    그러자 라피스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역소환 주문이었다.

    옆에서 잭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저 분은, 후욱……누구야?”

    “내 동료이자 마법사야. 지금 우리에게 간단히 방어 마법을 걸었지.”

    “아!”

    마법사가 동료라는 사실에 잭이 감탄한 것 같았다. 그는 라피스한테 고개까지 숙여가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자. 언제 상황이 나빠질지 몰라. 계속 뛰자.”

    “자네 말이 맞아. 하아,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어.”

    나, 라피스, 잭, 라우라, 이렇게 네 명은 극장에서 완전히 나왔다. 극장 바깥도 안쪽과 다를 바 없이 난리법석이었다. 귀족들은 체면도 잊어버리고 자기네 마차를 찾아다녔다. 마부꾼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주인의 호통에 얼른 마차를 끌어야 했다. 마차를 지나치게 빨리 모느라 중간에 다른 마차와 충돌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러나 약과였다.

    “오, 맙소사!”

    도시의 광경에 잭이 입을 떡 벌렸다. 노예 경매소와 정반대로 떨어진 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마어마한 연기구름이었다. 도시 상공이 까맣게 뒤덮였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도시를 방화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라피스에게 부탁한 의뢰가 생각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저 연기는 매마른 짚단에 지핀 불 때문에 다소 과장되어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잭이 알 리 없었다.

    그건 경비대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난 연기. 경비대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당장 출동할 것이다. 그 사이 노예 경매소에서 내가 몬스터를 소환한다. 경비대가 소식을 듣고 다시 도시를 가로질러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하리라. 조금 있다가 극장에 진입해본들 거기엔 아무것도 없을 테고.

    내가 짐짓 매우 심각한 척 말했다.

    “……계획적인 습격이군. 어떤 단체가 이딴 짓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지금 여긴 위험해. 잭, 이 근처에 나의 마차가 있어. 그걸 타고 도시 외곽으로 향하자.”

    잭이 정신이 빠져 동의하기만 했다. 우리는 경매소에서 약간 떨어진 곳까지 달려가서 마차에 올라탔다. 승마는 물론이고 마차까지 몰 줄 아는 라피스가 마부석에 앉았다. 라피스가 말고삐를 가볍게 흔들자 두 마리의 말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도시의 북문을 통과했다. 그제서야 나는 마음 놓고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냅킨김// 단탈리안이 구사하는 언어능력은 사실 스킬입니다. 덕분에 이세계의 언어들을 문제없이 구사하죠. 연기스킬이 발동하면 언어스킬에 중첩됩니다. 그리고 연기스킬의 대상범위는 '나'가 아니라 상대방입니다. 즉 단탈리안은 자신의 의중과 다르게 언어가 구사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단탈리안은 여기 사람들 말을 귀로 알아듣는 게 아니라 스킬로 파악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쿠폰 감사감사. 완결까지 달릴 거예욧!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