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인간 사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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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소 정문에 마차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경매소는 예전에 오페라로 이름난 극장이었다. 불경기에 폐업한 이후 어느 거상이 사들여 노예 경매소로 개축했다고 한다. 그곳 앞에서 마차꾼들은 담배를 피우며 어느 댁의 마차가 더 값비싸고 아름다운지 품평회를 열고 있었다.
라피스와 함께 의상대여실에 들어갔다. 여기 노예시장에선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라보도록 분장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내가 고심 끝에 샛노란 드레스를 골랐다. 금빛 가발을 뒤집어쓰고 얼굴에 하얗게 분칠했다. 거울을 바라보니 웬 괴물 같은 여자가 비추었다. 어머니라도 이건 못 알아보겠지. 나는 왠지 모르게 흡족해서 아예 가슴에 뽕까지 집어넣었다. 완벽했다.
“단탈리안 님, 준비가……?”
라피스는 간단하게 검정색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분장실에서 나온 나를 보고 그녀의 눈이 확 커졌다. 푸른 눈동자가 재빠르게 나를 발꿈치부터 머리끝까지 훑었다.
“저……그건 도대체……?”
그녀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내가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 호호 웃었다.
“어머나. 라줄리 영애, 평안하셨사와요?”
“……읏!”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 덥사와요. 부디 기체 건강하시기를, 호호.”
“우읏!”
라피스가 두 손으로 황급히 입가를 틀어막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웃음을 참는 것이었다. 나는 두근거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드디어 이 365일 무표정 꼬맹이가 폭소하는 광경을 구경하게 되는가, 하고. 그러나 과연 라피스는 난공불락이었다. 그녀는 격하게 몇 번 헛기침 하더니 예의 절대영도 얼굴을 되찾았다. 안타까워라.
“하아……단탈리안 님. 부디 신분에 맞게 행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머나. 저는 자랑스러운 단탈리안 일가의 부인으로서 한점의 모자름 없다고 자부하고 있사와요. 만일 영애의 눈매에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부디 아낌없이 지적해주시와요. 호호호!”
“읏!……됐습니다. 단탈리안 님의 기행에는 이제 익숙해졌어요.”
잠깐만,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이 상태에서 <연기> 스킬을 쓰면 더더욱 완벽하게 귀부인을 연기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환상적인 아이디어였다. 이토록 황홀한 생각이 내 머리통에 떠오르다니 이미 하나의 기적임에 틀림없었다. 난 당장 <연기>를 발동했다. 곧장 스킬이 경미하게 성공했다는 알림말이 떴다. 기술의 효과인지 목소리마저 한 단계 음이 높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호호호! 오늘은 반드시 보물을 손에 넣고 말겠사와요―!”
내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웃어재꼈다.
“…….”
날 바라보는 라피스의 표정은, 뭐라고 할까. 빡침과 혼돈이 아름답게 칵테일되어 있었다. 저런 감정을 무표정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아 사실 라피스야말로 천의 가면을 가진 여인이었다.
우리는 잭한테서 얻은 초대장으로 경매소 정문을 당당하게 입장했다. 드넓은 홀에는 이상한 나라가 펼쳐져 있었다. 피에로 복장을 차려입은 두 남자가 입구에서 떠들었다.
“그 작자 논문은 건방지기만 해!”
“글쎄. 적어도 플래이토를 모방하지는 않잖아. 난 프리드리히가…….”
“개 같은 낭만성, 그것 때문에…….”
무대에선 공작새로 변장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다. 하마, 젖소, 악마, 난쟁이로 차려입은 연주자들이 바이올린 등을 켰다. 하지만 족히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객석에서 떠들어대느라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그 오백 명도 가지각색으로 변장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라피스와 내가 인파를 헤치며 객석 정중앙으로 갔다. 의자 따위가 없어서 우리는 계속 서 있어야 했다.
라피스는 사람이 많은 곳이 싫은지 작게 인상을 썼다.
“마계의 초열지옥을 방불케 하는군요.”
“마계에 지옥도 있어?”
“단탈리안 님은 정말 마계에 무지하네요. 지옥은 물론 별명에 불과합니다. 마족조차 살기 힘들어하는 지역을 그리 부르지요. 총 스물여섯 곳의 지옥이 있습니다. 대체로 지옥을 다스리는 마족을 마왕에 버금간다 하여 대공(大公)이라 부르지요.”
아하, 마계에서 어떤 영지를 다스리냐에 따라 작위가 정해지는군. 던전 어택에도 자기가 남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마족이 곧잘 등장했으나 뭐가 기준인지 명시되지는 않았다. 마왕이 임명한 건가 하고 대충 짐작하고 있었는데 따로 체계가 잡힌 것이었다.
“단탈리안 님은 마계로 따지면 아슬아슬하게 훈작사(勳爵士) 정도가 되겠군요. 본신의 능력은 낮지만 몬스터 부대를 거느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훈작사? 그런 것도 있었나?”
“기사보다 낮은 작위입니다. 없는 것보다 낫다는 수준이지요.”
“…….”
라피스가 날 괴롭혀…….
잠시 후, 오케스트라가 퇴장했다. 연미복을 입은 신사가 무대에 올라왔다. 그는 이러한 소란에 익숙한 듯 능숙하게 관중을 진정시켰다. 소란스러움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어도 다들 속닥거리는 정도로 소리를 낮추었다. 그러자 아마도 마법도구에 힘을 빌린 듯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객석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는 외안경을 썼는데 거기에도 시력을 강화시켜주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라피스가 속삭였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자아. 오페라 데 파비아 경매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은 모두 쉰다섯 개의 상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평소대로 진행된다면 경매 시간은 대략 네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바로 경매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상품은!”
사회자가 무대 오른편을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그곳에서 얇은 나삼만 걸친 여자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북쪽 대지의 나라, 모스크바 왕국에서 데려온 설원 엘프입니다! 자아. 저 새하얀 살결을 눈여겨보십시오. 마치 백년설이 그대로 비추는 듯 투명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냥 엘프 여종만 해도 가볍게 500골드를 호가합니다만, 이것은 그 드물다는 설원의 아인종. 고객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살색이 갈빛인 엘프를 주로 접하셨을 테지 이처럼 백설과 같은 엘프는 좀처럼 구경하시지 못했을 겁니다. 자아. 오늘의 첫 번째 상품인 설원 엘프. 10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노예 경매가 시작되었다. 몇 사람이 구입의사를 밝히며 숫자가 적힌 판을 들어올렸다. 객석이 드넓었지만 사회자는 기막히게 고객을 알아보았다. 그는 “예, 537번 고객님, 150골드! 76번 고객님, 200골드!”라고 활기차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독순술마저 터득한 것 같았다. 이렇게 규모가 큰 경매소에서 사회자로 있으려면 여러가지 재능이 필요하리라.
사회자의 말솜씨 덕분인지 설원 엘프는 700골드라는 거금에 낙찰되었다. 자기 몸값이 수직 곡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와중에 엘프는 줄곧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이때 처음으로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아인종의 감정도 내게 전달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완벽하게 절망하고 있었다. 때때로 마음속에 향수가 밀어닥쳤으나 덧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자살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를 낙찰 받은 귀족이 어지간히 선인이 아니라면 700골드를 허공에 날리게 될 듯했다.
“700골드! 무려 700골드가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맙소사! 첫 입찰에서 500골드가 넘어간 것은 단언컨대 제 경매소 인생 삼십 년 동안 한번도 없었습니다. 700골드, 감사합니다! 곧바로 다음 입찰로 넘어가지요.”
차례차례 노예가 무대에 나섰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전에 본 적 없던 종족을 여기서 전부 관람하게 되었다. 늑대인간, 묘족(猫族), 호족(虎族), 세이렌, 인어……경매가 진행되어 갈수록 내 손아귀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인종들이 품고 있는, 질척한 우울이 조금씩 나의 심장통을 까맣게 물들였다. 심지어 그들이 육체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까지 약간이마나 전해졌다. 어떤 묘족 소녀는 등가죽이 걸레짝같이 찢어져 있었다.
“……단탈리안 전하.”
옆에서 라피스가 조용히 불렀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머? 오호호. 제가 약간 피곤했사와요.”
“……하아.”
라피스가 옷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돌연 내 입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하고 당황하고 있을 사이. 손수건에 새빨간 피가 묻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엉? 웬 피야?”
“입술을 너무 강하게 깨물었습니다.”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눈치 채지 못했군요.”
“헐, 진짜로 몰랐다…….”
“비천한 인간종이 다른 종족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지 않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저잣거리 아낙네끼리 나누는 이해도, 법정의 재판관이 내리는 판정도,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왕은 이해하되 판정해야 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의 조언은 언제나 살과 피가 되었다. 방금 전, 나도 모르게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 당장 인간의 왕국에 침략해서 살육을 벌이고 싶었다. 마왕들이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적대하는 까닭도 여기서 비롯하는 것일까? 허나 죽고 죽이는 것은 어떤 종족에게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다. 당장 내가 가장 공감하고 있는 몬스터만 해도 수없이 많은 인간을 도륙했다.
“……그래. 고마워.”
“천만에 말씀입니다.”
진정했다. 다소 차분하게 아인종의 감정을 느꼈다. 감정이 전달되는 것을 막을 순 없었어도 영화를 감상하듯이 거리를 두는 일은 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상황이 퍽 흥미로웠다. 타인의 심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어떤 호족 소녀는 가관이었는데, 마치 모델이라도 된 양 인간들에게 몸매를 뽐내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쾌할 수 있는 성격이겠지.
마침내 내가 노리는 '물건'이 입찰에 올랐다.
“이번에 여러분께 소개드릴 노예는 놀랍게도! 사르데냐 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파르네세 공작가의 제 2 계승권자입니다!”
객석이 술렁거렸다. 무대 가운데로 금발의 여자아이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누구를 찾는 것처럼 오페라 객석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에 질린 듯 얼굴이 하얘졌다.
“천하의 파르네세 가문도 여기까지로군요.”
“국화전쟁에서 힘없이 패배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후계자의 미모는 익히 들어왔지만 설마 두 번째 아가씨도 저리 예쁠 줄이야.”
파르네세 가문이 몰락하게 된 전쟁이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전쟁에 대해 얘기하면서 슬쩍슬쩍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한 살결을 탐욕스레 살펴보는 이도 있으리라. 라우라는 이빨을 질끈 물고 꼿꼿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이건 감정을 읽지 않아도 빤히 마음속이 보였다. 공포스럽지만 귀족과 같은 태도까지 잃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 영애!”
일단의 사람들이 박수까지 쳤다. 그것이 라우라에게는 더욱 모욕적이었을 게 틀림없다. 이제 그녀는 양손으로 나삼의 끝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장면을 보게 된 관람객같이 시선을 고정했다.
자아. 어떻게 나올 겁니까, 라우라 데 파르네세.
그녀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이쪽에서 억지로 강탈할 저의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멋지고 깔끔한 장면을 연출해줄 것을, 나는 기대했다.
“실례지만 이번 상품은 시작가부터 비쌉니다. 단연코 경매소 역사상 최고가를 달성하리라 예상합니다. 자그마치 500골드! 500골드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이럴수가! 경매가를 말하자마자 무려 여섯 분께서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가장 먼저 거수하신 213번 손님부터 셈하겠습니다. 231번 고객님, 550골드! 예, 567번 고객님, 600골드! 13번 고객님, 650골드!”
가격이 쉴 새 없이 올라갔다. 그때마나 라우라의 작은 어깨가 움찔했다. 아까 전까지 치켜세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사람의 시선에 민감했다. 자신을 오직 상품으로, 노예로 바라보는 수백 명의 눈초리를――그녀는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을 긍지 높은 인간이라 확신하는 그녀의 자신감이 언제 허물어질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오로지 라우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64번 고객님, 1650골드! 맙소사! 신이시여! 벌써 사상최고가입니다!”
그때,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자그맣게 입술을 움직였다.
“790번 고객님, 1700골드!”
멀어서 들리지 않았으나 소녀는 확실히 이렇게 발음했다.
“1101번 고객님, 1750골드!”
――단탈리안.
내 입가가 히죽 휘어졌다.
“라피스. 축포를 울리자.”
“예, 전하.”
라피스가 후드 안쪽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그녀는 두루마리를 허공으로 던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아르체시투스(Arcessitus).”
관객석 위에 직경 삼십 미터 가량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진에서 연한 분홍빛이 아름답게 새어나왔다. 무대에 집중하고 있던 관객들이 난데없는 빛깔에 고개를 위쪽으로 돌렸다.
“음? 마법진이잖아.”
“주최측의 행사인가?”
“연한 분홍색은 알지 못하는 종족…….”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서 라피스와 나는 서둘러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 사회자만은 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매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단한 직업정신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옆에서는 라우라가 멍한 눈동자로 허공의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일제히 인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와 동시에 건물 전체가 쿠웅, 하고 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진동했다. 뒤를 돌아보니 열 마리의 골렘들이 객석을 깔아뭉개고 서 있었다. 공중에서 소환되었다가 아래에 착지한 것이었다. 골렘들은 갑작스럽게 인간이 나타나자 혼란스러워 했고, 요정들은 무도회라도 열린 줄 알았는지 꺄르르 떠들었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자, 몬스터 전원이 샛붉은 살기를 내뿜었다.
‘닥치는 대로 죽여라.’
골렘의 주먹에 맞아 한 남자가 망토를 휘날리며 저편까지 날아갔다. 그는 무대의 배경장치로 쓰이는 벽에 부딪혀서 투욱, 하고 무대에 떨어졌다. 사회자가 혹여 남자와 부닥칠까 무릎을 굽히면서 소리를 와락 질렀다.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극장에 울렸다.
살육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