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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3화 (23/510)

00023 인간 사냥  =========================================================================

내가 천천히 손가락을 뺐다. 피와 소녀의 침이 한데 섞여 있었다. 손가락은 소맷자락에 문질렀다. 상처 따위 전혀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대충.

마족이라는 말에 당황했는지 라우라가 멍하게 내 몸짓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꼭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해두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담없이 계속 이쪽을 바라볼 수 있게.

“제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마족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나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느냐고요. 저는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라우라. 진지하게 대답해주세요.”

“없……다.”

“훌륭합니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움찔했다.

“저는 당신의 긍지가 보입니다. 강자의 긍지가. 어디서 썩은 냄새가 풍기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방귀 냄새와 비슷하군요. 아마도 당신은 자기 멋대로 철학을 수립한 다음, 그걸 갖고 타인을 재단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을 겁니다.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당신에게 세계란 마치 연극과 같아 이 사람 저 사람은 그저 당신이 정해놓은 배역에 따라 무대에 올라오고 퇴장하기를 반복하겠지요. 요컨대 당신은 자기를 각본가라 여기고 있습니다. 부럽군요!”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내 목소리에는 적의가 철철 흘렀다. 원래 세계에서 나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다가 한낱 초월적인 존재의 변덕심으로 인해 죽었다. 이 세계에서도 결코 원한 적 없는 마왕이라는 배역을 떠맡았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죽여야만 하는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세계가 언제 엔딩을 맞이할지 몰라도, 적어도 엔딩 직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마왕으로 살아야 하리라. 등장도 퇴장도 단지 누군가의 유흥에 불과한 채.

라우라는 죽음만큼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 사치조차 누릴 수 없는 자가 있음을 이 아가씨가 상상이나 해본 적 있을까.

“저는 단 한번도 자신을 각본가로 여길 수 없었습니다. 각오가 없었어요. 어쩌면 그럴 기회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멍청하게 놓쳐버렸지요. 그 대가가 이것입니다.”

나는 머리에 묶은 터번을 풀었다. 수건이 마차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내가 머리통을 살짝 옆으로 돌리자, 라우라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뒤통수에 자그맣게 나 있는 뿔을 목격한 거겠지.

“마, 마왕의 증거…….”

“밖에서 누가 듣겠습니다.”

장난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갖다댔다.

기분이 유쾌해졌다. 꼭 오래동안 끊은 담배를 연거푸 피어버린 것처럼 머리와 심장이 마비되었다. 나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 있으며 괜히 라우라한테 화풀이한다는 것이 자각됐다. 허나 이상하게도 입구멍에 재갈을 물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확실하게 그녀의 기를 죽여놓아야 한다. 그런 확신이 왠지 모르게 들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또 다른 자아가 있어 나지막하게 조언하는 것 같았다.

“제가 앞으로 당신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말해드리지요. 당신은 브르타뉴 왕국의 궁중백작, 비텔스바흐 가문에 팔려갑니다. 그곳 가주(家主) 취미가 당신처럼 영락한 귀족 여식들을 모아서 질펀하게 윤간 파티를 개최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아름답고 어리지요. 게다가 대가문의 계승권자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군침이 흐를 만한 사냥감 아닙니까. 미리 축하드립니다! 분명 비싸게 팔릴 거예요.”

“으…….”

“궁중백의 저택에는 지하실이 여러 개 있습니다. 그중 한 곳에 당신이 감금됩니다. 3년 동안은 밖에 나가보지도 못해요. 궁중백과 그의 부하들에게 돌림질 당하는 나날이 이어집니다. 잠깐만요. 라우라, 왜 고개를 돌립니까? 왜 그러세요?”

상대방이 자꾸 턱끝을 틀려 했다. 나는 그녀의 턱을 잡아세웠다.

“그, 그대의 시선이…….”

“제 시선이 어때서 그런지요. 대답해주세요.”

“그대의 시선이……너무…….”

아무래도 그녀는 사람의 시선에 매우 예민한 듯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끝내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턱을 돌려세웠는데도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문득 조금 연기를 심하게 했나 싶었다. 박진감을 넘치게 하려고 일부러 감정을 악독하게 먹은 측면도 있었지만, 이거. 효과가 너무 뛰어났다.

나는 슬슬 <연기> 스킬이 아주 못 써먹을 기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말을 폭포처럼 쏟아낼 수 있는 것에도 <연기> 스킬 덕택인지도 몰랐다.

“시선을 피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만 당신을 약자로 오해해버리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

라우라가 힘겹게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그곳에 공포가 숨어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가학심이 불거졌다. 내가 이런 성격을 갖고 있었나? 어쩌면 공포의 감정에 환호하는, 마왕으로서의 본성일 수도 있었다. 여하간 당장 판단 내리지 않아도 좋았다.

“좋은 눈이군요. 자아. 제가 지금까지 한 말이 거짓말 같습니까?”

“……아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소아성애자에다 고문이 취미인 변태 귀족한테 팔리고 싶습니까? 아니면 종족이 다소 별나긴 해도 사고방식이 정상적이며 뭣하면 당신을 노예가 아니라 부하로 취급할 생각까지 있는 사람한테 팔리고 싶습니까?”

“이해할 수 없다. 마, 마왕이 왜 나를 필요로 하는가?”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또래에 비해 능력이 출중하고 똑똑하다지만 그래봤자 십대 여자아이. 어디서 마왕을, 아니 중급 마족이라도 접해봤겠는가.

“나, 나에게는……파르네세 가문에 대한 계승권과 외모……두 개 정도밖에 없다. 내 영혼이라도 강탈할 셈인가?”

“이미 망해버린 가문에도, 당신의 미모에도, 영혼에도 관심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지략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지략……?”

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가문을 멸망시킨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자신을 손쉽게 노예로 넘겨버린 친족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애시당초 내 삶을 이렇게 망쳐버린 세상의 만인에 복수할 마음은 없습니까.”

“…….”

“저는 당신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음을 압니다. 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낼 거예요. 세상 사람들한테 보여줍시다. 이것이 당신들이 우리를 버린 결과라고!”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라우라는 무언가 홀린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녀가 자석에 이끌리듯 손을 올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는지 그녀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의 처지를 전부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처럼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앞으로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외쳐주세요. 제 이름은 단탈리안입니다.”

나는 머리에 도로 터번을 묶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나왔다. 소녀가 나를 필요로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일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면 당장 몬스터 부대를 소환하여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킬 생각이었으나……서두를 까닭이 없었다. 라우라를 얻기 위해 내가 쳐놓은 덫은 한 개가 아니었다.

멀리 수풀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잭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용병들이 심드렁하게 카드를 이리저리 나누었다. 그들은 내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그들이 나와 교대하듯이 마차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마차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용병들의 천박한 목소리가 마차에서 조금씩 새어나왔다.

‘성노예 교육이군.’

왜 저들이 잭의 행차를 달가워하지 않았는지 짐작됐다. 그나저나 대단한 소녀 아닌가. 아마 매일 밤마다 교육을 빌미로 강간당했을 것이다. 귀족 여식으로서, 아니 여자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횡포였다. 그런 나날 속에서도 소녀는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고작 열여섯 살 정도 된 여자애가.

나는 뒤통수를 긁으면서 막사로 돌아갔다. 마차가 덜컹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발걸음을 옮길수록 소리가 옅어지더니 이윽고 끊겼다. 빈 공기를 채운 것은 부엉이 울음소리였다.

상인의 하루는 일찍 시작한다.

평원에 어스름이 푸르게 깔렸다. 상인들이 벌써 떠날 채비를 끝내두었다. 오늘 내로 도시에 도착한다면서 사람들이 기쁘게 떠들었다. 행상에게도 노숙은 도통 힘겨웠다. 대상 행렬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곧 도시에 들어가서 신선한 짚단에 누울 거라고 생각하니 허벅지에 없던 힘도 생기는 모양이었다.

“어제는 미안했어, 로리타!”

잭이 유쾌하게 말했다. 우리 둘은 나란히 가고 있었다. 잭은 천천히 말을 몰았고,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내가 완전히 마음에 들었는지 오늘 아침에 친구가 되어도 좋겠냐고 물었다. 내 입장에서도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내가 원래 술에 약한 편은 아닌데 어째 어젯밤은 그렇게 됐네.”

“하루종일 걸었는데 피곤할 만하지. 신경쓸 필요없어.”

잭과 아무래도 좋을 잡담을 나누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마차가 우리 행렬을 뒤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반나절 뒤 도시에 도착했다.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를 검색했다. 지나치게 경비병이 많아서 잠깐 긴장했다. 하지만 이어서 잭이 들려주는 얘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뇌물을 받으려고 저러는 거야. 평소에는 성벽에서 놀던 병사들이 상인만 오면 경비병인 척하면서 내려오지. 성문을 빨리 통과하고 싶으면 얼른 돈을 내놓으라는 수작인데……쯔쯧.”

잭이 미간을 좁혔다. 고매한 이상을 가진 그에게 경비병의 작태가 곱게 비출 리 없었다. 상인들은 잠시간 경비대 측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이내 타협했다.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경비대는 손까지 흔들어가며 우리를 환송했다.

“좋은 상행이었소!”

“덕택에 편안하게 여행했습니다.”

“헤르메스 신의 가호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성문에 들어서고 상인들은 각각 작별인사를 건네며 뿔뿔이 흩어졌다. 용병들은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대가로 상여금을 두둑히 챙겨받고 해산했다. 잭과 나는 비교적 늦게까지 함께했다. 그러나 도시 중앙의 광장에 들어서자 우리 또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잭과 내가 서로 포옹했다.

“로리타, 부끄럽지만……혹시 시간이 되면 내가 참여하는 시장에 와주겠어?”

“물론이지. 나는 네가 훌륭한 상인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우리가 비록 황금에 들러붙는 파리 새끼로 취급받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면 무슨 문제겠어?”

잭은 무척 감격한 표정이었다.

「하급상인 잭의 호감도가 11 오릅니다! 상대방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호감도가 50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면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습니다.」

그가 물기 어린 눈망울로 날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래……네 말이 맞아! 아버지의 의중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내 자신에게 얼마나 떳떳하냐가 문제일 뿐이지.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잊고 살았을까!”

우리는 다시 한 번 포옹을 나누었다. 잭이 여린 팔뚝으로 내 어깨를 꾸욱 감쌌다. 어수룩하지만 순수한 이가 다른 사람에게 건낼 수 있는, 최대한의 호감이었다. 나는 잭을 마뜩치 않게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일지라도 진심을 발휘하는 순간이 몇 번은 있기 마련이었고, 잭의 경우 바로 지금이 그때였다. 그것은 인생에서 얼마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꽤 멋진 것이었다. 우리 둘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각자의 길로 떠났다.

나는 모처럼 인간에게서 느낀 감동의 여운에 잠긴 채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북문, 마굿간 옆에 약속한 대로 한 인물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그 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높낮이 없이 청량한 목소리. 라피스였다.

“아무래도 두 번째 작전을 선택하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됐어. 뭐, 어떤 작전이든 별 상관은 없으니까.”

“여기 도시에는 총 두 군데, 대(對)소환마법의 방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 곳은 영주의 관저이고 다른 한 곳은 신전입니다. 노예시장이 열릴 경매소는 도시 외곽에 위치하여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경비대가 즉각 대처하기란 어렵습니다.”

역시 라피스다. 내가 알고 싶은 정보를 딱딱 알려주었다. 만족스러웠다.

“불놀이를 펼치기에 더없이 적당하군. 의뢰금에 10골드를 추가하겠어.”

“오늘도 쿤쿠스카 상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가지 자그마한 의뢰를 덧붙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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