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인간 사냥 =========================================================================
“호오, 기대됩니다.”
나도 모르게 혀끝이 입술을 핥았다. 감정이 섣불리 노출되지 않게 유의하면서, 잭이 떠벌리는 말에 차근차근 맞장구쳤다. 그는 이제 완전히 취해 있었다. 똑같은 말을 자꾸 반복했다. 덕택에 맞장구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입니다! 요정이 잠들어 있어요. 노예라 부르기에도 뭣하지요. 이보게들! 보물은 잘 지키고 있겠지?”
잭이 날 데려간 곳에는 꽤 몸집이 큰 마차가 정차해 있었다. 마차 앞에서 용병 두 명이 한창 카드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잭에게 퉁명스레 고개만 슬쩍 숙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밤새서 일하느라 귀찮은데 뭐하러 왔냐는 태도였다. 카드에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예에, 그렇습죠. 제기랄. 한짝이군.”
“두짝이다. 네가 졌어, 병신 쪼다야. 돈이나 내놔.”
내가 피식 웃을 뻔했다. 뻔뻔한 놈들. 제기랄이라느니 돈이나 내놓으라느니, 전부 잭 본인이 알아들을 수 없게 우회적으로 쏘아댄 말이었다. 잭은 주정뱅이답게 자기 욕하는 것도 알아먹지 못했다.
“아마 자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하. 천천히 열지요.”
그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구석에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하고 잭이 얼른 횃불을 가져왔다. 횃불이 마차 안쪽을 샛붉게 비추었다. 여인이 문소리에 잠이 깼는지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턱선이 갸름한 소녀였다. 이제 열일곱 살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잠깐 잭을 살펴보더니 이내 그 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다. 실로 쳐다보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사람의 시선에는 보통 여러 가지 의미가 덧칠된다. 아까 낮에 상인도 나를 쳐다보았으나 그것은 비웃기 위해 쳐다본 것이었다. 잭이 나와 눈길을 마주친 것엔 호감을 사고 싶다는 의도가 배어 있었다. 단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혹은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상대를 쳐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몹시 드물다. 산고양이의 눈초리나 그러할까.
다른 사람을 비웃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얻고 싶다, 그 같은 욕구가 시선에 서리기 마련이다. 오직 순수히 바라보기만 하려면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짐승처럼 비웃음이나 호감 따위의 욕구가 없거나. 아니면 욕구를 굳이 타인에게서 갈구하지 않을 만큼 본인이 완벽하거나. 소녀는 그 시선으로 벌써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분은 귀족입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자그마치 공작 영애지요. 정확하게는 영애였습니다. 국화 전쟁에 대해 알고 계신지요? 거기서 수국(水菊)파를 이끌었던 파르네세 공작가의 제2위 계승자입니다. 하하. 정말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이지요. 아니, 분이었지요…….”
잭이 옆에서 한창 떠들었다. 그 와중에 소녀와 나는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돌리면 왠지 모르게 패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소녀는, 비록 어떤 의미에서 그러는지 알 도리가 없어도,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건방지긴.’
굳이 시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네가 얼마나 잘난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어디 마음대로 평가해봐라. 나 또한 나만의 기준으로 당신이 영웅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테니까.
‘상태창.’
띠링, 하고 홀로그램이 간략하게 떴다. 호감도가 낮아서 최소한의 정보만 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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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체력] [공격] [방어]
- 라우라 6 1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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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솔직히 실망스럽다. F급 모험자보다야 훨씬 더 강력하지만 그뿐. 아마 등급을 매기자면 E급에서 D급 모험자 중간에 위치하지 않나 싶다. 십 대 소녀로서 그만한 전투력을 갖춘 게 어디냐 싶어도, 그녀는 훗날 반(反) 영웅이 될 인재이다. 적어도 모든 전투능력치가 두 자릿수이기를 바란 것은 과욕일까.
‘애당초 뛰어난 인간이었던 게 아니라, 시련과 고난을 겪어가며 성장한 것이었나…….’
라우라는 불행한 개인지사로 유명한 NPC였다. 대귀족의 여식으로 태어났지만 성노예로 전락, 십 년의 세월 동안 윤간으로 얼룩져서 지내다가 귀신과 같은 책략과 배신으로 인생을 역전시켰다. 만약 그녀가 천재라기보다 성장하는 유형이라면 지금 그녀를 영입하는 의미가 대폭 사라진다. 내 가슴을 가득 채운 기대감이 급격하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 시선은 무슨 의미이지?”
나는 아직 생각에 잠겨 있어서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소녀가 말했다는 것도 몇 초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네 시선의 의미에 대해 하문했다. 그런 시선은 처음 받아보는군.”
소녀가 오른손으로 옆머리를 꼬았다. 아, 라우라는 고민에 빠질 때 항상 저런다. 게임에서도 그랬지. 나는 이 세계의 완성도에 다소 감탄하면서 반문했다. 상대방의 낮춤말이 하도 자연스러운 탓인지 내가 저절로 존댓말을 쓰게 되었다.
“제 시선이 어쨌길래 그렇습니까?”
“그대는 처음에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에게 기대를 품은 이가 적지 않았으니. 그러나 그대는 직후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기대가 배신당한 것처럼, 내가 그대의 기대에 못 미친 것처럼 말이다.”
“허어.”
내 목소리에 희미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죽은 줄 알았던 불씨가 용케 살아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잭에게 양해를 구했다.
“과연 잭 님이 자랑할 만한 상품입니다.”
“그렇지요? 하하. 정말 외모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리 예쁜 여자는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흥미가 동하는군요. 잠시 노예와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잭 님의 자랑거리가 대체 어느 정도 가치를 갖고 있는지 꼭 한번 품평하고 싶군요. 괜찮겠는지요?”
잭이 흔쾌하게 허락했다. 내가 마차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동안 소녀는 줄곧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파르네세 영애. 당신의 주인은 당신을 외모로만 평가하는 모양이군요.”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도록. 내 가문은 이미 멸망했으니.”
오호라, 게다가 자신의 가문에 집착하지 않는다. 평생을 자랑스러운 대귀족으로서 살아왔을 텐데. 쓸데없는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바라본다라. 점점 더 기대가 커져갔다.
‘그래. 설령 그녀가 성장하는 스타일이라 할지라도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잖아.’
애당초 마음가짐이 특출나지 않았다면 성노에서 철혈재상으로 거듭나지도 못했을 터.
소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저 자를 내 주인이라 칭함은 옳지 않다.”
“어째서지요? 당신은 노예이고 그는 노예상입니다.”
“어차피 저 자의 역할은 나를 어딘가로 운반하는 것. 나는 다른 사람에게 팔려가겠지.”
“그 논리는 이상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지금 당신은 잭의 노예입니다. 당신이 누군가한테 팔려갈지라도 또 다시 다른 사람한테 팔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네 말이 옳다. 나를 얼마나 오래 소유하고 있느냐는 결코 내 주인임을 결정하지 못하지.”
내가 유쾌해진 기분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당신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없다.”
소녀가 오늘 날씨가 차갑다는 어투로 단언했다.
“나는 십오 년 간 파르네세 가문의 영애였다. 그렇다고 내 삶은 파르네세라는 단어로 정의되는가? 아니다. 나는 요 반 년 동안 잭의 노예였다. 그렇다고 내 삶이 잭의 노예라는 단어로 정의되는가? 아니다. 나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누군가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군가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는 않는다. 어디에 소속된다든지, 누구의 노예가 된다든지, 그런 것들은 궁극적으로 볼 때 한낱 우연에 불과하다.”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무엇이 우연이 아닙니까?”
“죽음!”
소녀 또한 씨익 웃었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만이 나에게 있어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명제이다. 설령 내 삶이 누군가에 의해 결정될지라도 죽음, 죽음만큼은 오롯이 내 것이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는가? 내가 타인의 죽음을 대신해줄 수 있는가? 없다. 누구나 죽는다. 누구나 자신의 죽음으로 죽는다.”
“…….”
라우라 데 파르네세. 나는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리고 있었다. 항복을 권하는 용사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 주저없이 성벽에서 뛰어내린 여자. 그때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해도 죽음만큼은 양보할 수 없노라고.
조용한 감동이 찾아왔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을 실제로 증명하는 인간과 마주쳤을 때 생기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자신을 구입하러 온 자라고 생각했으리라. 우회적으로 당신이 날 사더라도 결코 굴복하지는 않겠다고 방금 선언한 것이었다.
자기 신념대로 살아본 적 한번 없는 나에게 너무나도 눈부신 자.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집니다.」
그러나 나는 '연기'했다.
“라우라. 무척 인상적인 철학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도 주인이 없겠군요? 귀족도, 국왕도, 성황도, 사실 따지고보면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죽음 아래 종속된 필멸자이겠군요.”
“그러하다.”
소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방금 그걸 긍정한 것은 대단히 위험했다. 귀족모독죄, 국가반역죄, 신성모독죄, 한 개만 위반해도 능지처참을 당하는 죄목을 단번에 세 개씩이나 저질렀다. 어째서 그녀가 공작가의 제2위 계승권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알 만했다. 아마 그녀는 명목상으로만 계승권자이고 실제로는 가문에서 따돌림 당했겠지. 이 시대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당신은 그러나 아무도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힘겹게 고난을 이겨내고 사는 삶이든, 아무런 의미 없이 충동적으로 자살해버리는 삶이든, 궁극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흠.”
내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딱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만……왜 지금 당장 자살하지 않는 겁니까?”
소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어두컴컴한 마차, 우리는 창문으로 새어오는 달빛에 의지해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잭이 용병들한테 술주정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에 라우라가 입술을 열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런, 안 되지.
내가 재빠르게 그녀의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읍!……으읍!”
손가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라우라가 이빨로 내 손가락을 씹었다. 그녀는 정말로 혀를 깨물 속셈으로 이를 악물어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억세게 물었는지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내가 미리 상황을 짐작하고 집게손가락으로 혀를 보호하지 않았으면 사태는 심각해졌으리라.
“깨물지 전에 당신은 고민했습니다. 그렇지요? 몇 분씩이나 고민했어요.”
“…….”
소녀가 악에 물든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손가락에서 나는 피가 그녀의 입술에 흘러나왔다. 핏방울이 턱선을 따라 흐르면서 똑똑 떨어졌다.
“몇 분의 고민, 그것이 당신의 철학에서 해명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걸 삶에 대한 의지라고 부릅니다만. 이 빌어처먹을 세계에서 얼른 죽어버리지 않고 저를 살아가게 만드는, 역시나 빌어처먹을 것이지요.”
“…….”
“라우라. 당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한테 팔리세요.”
내가 미소 지었다.
“만약을 위해 확인해두지요. 면접은 중요하니까요. 음, 혹시 사적으로 마족을 증오하거나 그럽니까?”
라우라의 눈에서 독기가 탁해지고 당혹감이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