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1화 (21/510)
  • 00021 인간 사냥  =========================================================================

    라우라를 영입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다. 우선 신분을 위장해서 도시에 잠입했다. 신분패는 라피스가 구해주었다.

    그리고 행상(行商)으로 위장해서 마차꾼과 용병 세 명을 고용했다.

    “잘 부탁드립니다요, 장사꾼 형씨.”

    “나야말로. 내 안전이 그대들에게 달렸으니 무사히만 넘어가면 돈을 두 배로 주겠네.”

    전부 자연스럽게 노예상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노예상인은 커다란 대상(隊商) 행렬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도적떼가 습격할까 두려워서 상인들끼리 무리를 짓고 다니는 것이었다. 노예상인이 낀 대상은 과연 규모가 제법 되어 크고 작은 다섯 개와 용병 사십 명이 몰려다녔다. 멀리서 바라보면 군부대가 움직이는 걸로 착각할 법했다. 웬만한 동네 도적떼로는 건드릴 엄두도 못 내겠지.

    나는 그들과 목적지가 같은 것처럼 포장해서 자연스럽게 행상 대열에 끼어들었다. 용병이 세 명이나 있다고 말하니 군소 상회에선 군말 없이 나를 반기었다. 병력이 늘어나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라면서.

    “로리타 행수께선 어떤 물품을 취급하시오?”

    “약초를 주로 다룹니다.”

    “약초라. 별로 돈이 안 될 거 같은데…….”

    작은 상회의 회장이라는 자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기껏해야 풀이나 장사한다니까 나를 깔보는 것이었다. 상인끼리 자존심이라도 다투어보자는 얘기일까. 내가 넉살 좋게 대답했다.

    “하하. 확실히 도시 안에서만 약초를 사고 판다면 돈이 안 됩지요. 하지만! 이쪽 도시에선 흔하디흔한 약초가 다른 동네로 넘어가면 불로초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디다.”

    “허어? 어째서 그러외까?”

    “도시마다 서너 명 있는 약초꾼들은 그네가 항상 다루는 약초만 취급합니다. 같은 고뿔에 걸려도 이 도시에서 처방하는 약초와 저 도시에서 처방하는 약초가 또 다르지요. 그러니 약효는 엇비슷해도 모양새가 다른 약초를 보면 사람들은 꼭 새로운 묘약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놀라기 마련입니다.”

    오호라, 하고 상대방이 맞장구쳤다. 이쯤 되니 주변의 다른 상인도 내 말에 귀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상인은 이익이 된다면 일단 없던 관심도 한번 가져보는 인종. 약초 행상이라는 건 처음 들어봤을 테니 흥미가 동했겠지. 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연기> 스킬 발동.’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효과음이 울렸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 효과가 스킬에 부가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집니다.」

    이거 정말 귀한 정보입니다, 하는 어투로 내가 떠벌렸다.

    “평소에는 그냥저냥 입에 풀칠이나 하면 괜찮은 돈벌이였습니다만. 하, 사정이 달라졌지요. 아주 좋아졌습니다.”

    “사정이라니? 요새만큼 경기가 안 좋은 때도 없었소만.”

    “요즘 경기가 나빠진 까닭은 아무래도 '검은 죽음' 때문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상인이란 물건을 살 때나 팔 때나 인간을 대접하는 직업이었다. 공급자도 고객도 아예 전염병에 걸려 죽어버리니 상인으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든 상인이 불경기에 신음해도 오직 저만큼은 예외입니다. 원인도 모를 전염병에 사람이 떼로 죽어나가니 아무래도 약초에 대한 관심이 부쪽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다른 도시에서 효과가 입증된 약초가 있다는데, 거지부터 귀족까지 득달같이 달려들기 마련이지요.”

    “……!”

    상인의 얼굴에 충격이 서렸다.

    “설마, 로리타 행수! 검은 죽음을 극복하는 약초가 있다는 말이요!?”

    “약초꾼길드와 상인길드에 동시에 가입한 상인은 전 대륙을 뒤져봐도 저 혼자일 겁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저만큼 대륙 각지의 약초를 접해본 사람이 달리 없지요.”

    내가 능글맞게 웃었다.

    “저 초원의 나라에선 검은 죽음조차 그리 희귀한 질병이 아닙니다. 하하!”

    “오, 신이시여! 그게 정말이요?”

    “길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상인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질병에 대항책이 있다니까 놀랍고 기쁠 수밖에. 몇몇 사람은 내가 크게 한탕 잡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부러움이 넘실거리는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중에 내 목표인 노예상인의 얼굴이 섞여 있음을 슬쩍 확인했다. 나는 일부러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방긋 웃었다.

    그날밤, 우리는 가도에 앉아 노숙했다. 한여름이라서 밤을 지새우기 어렵지 않았다. 마부꾼은 마차에서 말을 풀어 적당히 방목해두었고, 용병들이 지친 다리를 주무르면서 물이 잔뜩 섞인 맥주를 몇 모금씩 마셨다.

    내가 고용한 용병 세 명에게는 특별히 농도가 짙은 맥주를 포상했다. 용병들이 무척 감사해했다. 나는 친목을 명분으로 내친김에 다른 상회들에도 맥주통을 나누어주었다. 각 상회에서는 심부름꾼을 보내 감사하다고 전해왔다. 그렇게 낯선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고 있자니, 우리 막사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노예상인이었다.

    “늦은밤에 실례한 것이 아닌지, 죄송합니다.”

    청년. 노예를 사고파는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선하고 예의 발랐다.

    ‘좋아. 낚였다.’

    내가 천만의 말씀이라면서, 지금 막 자그마한 술상을 차린 참이라며 청년을 환영했다. 청년은 환대에 안도했는지 곧 자연스럽게 술잔치에 녹아들었다. 나이가 젊어도 역시 상인이라고 할까, 기본적으로 대인능력과 대화술이 탄탄했다.

    “로리타 행수 님을 뵈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사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행수를 본 것도 처음이에요.”

    청년이 살짝 취기가 돈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이름은 잭이었다.

    “행수란 죄다 나이가 든 능구렁이밖에 없을 줄 알았어요.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십니다.”

    “잭은 저보다 나이가 어리지 않습니까. 허, 자화자찬으로 들립니다.”

    “후후후……저는 애송이입니다. 대상인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이랍시고 작은 상회 하나 차려준 것을 그저 물려받은 것에 불과하지요.”

    잭이 맥주를 벌렁 들이켰다.

    “물려받은 것이면 또 어떻습니까? 시작은 중요치 않습니다. 저희 상인에게 중요한 것이란 결국에는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패기가 있었지요! 가문의 인맥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잭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원하는 대로 장사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시더군요! 당신께서 이루어놓은 사업,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업의 일부분을 도맡으라 명령하시는 겁니다. 결국 저는 조금 믿음직스러운 부하 직원에 다를 바 없어요.”

    잭의 얼굴이 우울했다. 아이구, 나이가 많아봤자 이제 스무 살일까. 질풍노도의 시기 아니랄까봐 고민도 새삼스럽지 않았다. 저 나이에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자신의 고민이 무척 특별한 것인양 착각해버리는 일이지. 오히려 그것이 특별하지 않고 보편적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자기만의 특별한 고민을 갖게 되는데 말이다. 아예 고민하길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이지만.

    내가 이곳에 상담사로 온 건 아니었다. 나는 듣기 좋은 말, 위안이 되는 말을 골라서 했다. 아버지도 다 자식인 당신을 생각해서 그럴 거라는둥, 요컨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담이었다.

    사실 쓸모없는 잡담만큼 쓸모있는 것도 드물었다. 지금도 잭의 호감도가 실시간으로 올라간다는 게 홀로그램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술기운이 들어가자 호감도 오르는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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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잭 올란드

    종족: 인간   소속: 메도라눔 상회(롬바르드 상회 산하)

    속성: 선(+45)

    레벨: 5    명성: 57

    직업: 상인(E)

    통솔: 10  무력: 5   지력: 23

    정치: 20  매력: 9   기술: 6

    호감도: 46

    현재심리: ‘로리타 행수 님이야말로 내 우상에 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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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감도가 자그마치 40을 넘어섰다. 수치만 두고 보면 라피스와 비슷했다. 거 참. 이러다 호감도 올리기가 내 최대의 특기가 되는 거 아닌가 걱정 아닌 걱정이 들었다.

    술기운이 정점에 이르었을 때, 잭이 본격적으로 자기 얘기를 꺼내들었다.

    “솔직히……저도 로리타 행수 님처럼 장사하고 싶었습니다.”

    요는 자기가 얼마나 비범한 삶을 살았는지 광고하는 것이었는데, 내 감상을 토로하자면 자기가 얼마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해왔는지 고백하는 것 같았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오늘밤에 날 찾아온 것도 같은 상회의 부하들이 자기를 묘하게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라나. 아이구! 지나치게 잘난 애비를 둔 탓인지 아주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그래도 속뜻은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흔히 장사는 이기심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세상을 위해, 세상에 이익이 되는 장사를……저는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만을 위해 장사하는 상인은 소상이고, 가족과 상회를 위해 장사는 중상이며, 국가를 위해 장사하는 상인은 대상이라고. 그렇지만 세상을 위해서 장사하는 상인은 어떨까요? 그거야말로 무릇 상인이 추구해야 마땅한 이상 아닐까요…….”

    젊고, 콤플렉스 덩어리에, 순수하다. 즉,

    “암, 그렇지요. 잭의 말이 맞습니다.”

    “역시 로리타 행수 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이만큼 벗겨먹기 쉬운 애송이가 없다.

    “대륙의 만민을 구할 수 있는 약초라니! 그런 물품을 취급하다니! 대단합니다. 정말로 대단해요.”

    “우연히 운이 맞아 떨어졌을 뿐입니다. 저 역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 적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그렇지요? 상인은 결과로 말한다, 그리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으로 로리타 님은 세상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 셈입니다.”

    “제 얼굴에 과분한 금칠을 칠하시는군요.”

    내가 멋쩍게 웃었다. 쯧, 라피스한테 만날 털리는 내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얘는 호구였다. 그것도 아주 큼직한 호구. 지력이랑 정치가 20을 넘겼는데도 왜 상인 랭크가 고작 E에 머무는지 알 만했다. 얘 아버지가 안전한 사업만 맡긴 것에는 아들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이유가 절반을 차지할 거다.

    세상 전체를 위한 이익이라니? 문장 자체로 이미 형용모순이다. 이익은 누군가의 이익이다. 상인이란 그 '누군가'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는 자들이고. 형용모순을 진지하게 울부짖는 사람은 혁명가이거나 바보멍청이 둘 중 하나일 텐데, 잭은 적어도 지금은 후자임에 틀림없다.

    “잭은 어떤 물품을 다루고 있습니까? 그러고보니 그걸 아직 못 들었군요.”

    “……남에게 떳떳하게 밝힐 만한 물품은 아닙니다. 아니, 물품인지도 의문스럽지요.”

    잭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로리타 님에게 무얼 숨기겠습니까. 이것도 위선이겠지요. 예, 노예입니다. 저는 노예를 운반해서 도시에 공급하는 노예상인입니다.”

    내가 다소 놀란 척했다.

    “노예상인이라.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혹시……로리타 님도 노예를 물건이라 생각하십니까?”

    “만약 노예가 물건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물건이어야 하겠지요. 잭, 저는 당신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잭과 같은 이가 노예를 사고판다는 것이 의외였을 뿐입니다. 왜 아버지를 그리 싫어하는 건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하고 잭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그 후로도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잭이 느끼기로 허심탄회했다는 뜻이었다.

    타이밍을 노려서 당신이 어떻게 노예를 관리하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 잭이 마뜩치 않아 했으나, 어쩌면 선배 상인으로서 조언해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해주자 흔쾌히 허락했다. 우리 둘은 꾸벅꾸벅 조는 용병들을 지나쳐서 잭의 막사에로 향했다.

    “여기가 제가 머무는 곳입니다. 메도라눔 상회에 어서오시지요!”

    잭의 막사는 내 것보다 훨씬 그럴듯했다. 화톳불을 네 개나 지피었고, 용병이 열 명이 넘었다. 노예는 스무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화톳불 하나에 둥그러니 앉았는데 발목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대략 대여섯 명이 쇠사슬을 공유했다.

    우리가 다가오자 용병 두엇이 슬쩍 이쪽을 노려보았다. 용병은 잭을 알아보고 다시 저들끼리 카드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고용주에 대한 태도라기에는 적이 무례했으나 저들도 잭도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이동할 때도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는 게 보통입니다만, 저는 야밤에만 쇠고랑을 채웁니다. 하루 내내 쇠고랑에 채워진 채 이동하다보면 발이 망가지기 십상이거든요. 아무리 노예라도 그건 지나치게 가혹합니다.”

    잭이 나지막하게 떠들었다. 아마 자기를 칭찬해달라는 의도인 것 같았다. 나는 기대에 부응하여 대단히 자비롭고 인간적인 처사라고 추켜세웠다. 아마 똥구멍을 핥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발명된 것이리라.

    겉모습과 다르게 내 속마음은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여기엔 내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자 잭이 꼭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가려운 구석을 긁어주었다.

    “로리타 님께는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노예가 있습니다. 아주, 아주 특상이지요! 아무리 로리타 님일지라도 이거엔 깜짝 놀라실 겁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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