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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0화 (20/510)
  • 00020 인간 사냥  =========================================================================

    마을이 불타올랐다. 매운 연기와 뜨거운 불길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비추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을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아빠! 엄마! 데이지!”

    “안 돼!”

    안 돼, 라는 아빠의 한 마디로 소년은 모든 것을 알아들었다. 먼저 저곳으로 달려가면 안 된다. 당장 뒤돌아서 도망쳐야 한다. 안 돼라는 한 마디에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여동생을 내버려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음이,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자기마저 속절없이 죽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이 담겼다.

    두 음절짜리의 짤막한 단어에서도 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생명이 교차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째서 무시무시한 일인지 아직 소년은 알지 못했다. 다만 공포스러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과 마주쳤다. 몬스터의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뒤돌아서서 숲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아까 전에 들은 단어만이 반복되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얼마나 내달렸을까. 뱃속이 심하게 아려왔다. 마구잡이로 달리는 바람에 속이 꼬여버렸다.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하고 아득하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소년의 시야에 남자가 비추었다. 혹시 마을을 습격한 무리일지도 몰라! 소년이 순식간에 근처 수풀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남자가 소리친 말에 소년은 안심했다.

    “나는 순찰병이요! 생존자 없소이까!? 나는 순찰병이요! 제기랄. 생존자, 생존자 없소이까!?”

    때때로 순찰을 명목으로 화전촌에 세금을 물러 오는 병사들이 있었다. 세금을 피해 고향을 버리고 도망쳐온 화전민 입장에서는 죽일 놈들이 따로 없었지만, 소년의 눈에는 지금 저 병사가 천사처럼 비추었다. 소년이 덤불에서 뛰쳐나갔다.

    “저, 저요! 병사 아저씨! 여기 있어요!”

    “오, 이럴 수가! 신이시여, 정말로 있었어!”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한없이 기쁜 표정으로. 그 얼굴에 소년은 완전히 안심했다. 남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반긴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계속 안심할 새가 없었다. 소년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몬스터, 몬스터가 습격했어요……마을이 불탔어요! 엄마, 아빠가!”

    “좋아. 넌 용감한 아이야. 진정해라. 진정해.”

    남자가 허리를 숙여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금 토벌대가 마을에 진입했단다. 나는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으러 돌아다니라는 명령을 받았지.”

    “토벌대요? 정말이요?”

    아이가 껑충 뛰었다.

    “정말 엄마랑 아빠가 살 수 있는 거예요? 여동생도? 마을사람들도?”

    “물론이지. 약속해주마. 곧 있으면 넌 모든 마을사람이랑 함께 있을 거란다.”

    소년은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자기를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허황된 말을 지어낸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소년 또한 남자의 말을 믿고 싶었다. 남자의 목소리에 어딘가 기대고 싶어지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그렇죠!……으흑, 으흐흑…….”

    “이런. 긴장이 풀린 모양이구나. 옳지, 이리 오렴.”

    남자가 소년을 안았다.

    “동생 이름이 데이지, 맞지?”

    “흐윽……아저씨, 데이지를 알아요?”

    “알고 말고. 그리고 네 이름은 루크이고.”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목덜미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가고 있었다.

    “맞아요.”

    “너희 마을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단다. 얘기를 아주 많이 들었거든! 심지어 루크 네가 일곱 살 때 고백한 이웃집 여자아이에 대해서도――.”

    “엑? 와악! 와아악!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공포와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세상에! 아빠가 이 순찰병 아저씨한테 자기 얘기를 들려준 것이 틀림없었다. 아빠는 자기 얘기라면 뭐든지 떠벌리고 다녔으니까. 남자가 낄낄거렸다.

    “좋아. 얼굴이 이제 좀 볼 만해졌구나, 용감한 소년!”

    “하아……아빠도 진짜.”

    “자, 마을로 가자꾸나. 이제 아버지를 만나야지.”

    안 그래도 당장 만나고 싶은걸요, 하고 소년이 남자의 품에서 벗어났다. 소년은 한층 가벼워진 기분으로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마을 주변의 숲길은 전부 꿰고 있었으므로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  *  *

    타악!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가장자리에. 나는 과녁에 꽂아넣었다는 걸로 만족했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라피스가 곁에서 말했다.

    “이것도 못 쏘면 그냥 죽어야지.”

    다음 화살을 장전하면서 대꾸했다. 나는 요새 쇠뇌를 연습했다. 자신을 보호할 수단을 하나쯤 갖고 싶었다. 활은 숙련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 창과 칼은 근접전 무기라는 점에서 익히기 싫었다. 모험자랑 직접 창칼을 맞대라니! 무섭잖아.

    ‘쫄보스럽지만 뭐 어때.’

    자기 분수를 알 노릇이었다. 싸움 실력도 없는 애가 괜히 나대봐야 죽기나 더하겠어. 그리고 막말로 마왕방에 꼭꼭 숨어서 관전하는 것보다는 쇠뇌라도 쏘는 편이 훨씬 더 용감한 행동이었다.

    “어제 주문하신 상품을 가져왔습니다.”

    라피스가 말했다. 쇠뇌를 연습하는 시간에 왜 갑자기 찾아왔나 싶었더니 역시 상인이라고 할까. 장사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라피스 녀석이 갑자기 흥정을 시도하는 게 아니겠는가.

    “장당 오백오십 골드를 받겠습니다.”

    “뭐, 오백오십?”

    화살을 장전하는 것도 잊고 내 목이 휙 돌아갔다. 라피스는 천연덕스럽게도 무표정이었다. 하! 벼룩의 손톱 때까지 달여먹을 것 같으니라고!

    “어이, 장난하자는 거야? 장당 삼백 골드.”

    “한 장에 오백 골드입니다. 그 이하로는 절대로 안 돼요.”

    “그래도 비싸. 한 장에 삼백오십 골드.”

    그러자 라피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백오십 골드. 설령 사탄이 강림할지라도 사백오십 골드에 판매하지는 않겠습니다.”

    상인의 자존심이 여기 걸려 있습니다, 그렇게 선언하는 듯한 어투였다. 쯧. 나는 혀를 차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쇠뇌에 화살을 장전하면서 말했다.

    “두 장에 칠백 골드로 구입하지.”

    “……세 장에 천이백 골드.”

    흠. 세 장에 천이백 골드라.

    권양기(winch)로 화살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쇠뇌를 들어올렸다. 기민하게. 그러나 조급하지 않고. 과녁을 겨냥했다. 일순 숨을 멈춘 다음에 방아쇠를 눌렀다. 현이 튕기었고,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타악!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 분에 두 발을 쏘아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이 정도 위력이라면 적어도 모험자 한 명은 골로 보낼 수 있겠지. 나는 발치에 조심스레 쇠뇌를 내려놓고 라피스한테 오른손을 내밀었다.

    “콜.”

    “좋습니다.”

    라피스가 내 손을 마주잡았다.

    “단탈리안 전하께선 상인이 되었어도 대성하셨을 겁니다.”

    “음.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물론 칭찬입니다.”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식으로 라피스가 말했다. 하긴 군인한테 군인답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칭찬이듯이 상인에게 상인답다고 듣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겠지.

    ─ 케륵! 케르륵!

    ─ 꺄르르르!

    주변에서 고블린과 요정들이 축하하며 환호했다. 마치 두 강대국이 사흘 밤낮으로 토론한 끝에 겨우 대타협을 이루어낸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때를 맞추어서 고블린이 뭔가를 건네주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땀을 닦으라며 수건을 준 것이었다.

    ─ 케르르.

    허허. 최근 요정들을 너무 귀여워해서 그럴까. 블링이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서비스까지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으이구, 귀여운 것. 이럴 필요는 전혀 없는데. 생애 처음으로 자식이 심부름해온 모습을 본 부모와 같이 내가 흐뭇하게 웃었다.

    “고맙다, 이 녀석.”

    블링이 이마에 쫍 하고 입을 맞추었다.

    ─ 케르! 케르르!

    아휴, 좋아서 죽네. 앞으로 더 자주 스킨십을 해줘야겠다.

    나는 근처의 바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잠깐 운동했을 뿐인데 숨이 차올랐다. 원래 세계에서나 여기에서나 체력이 저질스러운 건 어쩜 변하지 않는다. 이마와 목덜미를 열심히 수건으로 닦고 있자니, 어라. 이번에는 요정들이 낑낑대면서 뭘 들고 오는 것 아니겠는가.

    “와우.”

    요정들은 막사발에 물을 담아왔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지 네 마리가 사발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마 단체로 수계열 마법을 써서 만들어낸 생수가 아닐까. 고마워라.

    나는 단번에 물을 들이켰다. 암반 지하수처럼 차가운 물이 식도에 흘러내렸다.

    “캬아.”

    서비스에는 마땅히 팁이 뒤따라야지.

    나는 네 마리 요정을 차례대로 귀여워했다. 손가락으로 뺨을 쓰다듬었고, 배꼽을 간지럽혔다. 요정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 행복해.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림 얼마나 좋을까.

    “……단탈리안 님은.”

    “응?”

    “몬스터한테 무척 상냥하시군요.”

    “그야 뭐. 이렇게 귀여운걸.”

    손가락 끝으로 요정의 머리를 막 문질러주었다. 꺄르르르! 요정은 내 손가락을 붙잡고 철봉에 매달리듯 온몸을 흔들었다. 녀석들에게 내 손은 아마 조금 규모가 작은 놀이터쯤 되는 모양이었다. 짜식들, 난 비싼 남자지만 기꺼이 너희를 허락하마.

    “단탈리안 님.”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라피스가 무언가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내밀고 있었다.

    “어? 이건 또 뭐야.”

    “포션입니다. 상처를 치유해주지요.”

    “설마 나 주는 거냐?”

    “예. 서비스입니다.”

    자고로 공짜는 마다하지 않는 법. 나는 얼른 포션을 건네받았다. 개당 10골드가 넘어가는 고가 제품이라서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타이밍 좋게 들어오니 저절로 신이 났다. 역시 쿤쿠스카 상회! 고객을 감동시킬 줄 알았다.

    “고마워, 라피스.”

    “천만에 말씀입니다.”

    “와아. 도대체 무슨 원리이지? 마법이 함유된 건가, 아니면.”

    “…….”

    “마석을 갈아서 조합한 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물질이 마력을 머금을 수 있다니까, 잘만 하면.”

    “…….”

    응?

    라피스가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포션.”

    하고 그녀가 내 손에 든 포션을 가리켰다.

    “그거, 꽤 비싸요.”

    “응. 알아. 그러니까 고맙다고.”

    “…….”

    “……?”

    여전히 푸른 눈동자가 날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헉, 설마?

    “혹시 비싼 거니까 다시 돌려달라는 거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엉, 그래? 이거 내 꺼 맞지?”

    “예.”

    기분 탓일까. 라피스의 무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냉냉한 것처럼 느껴졌다. 서비스를 하긴 하되 아깝다는 심정인가……쯔쯧, 배풀 때는 확실히 배풀어야 성공하는 법이거늘. 라피스도 아직 대상(大商)이 되기에는 일렀다.

    그녀가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왜 중규모 순간이동 스크롤을 사신 것인지요? 저로서는 값비싼 물품을 팔수록 실적이 올라가니 감사합니다만.”

    “음.”

    중규모 순간이동 스크롤.

    정원 스무 명을 한꺼번에 옮길 수 있는 마법도구이다. 대(對)마법 방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요새를 공략하거나, 고위 마족이 근위병만 데리고 어디를 급히 가거나 할 때 사용되곤 한다. 그런데 값이 비싸다. 고위 마족이라면 순간이동을 할 줄 아는 마법사 한 명쯤은 부하로 두기 마련이었고, 그런 마법사가 없는 마족에게는 스크롤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여러모로 계륵과 같은 아이템이라고 할까.

    ‘지금 내게는 더없이 쓸모 있지.’

    내가 빙긋 웃고만 말았다.

    “지난 번에 의뢰한 일은?”

    “……대답하실 마음이 없군요.”

    라피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해하지 마. 단지 곧 있으면 너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의뢰하신 바를 보고하겠습니다. 사르데냐 왕국 북부지방에는 총 노예시장이 서른다섯 곳 있습니다.”

    하고 그녀가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곳에는 노예 경매소의 주인명과 위치, 규모가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고급 성노가 거래될 정도로 규모가 큰 곳은 세 군데뿐입니다. 그곳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단탈리안 전하께서 요구하신 노예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좋아!”

    내가 오른손을 꽉 쥐었다. 벌떡 일어서서 서너 번 껑충 뛰었다.

    “잘했어! 라피스, 넌 진짜 최고의 인재야!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놈들은 눈꾸녕이 죄다 단추구멍인 게 분명해. 네가 고작 5급 사무원이라니!”

    내 반응이 흡족한 것일까,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번에 대대적으로 결의를 나눈 이후, 라피스는 때때로 지금과 같이 미소를 보여주었다. 평범한 사람과 비교하자면 무표정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나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귀여운 것도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경비가 삼엄하고 보안도 철저하더군요.”

    어쭈? 정보를 내놓기 전에 간을 보겠다 이거지?

    신나서 춤을 추던 발끝이 딱 멈추었다.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보너스로 10골드를 더 지급하지.”

    “경비병과 내부인을 매수하느라 자금이 꽤 들었습니다.”

    “……다시 10골드를 추가로.”

    “이번에도 쿤쿠스카 상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으엑.”

    나는 질려버렸다.

    “야, 넌 진짜 상인이다.”

    “더없는 극찬입니다.”

    라피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할까. 왠지 모르게 통쾌하다는 기분이 느껴진다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건가. 꼭 한방 먹였다, 싶은 오오라가 풀풀 풍기는데.

    “에구구.”

    정보 하나를 얻는 데 예상 외로 지출해버렸다. 이로써 그녀와 나는 한 대씩 주고받은 셈이 되었다. 과연 피도 눈물도 없다는 쿤쿠스카 상회의 일원, 마냥 당하고 사는 법이 없어요.

    “파르네세 영애의 정보입니다.”

    라피스가 품속에 숨겨둔 나머지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치밀함에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원하던 정보를 얻었다는 것에 흐뭇해하며 종이를 건네받았다. 서류에는 한 명의 소녀에 대한 신상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소녀는 자그마한 노예상단에 묶여 있었다. 노예상단이 며칠 후에 거대 경매소가 있는 다른 도시로 옮겨갈 거라는 예정까지 첨부되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통칭 「철혈의 여재상」.

    전생에 나를 죽어라 괴롭힌 여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전생의 던전 어택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인 나를 고생시킨 주범 중 한 사람.

    마왕들이 인간계의 절대적인 적수로서 플레이어와 대립한다면 라우라는 인간계의 또다른 세력으로서 플레이어와 사사건건 부닥친다. 오죽하면 게이머가 마왕한테 죽는 경우와 라우라의 세력 때문에 죽는 경우가 엇비슷하다. 던전 어택 팬사이트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라우라를 욕하는 게시글이 올라오곤 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던가.

    ‘그녀를 반드시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세계가 어찌 돌아갈지 안다. 그렇다면, 하고 깨달았다. 정보를 이용해서 굳이 돈만 벌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의 아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던전 어택에는 용사와 협력하는 무리만큼이나 대적하는 무리도 많았다. 그중 대다수가 결국 용사의 인간적인 매력에 홀라당 넘어가버리긴 해도, 라우라처럼 끝끝내 적으로 남는 이도 있다. 그런 자들을 모아서 규합한다면 능히 던전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라우라는 영입후보 제1순위였다. 그녀만큼 용사를 증오하는 자가 없으니까. 그녀의 최후는 게임에서도 명장면으로 꼽히는데, 그만 항복하라고 소리지르는 용사한테 가볍게 콧방귀를 뀌어준 다음,

    ‘천박한 모험자여. 이 몸은 증오, 오직 증오로 살아왔다.’

    하고 성벽에서 그대로 투신자살한다.

    깔끔하디깔끔한 최후. 유언으로 이런저런 속사정을 전부 나불거리면서 마지막에 가서야 자살하는 여타의 적들과는 일선을 달리했다. 즉 그녀는 유능하고, 용사측을 싫어하고, 심지어 마족과의 협력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마왕인 내가 그만한 여걸을 탐내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하리라.

    서류를 꼼꼼이 살피는 나에게 라피스가 말했다.

    “왜 일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일개 인간이라.”

    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글쎄. 그건 두고봐야 알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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