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9화 (19/510)

00019 ending no.01  =========================================================================

이번 편은 if 외전입니다. 베드엔딩을 혐오하는 분은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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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조건

1. 잘센마을 모험대의 평균 호감도가 30 이상일 것.

2. 단탈리안의 악명이 100이하일 것.

.

.

.

‘아니야. 도저히 승산이 없어.’

이를 악 물었다. 별 도리가 없었다. 내가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는 고작 고블린 두 마리 정도. 그걸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열다섯 명의 모험자를 이길 수 없었다.

‘차라리……그들에게 자비를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되지도 않는 반항을 해서 기껏 쌓아올린 호감도를 까먹느니 그 편이 훨씬 좋았다. 생각해보니, 굳이 던전을 지킬 까닭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 살아날 수만 있다면 구차하게나마 적의 호의에 기대는 것이 뭐 나쁘겠는가.

필사적으로 그들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오백 골드를 넘기자 환호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적어도 비명횡사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다행히 그들은 나를 죽이지 않고 생포한 채 도시로 끌고갔다. 도시의 관리는 모험자들을 치하하며 비싼 값에 내 몸을 사들였다.

“저기, 나으리.”

“음? 무슨 일인가.”

“그럼 이제 마왕은 어찌되는 겁니까요?”

리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요 며칠 사이 모험대와 나는 부쩍 친밀해졌다. 비록 생계를 위해 날 팔아넘기긴 했으나 양심 때문인지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혹시 공개 처형당하는 것은 아닙니까?”

“글쎄. 만약 악명이 조금 높았다면 본보기로 삼았겠다마는.”

콧수염이 날카로운 관리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단단한 수갑에 양손이 묶여 있었다.

“솔직히 마왕이긴 해도 별로 이름이 알려진 작자는 아니지 않은가.”

“그, 그렇지요. 그럼 당장 사형은 면하겠습죠?”

“아마도 그렇게 될 걸세. 최종적으로는 시장 님께서 결정하시겠지만.”

리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살기 위해 항복했는데 오히려 죽어버린다면 본말전도였다. 한편으로, 관리의 심기를 거스를 위험을 감수하고 내 안부를 물어다준 리프가 조금 고마웠다. 물론 모험대는 나를 붙잡은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이 따위 세계에 나를 떨어트린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지, 고난한 삶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던전에 뛰어든 그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사실은 내가 마왕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모험대가 관청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들과 나는 눈빛으로 작별인사 했다. 일주일 가량 함께한 사이치고 담백했으나 제대로 된 작별인사는 어젯밤에 술을 퍼마시면서 나눈 터였다. 그 후, 관리는 병졸한테 시켜 나를 감옥 독방에 가두었다.

콘크리트처럼 딱딱한 비스킷과 약간의 더러운 물만으로 연명하는 생활이 세 달 정도 이어졌다. 위장이 말썽을 부렸지만 금새 괜찮아졌다. 마왕이 된 이후로 회복력이 좋아졌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오른발도 가만히 놔두니까 저절로 나았다. 신기했다.

“어이, 나와라.”

병졸이 말했다. 내가 힘겹게 눈을 떴다. 쇠창살 너머로 땟국물이 잔뜩 긴 얼굴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이 세 달만에 들어본 사람 목소리였다. 매일 빵과 물을 가져다주는 소년이 있긴 했어도 벙어리였다.

며칠 감옥에서 지내본 결과, 이곳은 반역자나 음모자처럼 중죄를 지은 이들이 수감되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간직한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벙어리 소년이 특별히 배급당당이 된 것이리라. 꼬맹이는 감옥에서 왕이나 다름없었는데 위에서 내려온 빵과 물을 제대로 주느냐 마느냐가 전적으로 그 애한테 달려 있었다. 감옥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꼬마애를 상전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독방을 쓰는, 아마도 귀족 출신의 수감자도 처음에는 소년을 욕하고 삿대질하고 난리를 쳤다. 그가 소년을 가리켜 '공자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데엔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아 언제나 눅눅하고 축축한 지하감옥에서 죽어나가지 않으려면 더럽게 딱딱한 비스킷이라도 먹어야만 했다.

“제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입밖으로 나온 것은 쉰소리였다. 하도 오랜만에 말을 하려니까 목젖이 너무 쓰라렸다. 나는 매마른 기침을 몇 번 반복하고서야 간신히 언어를 조형했다.

“제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어디로 가든 내가 알 바가 뭐야. 얼른 나오기나 해. 평생 거기서 썩고 싶은 게 취향이라면 상관없지만 말이야.”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도중에 몇 번이나 무릎이 풀릴 뻔했지만 겨우 버텼다. 지옥이 어떤지 아직 모르지만 지하감옥만큼 최악이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병졸에게 이끌려갔다. 감옥에서 나가기 직전, 내가 병졸에게 말했다.

“죄수에게 빵과 물을 전달하는 소년 말입니다. 자의적으로 배급물을 착복하더군요.”

“뭐?”

“죄수가 받아야 할 빵과 물을 임의로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꽤 자주요. 지난 주에 죽은 프랭크 씨는 그것 때문에 아사한 것입니다.”

병사의 인상이 신문지처럼 와락 구겨졌다. 나는 감옥에서 나가 마차에 실렸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까맣게 색칠된 마차에 올라타며 나는 벙어리 소년에게 복수한 것을 소리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관청의 물품을 사사로이 착복했으니 적어도 두 눈알이 파이리라. 소녀는 벙어리에다 장님으로서 일생을 감옥처럼 살아갈 게 분명했다.

내가 도착한 곳은 노예시장이었다. 노예판매는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장사로서, 최근 대대적인 전염병 때문에 일손이 부족해진 부르주아와 귀족은 연일 노예를 구입하느라 바빴다. 덕분에 이곳 노예시장도 성황이었다.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지자 노예의 가격은 일주일만에 두세 배로 껑충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중에도 내가 출품된 노예시장은 오직 희귀한 노예를 취급하는, 귀족 전용의 경매소였다.

“언제부터 멸치가 짐승처럼 뭍을 걷게 됐는지 모르겠군.”

경매소 담당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하여간 귀족 놈들은 뭐가 값나가는지는 알아도 그게 어떤 과정을 통해 가치를 얻게 되는지 전혀 모르지. 무식한 것들. 이봐, 한 달 안에 저놈을 좀 볼품 있게 만들어라.”

그날 이후 나에겐 좋은 음식이 주어졌다. 상품으로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내 심정을 말하자면 곧 푸아그라가 될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먹는 거위와 같았다. 허나 당장 썩을 비스킷만 갖고 연명해온 나로서는 눈이 뒤집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경매소 담당자는 적당하게 살이 오른 내 몸집을 보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여러분께 소개드릴 노예는 놀랍게도! 사르데냐 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파르네세 공작가(家)의 제 2 계승권자입니다!”

경매소는 망해버린 오페라의 건물을 사들여 개축한 곳이었다. 귀족들은 좌석과 오페라 박스에 앉아서 무대를 구경했다. 무대에서 노예가 판매된다는 것, 그리고 고객들 전원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오페라와 경매소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이름하여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 영애!”

무대 한 가운데에는 금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하얀 속살이 전부 비추는 나삼밖에 입지 않았으나 소녀는 당당했다. 오히려 턱끝을 높인 채, 무대 저편에서 자신을 품평하는 귀족들의 눈동자를 하나씩 바라보았다. 귀족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무대 뒤편에서 대기하는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지난 번 국화 전쟁에서…….”

“과연 신전의 파문령은 두렵군요. 천하의 파르네세가…….”

“소문보다 더 아리따운 아가씨네요.”

라우라 데 파르네세.

내 기억에도 남은 이름이다. 던전 어택에서 주인공을 적대하는 인간계 세력의 핵심 인물이다. 덕택에 주인공은 마족과 싸우면서 동시에 같은 인간들과도 정쟁을 벌여야만 한다. 주인공이 속한 프랑크 제국과 앙숙인 브르타뉴 왕국의 군사(軍士)로 등장하지. 툭하면 주인공을 괴롭히는 바람에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원한을 샀지만, 아름다운 외모에다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곁들어져 소수의 마니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군. 어린 시절 사르데냐의 어느 노예시장에서 팔렸다는 과거지사는 알고 있었다. 그 노예시장이 바로 이곳이었나……머릿속에 저절로 던전 어택과 관련된 기억이 흘러나갔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게임에 대해 속속들이 꿰고 있다한들 무엇하겠는가. 정작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라우라는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자그마치 2000골드. 최고급 성노(性奴)가 비싸봤자 500골드를 넘기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가격이었다.

내가 인간들에게 팔려온 이후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바로 던전에서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의 가격이 정말 빌어먹게 비싸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잘 것 없는 고블린 한 마리가 250골드를 호가하는가? 만일 이 세계에도 게임처럼 난이도가 있다면 이런 난이도를 책정한 게임 개발자는 당장 혀를 깨물고 인천 앞바다에 뛰어들어야 마땅했다. 본인이 투신하기 싫다면 기꺼이 내가 등을 밀어줄 용의도 있었다.

라우라가 끝까지 도도한 자세를 유지하며 무대에서 퇴장했다. 라우라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는 브르타뉴 왕국의 궁중백에 팔린 것이다. 앞으로 십 년 동안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궁중백에게 범해진다. 공중백은 파르네세 가문의 제2위 후계자였던 그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과거 파르네세의 영지였던 곳을 침탈하려는 동시에, 아름다운 그녀의 육체를 끝없이 탐한다. 결국 십 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라우라에게 배신당해서 객사해버리지만.

‘부디 용사 자식을 괴롭혀줘라.’

마왕이 되어버린 나에게 이제 용사는 최악의 적수. 그런 용사를 게임 끝까지 괴롭히는 라우라는 우습게도 내 편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녀의 등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동안 지켜보았다.

“자, 그러면. 신사숙녀 여러분.”

진행자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왕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볐다. 마법도구로 인해 적당히 증폭된 목소리가 오페라 구석구석까지 전달되었다.

“드디어 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몇몇 분께서는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오직 이 상품을 위해 저희 경매소에 방문하신 분도 많으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만큼 이번 상품은 유례가 없는 희귀상품입니다. 크나큰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관리인 한 사람이 내 등짝을 때렸다. 나는 나지막하게 신음하며 무대로 나아갔다. 열화와 같은 갈채소리가 정원 3500명의 오페라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인간계를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운 대악마! 서열 제71위에 당당히 그 흉악한 이름을 올린, 마왕 단탈리안――!”

그 이후의 기억은 단편적이다. 진행자가 끊임없이 가격을 불리기 위해 뭐라고 지껄이고, 귀족들은 불빛에 유혹된 부나방처럼 나를 구입하려고 아우성쳤다.

“시작가는 1만 골드입니다!”

1만 골드라. 속이 쓰라렸다. 그 정도 돈이 있었다면 이런 자리에 설 일도 없었겠지. 지하감옥에 틀어박혀 한 달 내내 비스킷을 침으로 녹여서 먹을 일도, 노예시장에서 돼지처럼 사육될 일도 없었으리라. 내가 알 수 없는 회한에 잠긴 사이 몸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2만 골드, 2만 5천 골드, 4만 골드……마침내 누군가가 10만 골드를 부르자 드디어 광란이 끝났다. 사회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10만 골드를 연이어 부르짖었다. 10만 골드! 더 없습니까? 10만 골드! 좋습니다! 낙찰되었습니다!…….

나를 구입한 곳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실이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은 귀한 손님을 즐겁게 하거나 무도회의 여흥을 돋구기 위한 용도로 나를 사용했다. 나에게는 영구적인 마법각인이 등에 새겨졌다. 노예의 각인이었다.

“으하하! 마왕 전하께서 따라주신 포도주 맛이 아주 각별합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전하, 소신의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어릿광대.

놀이기구.

때로는, 성노예.

시간이 흘렀다. 아무래도 마왕은 늙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내 얼굴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나의 그러한 특징은 황실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춘 모양이었다. 아무리 갖고 놀아도 망가지지 않는 장난감이 생겼다고 표현할까.

황실에는 고급스럽고 밝은 무도회만이 있지 않았다. 뒤편의 그림자에 또다른 무도회가 있었다. 귀족의 자녀들로 구성된 궁정시녀와 달리, 뒤편의 무도회에서는 각지에서 실려온 아인종과 엘프가 시중을 들었다.

그중에 엘프 부부가 있었다. 아내가 강간당하자 남편은 참지 못하고 도피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참았다. 그들도 어떠한 처지에 놓였는지 충분히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단순한 강간이 아니라……세상의 온갖 방법으로 아내의 육체가 더럽혀지자 남편은 견딜 수 없었다. 애당초 '의복을 착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무도회의 규칙 따위, 고귀한 엘프에겐 더없는 모욕이었겠지.

“도망치지 마시오.”

내가 충고했다. 나는 어느새 궁정노예들의 대변인 비슷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노예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곳에선 평균 생존기간이 오십 일이 채 안 되었다.

“충고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참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라고 엘프의 습성을 모르겠소? 일부러 그러는 것이외다. 당신이 도망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내 목숨을 걸고 내기해도 좋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망치려는 거요?”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는 법입니다.”

“……절대로 남쪽 방향으로 도망치지 마시오. 되도록 북쪽으로. 내 길을 알려주겠소.”

엘프 부부가 도망쳤다.

여섯 시간만에 붙잡혔다.

황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섯 시간이나 버틴 것에 감탄해야 하는지, 아니면 죽음을 각오한 결과가 고작 여섯 시간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워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아내가 뒤편의 무도회에서 공개적으로 강간당했다. 그 자리에서 남편은 죽었다. 아내 역시 그 광경을 보고 혀를 깨물어 자살했다.

나에게도 추궁이 돌아왔다. 성노예를 관리하는 것은 내 담당. 노예가 도망쳤으니 담당자인 나 역시 책임에서 안전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도피로를 알려준 자가 내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절대 아니라고 단언했으나 내 말을 믿어줄 리 없었다. 하긴 내가 그들 입장이라도 믿지 않았을 게다.

“처참하군.”

목소리가 들렸다. 며칠 만에 들어본 목소리일까. 내가 힘겹게 눈을 떴다. 얼굴에 굳은 핏물 때문에 눈꺼풀이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희미한 시야만이 밝혀졌다.

“내가 사과해도 그대는 듣지 않겠지. 썩은 나라이고, 썩은 황실이다. 다만.”

상대방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 목소리라는 것,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머리카락이 은색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은 합스부르크 황실 가문의 상징이었다.

“그런 썩은 핏줄을 가진 과인이라도 누군가를 죽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런가.

이 여인이――.

“과인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른 노예 한 명을 과인이 직접 처결했다. 그러면 불만을 입밖으로 낼 무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을 터.”

“……감사, 합니다.”

“과인은 감사를 들을 일을 한 적이 없노라. 마왕이여,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

만약에, 만약이지만.

내가 그때 모험자에게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대항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노보고로트 변경백을 조심하십시오. 선황 폐하를 암살한 자는 그 자입니다.”

“……!? 선황께서 암살당하셨다는 사실을 네가 어찌, 아니, 그보다.”

“그뿐입니다.”

상대방이 침묵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내 어리석었다. 조금 더 일찍 그대를 구했어야 하거늘.”

검집에서 칼이 스르릉 뽑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부디 저편의 세상에서는 편히 쉬기를.”

저편의 세상이라.

내가 죽으면 과연 어떻게 될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의식이 끊겼다.

─ Ending no.01(Dead Ending): <황실의 어릿광대>

─ 엔딩 앨범이 추가되었습니다.

─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 작품 후기 ============================

가끔 이렇게 외전처럼 엔딩을 써볼 생각입니다.

첫 번째 엔딩이라서 그런지 수위가 상당히 약하네요. 자고로 배드엔딩이란 찢고 쑤기고 담그고 뚫고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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