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 바보입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어깨를 덜덜 떨고 있었다. 내 앞에는 '저 너무 어이가 없어요'라는 오오라를 검붉게 풀풀 내풍기시는 소녀가 한 명. 늙은 고블린을 쫒아내자마자 들이닥치신 이후로 소녀께선 줄곧 저기압 상태였다.
“마족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말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일단 무조건 사과하고봤다. 왠지 모르게 라피스 앞에 서면 마음이 유독 약해졌다. 사람의 관계란 게 첫인상에서 단박에 결정되기 때문일까. 첫 만남부터 마왕답지 않게 어수룩한 면모만 보여주어서 그런지, 이제는 제법 위엄 있는 모습을 연기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피스한테만큼은 허세를 부리기가 힘들었다.
라피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토르켈 님께선, 아니 토르켈은 쿤쿠스카 상회의 전설적인 간부입니다. 하급마족인 고블린으로 태어났으나 대마법사가 되어 자그마치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지요. 살아 있는 괴물이라 불러도 무방합니다.”
“거 주름살 영감탱이가 그렇게 잘난 놈이었어?”
“…….”
“계속 말씀하십시오!”
워매, 하마터면 찌릿! 하고 효과음이 들린 줄 알았다. 무슨 여자아이 눈매가 저리 사답다냐. 얘야, 그럼 친구도 못 사귀고 큰일나요. 하긴 라피스는 이미 친구가 없지. 그렇게 마족에서 왕따 당한다는 소녀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행동했는지, 내 이익을 위해서 쿤쿠스카 상회와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설파하기 시작했다.
나는 잔소리를 열심히 오른쪽 귀에 넣었다가 왼쪽 귀로 빼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고, 내가 더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7초에 한 번 꼴로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었다. 4초는 너무 짧고 10초는 너무 길다. 대충 7초 정도마자 고개를 끄덕여야 상대방이 속아넘는다. 이거 원, 이러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배우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참. 라피스도 호감도가 20이 넘었지?’
호감도가 20이 넘어가면 상대방의 상태창에 심리상태가 표시되었다. 나는 문득 라피스의 능력치가 궁금해졌다. 개인적으로 라피스가 참 유능한 마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천 골드를 이만 골드로 되돌려준 소녀. 얘는 어느 정도 능력치로 표시될까?
‘상태창.’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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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라피스 라줄리
종족: 하프 서큐버스 소속: 쿤쿠스카 상회
속성: 중립(-10)
레벨: 23 명성: 122
직업: 상인(A-), 마녀(B), 검사(D)
통솔: 55 무력: 32 지력: 53
정치: 72 매력: 50 기술: 2
호감도: 31
현재심리: ‘이분은 정치에 완벽하게 무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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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쩔어.”
“그러므로 입장이 좋아지신 만큼 지위가 높은 자와 교섭을……단탈리안 님, 제 말을 듣고 계십니까? 설마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 제가 진심으로 드리는 충고를 무시하시거나 경시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딱풀처럼 내 얼굴에 들러붙었다. 소용없다. 이미 내 면상은 철면피도 아이구 뻔뻔한 새끼! 하고 울고갈 수준을 돌파했다. 이 정도 연기야 식은 죽 먹기. 라피스가 고개를 두어 번 갸웃거리고 다시 잔소리를 이어나갔다. 어이구, 조용하고 무뚝뚝한 애가 오늘따라 할 말이 많다.
‘그나저나 어마어마한 능력치네.’
예상 이상이었다. 50대가 넘어가는 능력이 셋, 심지어 정치는 70대를 넘어섰다. 마이너스 보정이 붙긴 했지만 A급 직업 하나, B급 직업을 하나 갖추었다는 점도 대단했다. 던전 어택 게이머로서 평가하자면 웬만한 왕국의 유능한 중신 급과 비슷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까지는 아니어도 외무장관은 너끈히 해낼 정도라고 할까.
‘이런 인재를 고작 말단으로 썩히다니. 쯧, 마족 사회에도 썩은물이 고였구나.’
마족은 철저히 실력주의를 표방한다.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존경과 명예가 뒤따른다. 개인의 실력 그리고 사회에서 주어지는 명예. 두 가지가 마족의 세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중심축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명예가 실력보다 중시되기 시작했다……던전 어택 시나리오 중에 어떤 마왕이 그렇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마족도 마족 나름대로 큰일이구나 싶었더란다.
“알았어, 알았어.”
하고 내가 손을 내저었다. 대충 라피스가 뭘 말하려는 것인지 전부 파악했다.
“요는 지위도 높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랑 거래하라는 말이잖아.”
“그렇습니다. 최소한 그런 사람과 척을 져서는 안 됩니다. 헌데 단탈리안 님은 토르켈에게 쓸데없는 반감을…….”
“라피스 라줄리.”
그녀가 뚝 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를 넘었습니다.”
“탓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나를 위해 충언해주는 사람을 배척할 만큼 어리석지 않아.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지. 그렇지 않아?”
“…….”
약한 자.
그것은 반쪽짜리 마왕인 나를 가리키기도 했고, 하프 서큐버스인 라피스를 뜻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반쪽짜리 삶이라는 점에서 유사했다. 나는 원해서 마왕이 된 것이 아니다. 라피스 역시 원해서 하프 서큐버스로 태어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낙찰 받았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이란 게 결정지어졌다는 것. 우리는 여러모로 비슷했다. 그래서겠지. 알게 모르게 라피스한테 호감이 가는 까닭이. 내가 희미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라피스. 나는 약자이다. 조울증 환자에다 지독한 겁쟁이지. 그렇기에 약자로서 살아남는 데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철저히 고민하지. 강한 자에게 빌붙어서 살아볼까? 당장 생존을 위한다면 그도 나쁠 것 없어. 하지만 강한 자가 약자의 기생을 허락하는 까닭은 약자에게 무언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순간 약자의 삶은 끝장나지.”
앞으로 간부와 거래하라. 좋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상회의 간부가 등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블랙 허브라는 대박 사업을 기획해서이다. 더 이상 그런 사업을 제안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간부가 미련없이 날 떠나리란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건 안 돼. 시간이 언제가 흘러도 나는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항상 수동적인 자세만 취하다 끝날 거야. 라피스, 약자에게는 상책과 중책 그리고 하책이 있어. 하책은 강자에게 빌붙어서 목숨을 연명하는 거다. 중책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약자끼리 연맹하는 것이지. 상책은 강자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아내서 강자를 이용하는 것이고.”
나에게는 상책이 없다. 쿤쿠스카 상회의 약점이라니 그런 건 모른다. 하책도 불가하다. 쿤쿠스카 상회가 나를 끝까지 지지해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중책을 사용하고자 해.”
“약자와 연맹하는 책입니까. 하지만 누구와……?”
“너다.”
내가 손끝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올곧게, 그녀의 청금석과 같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라피스가 한참을 침묵하고 입술을 열었다.
“저, 말입니까?”
“그래. 라피스 라줄리. 너야말로 내게 필요한 인재이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의 의중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띄게 혼란스러워졌다.
“저는 일개 말단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사회적인 위치도 좋지 않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저를 신뢰해주신다는 것에는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단탈리안 님을 도우며 쿤쿠스카 상회에서 보다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합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얘기를 들려주듯이.
하지만 그뿐입니다,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마왕이 저와 같은 사회의 도태자이자 소수자를 친애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일이 없습니다. 마족에게 마왕이란 어디까지나 고고하고 순수한 지존이어야 합니다. 마족의 염원과 꿈, 무의식을 사로잡아 그대로 투영하는, 티끌 없는 거울과 같아야 합니다. 저는 단탈리안 님에게 거울의 붉은 녹과 같은 불순물에 불과합니다.”
라피스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한없이 오래된 체념이었다. 한때 절망과 복수심, 피해의식, 상처로 끈적끈적했을 감정이 이미 오래 전에 굳고 또 굳어서 바위처럼 웅크리고만 있었다. 누구나 그러하다. 누구나 자신만의 바위를 등에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위 역시 언젠가는 풍화되어 산산이 깨지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바람이 되고자 했다.
“아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너다. 너 같은 아이가 내 곁에 서 있어야 한다.”
내가 거침없이 말했다.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나에게 부름 받아 달려온 자가 누구냐? 바로 너다. 백 년을 기약하면서까지 내 옆에 있어주기로 결심한 자가 누구냐? 바로 너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때 나를 대신하여 이익을 가져다준 자가 누구냐? 바로 너다. 지금 나 단탈리안의 성공을 위해 자신에게 해가 되는 충언을 바치는 자가 누구냐? 라피스 라줄리, 바로 너다.”
“안 됩니다. 단탈리안 님의 장기적인 삶에 있어 저는 결코――.”
“어떻게 그걸 자신하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나?”
라피스가 연한 분홍빛 입술을 다물었다.
내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다, 라피스 라줄리! 감히 내 삶을 멋대로 기획하지 마라.”
최약(最弱)의 마왕.
그런 내가 살아남으려면 기존 사회의 권력층과 부합할 순 없다. 이미 그들에게는 나 말고 일흔 명의 마왕이 있다. 이제와서 후발주자가 끼어들어봤자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그저 이용당하기만 하리라. 그렇다면 나는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과 연합하겠다. 그들을 설득해서 내 동지로, 부하로 만들겠다. 비록 나는 겁쟁이지만. 비록 나는 최악의 능력치를 가졌지만――수없이 많은 약자의 염원과 한을 무기로 삼아 생존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필사적으로 생각해낸 대전략.
던전을 지키기(Dungeon Defense) 위한 최선의 수.
그 첫걸음이 바로 라피스, 너다.
“…….”
라피스가 말이 없었다. 일부러 침묵하는 게 아니었다. 작은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만 차마 단어와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 모험자가 던전에 침입했습니다!
눈앞에 알리미창이 떴다. 그곳에는 F급 모험자 열다섯 명이 막 던전 입구를 지나쳤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적이 쳐들어왔군.”
마침 잘됐다.
나는 마음속으로 골렘 부대와 요정 부대를 불렀다. 십수 명의 몬스터가 회답해오는 감정이 밀물처럼 들어닥쳤다. 개전의 흥분, 주인을 위해 싸우겠다는 각오, 인간을 몰살하겠다는 환희. 내 마음이 순식간에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라피스, 따라와라. 약자의 전쟁을 보여주지.”
나는 몬스터 부대와 함께 진격했다. 굳이 마왕성 앞마당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부대는 곧 모험자 파티와 마주쳤다. 모험자들은 예상보다 수가 많은 골렘에 당황했다. 제법 실력과 배짱이 있는지 빈틈없이 전열을 이루고 대항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창칼은 골렘이라는 두터운 방벽에 가로막혀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골렘들이 전열을 이룬다니!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시바아알! 어떤 새끼가 여기가 동네 뒷산 수준이라고 떠벌린 거야!”
모험자들이 창을 내밀고 검을 휘두를 때 약간이지만 틈새가 노출되었다. 나는 그 순간을 노려서 요정 부대로 하여금 마법을 쏟아붓게 했다. 바람이 잘게 갈리는 소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윈드 커터가 모험자들의 팔뚝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난도했다. 동굴에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끄아아아악!”
“마법, 제기랄, 마법이야!”
“루크 개새끼야! 도망치지 마, 물러서지 마라고! 시발!”
상처 자체는 얕았다.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침착함을 되찾는 데 필요한 최저한의 시간을, 나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골렘들의 돌주먹이 장대비처럼 모험자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윈드 커터에 팔뚝이 다친 이가 그만 방패를 놓쳐버렸다. 대가는 참혹했다. 골렘의 주먹질은 모험자의 가슴뼈를 통째로 뭉개트렸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 룩스마을 모험대를 격파했습니다. 전멸에 따른 추가적인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 축하드립니다! 던전 레벨이 올랐습니다.
─ 던전 레벨이 2가 됨으로써 던전에 추가적인 시설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
한번 전열에 구멍이 뚫리자 나머지는 간단했다. 모험자 파티는 순식간에 전멸했다. 도망치려던 두 명도 요정 부대의 일제사격에 난도질 당했다. 나는 열다섯 명의 시체가 널브러진 곳에 섰다. 몬스터들이 승리로 환호하는 감정이 여과없이 느껴졌다. 그들은 다만 주인인 나를 위해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라피스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최하급 몬스터만으로, 아무런 피해없이…….”
“나는 약자이다. 하지만 어리석지 않아.”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라피스. 보여주자. 약자의 긍지를.”
그녀가 푸른 눈으로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오른손을 들었다. 아주 잠깐 멈칫, 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말없이 기다렸다. 그러자 라피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의 온기가 전해졌다.
「하급마족 라피스 라줄리의 호감도가 20 오릅니다! 상대방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호감도가 50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면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단탈리안 전하.”
“나야말로.”
그 순간, 침묵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내질렀다. 동굴에 환호의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날은 어쩌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승리다운 승리를 거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