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6화 (16/510)
  • 00016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지난 두 달, 라피스는 인간계를 예의 주시했다. 인맥과 재력을 총동원해서 마왕이 말해준 약초를 구했다.

    그녀는 일처리가 정확했다.

    마왕이 맡긴 200골드, 그가 상회에서 빌린 1000골드, 마지막으로 라피스가 개인적으로 투자한 300골드, 총 1500골드로 그녀는 인간계의 상회들과 계약했다. 중소 상회들은 다시 도시의 제약사 길드들과 계약했다. 제약사 길드에선 각 마을의 약초꾼들과 계약했다.

    그리하여 라피스는 약초꾼 사백 명을 간접적으로 고용했다. 불과 보름 만에 삼중계약이 이루어졌다.

    한 달이 지나자 그녀의 수중에는 약초 삼만 뿌리가 들어와 있었다.

    중소 상회와 제약사 길드 그리고 약초꾼 모두 이번 의뢰에 기뻐했다. 어떤 멍청한 부자가 쓸데없이 돈을 날렸다고 비웃었다. 그들에게 흑색 허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초였다. 잡초를 캐고 돈을 받으니 이것만큼 쏠쏠한 벌이가 없었다.

    라피스는 이제 인간계의 섬 하나를 묵묵히 감시했다. 하얀 바다의 가장 거대한 섬, 시킬리아. 마왕은 그녀에게 전염병이 이곳에서 발생한다고 예언했다.

    “아가씨,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또…….”

    “괜찮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시민목욕탕에서 일하는 의원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온천장에는 의원이 몇 명 상주했다. 남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라피스를 어느 귀족가의 아가씨로 알았다. 아가씨 마음이 고와서 환자를 돌보겠다며 나흘에 한 번씩 꼭 봉사하러 온천장에 왔다.

    ‘가끔씩 이런 아가씨들이 있지.’

    의원이 라피스를 온천장 안쪽으로 안내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때때로 귀족가 여식은 지나친 사랑의 끝에 남자한테 참혹하게 차여버리거나 하면 병자를 돌봄으로써 자신의 마음속 상처를 치유했다.

    “환자분들은 어떤가요?”

    “여전합니다. 여전히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여하간 그동안 소리 지를 힘만 아껴뒀어도 지금쯤 펄펄 뛰어다녔을 겝니다!”

    의원이 비아냥거렸다. 교사가 학생을 경멸하듯이 이 의원은 어떤 의미로 환자를 혐오했다.

    라피스가 적당히 대꾸했다.

    “그렇군요. 혹시 새로운 환자분도 있나요?”

    “예, 어제 막 실려 온 사내놈이 한 명 있습지요. 겨드랑이랑 사타구니가 아프다며 아주 난리입니다. 머리통도 아프다, 관절도 아프다, 근육도 찢어진다, 어찌나 칭얼거리는지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열이 심하기는 심하더군요. 아마 여름철 감기일 겝니다.”

    라피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예의 무뚝뚝한 어투로 물었다.

    “그 환자분을 먼저 만나 뵙고 싶네요.”

    의원은 마다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두 사람이 온천장 복도를 지나쳐서 객실 한곳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투숙하는 환자가 방문이 열리자마자 꽥꽥 소리 질렀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어! 동네 사람들!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나 죽어요!”

    “천하에 벌거숭이 같으니라구.”

    의원이 씩씩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멀쩡하게 생겨먹은 사내자식이 겨우 감기 때문에 동네 떠나가라 소리치든? 차라리 뒈져버려라, 이 쌍것아.”

    “아이고! 이젠 의사까지 나보고 뒈지라 그러네.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그래, 죽어야지. 내가 얼른 죽어 지옥에 가서 ‘저 의사놈도 뒈지게 해주십쇼, 사탄 나으리.’하고 빌어재껴야지.”

    “그 사탄 새끼 때문에 인생 망가진 게 나다, 멍청아. 어디 그놈 뺨따구나 시원하게 때려보면 소원이 없겠나 싶었는데 잘됐구먼.”

    의원이 라피스를 돌아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놈이 제 소꿉친구인데 입이 워낙 걸걸해서…… 그냥 못 배워먹은 상것이라 생각해주십쇼.”

    “아이고야, 살다 보니 의원 샌님한테 상것 취급받는 날도 다 오는구나! 엉? 사르데냐 왕국의 자랑스러운 해군 조타수님께서 상것이 될 줄이야 누가 미처 알았겠어. 야, 이 돌팔이야, 네가 일곱 살 때 사라쿠사 삼거리에서 똥오줌 지릴 때만 해도도…….”

    “우왁! 우와악! 미친 새끼! 영애 앞에서 못할 말이 없어!”

    의원이 우악스럽게 환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환자가 욱욱 소리를 내며 반항했다. 라피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침대 옆에 앉아 의원의 진료를 도왔다.

    진료라고 해봤자 대단한 것은 없었다. 오늘 어떻게 지냈고, 기분이 어떠하며, 목욕물이 좋았냐고 대화할 따름이었다. 관절이 특히나 아프다는 말에 의원은 환자 팔뚝에서 피를 조금 빼냈다.

    “온천물이 좋긴 하더구먼그래.”

    환자가 노곤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여쁜 여자들도 많고, 맥주도 맛좋고…….”

    “이 천하의 멍텅구리가 술 마시지 말라니까 또 마셨네.”

    “어쩌겠어, 해군이 술 빼면 시체인걸. 참. 목욕할 때 알았는데 내 팔뚝 안쪽에 반점이 하나 생겼네. 여기 봐봐.”

    환자가 쓱 겨드랑이를 벌렸다. 그곳에 엄지손가락만 한 검은색 반점이 피어 있었다.

    “……!”

    라피스가 숨을 삼켰다.

    의원과 환자는 느긋하게 대화했다.

    “정말이네. 허, 이건 또 무슨 일일꼬.”

    “별거 아니겠다 싶긴 한데 아무래도 몸이 영 아프단 말이야. 괜스레 불안해.”

    “자네 체력이 너무 많이 떨어졌네. 전쟁 다녀온 지 보름도 안 되지 않았나. 몸이 파업할 만도 하지. 감기몸살일세. 푹 쉬고 얼른 나아버려.”

    “그래? 진짜 감기란 말이지. 좀 이상해. 고뿔에 한두 번 걸려본 것도 아니고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다 네놈이 늙어빠져서 그렇다, 이 늙은 아저씨야.”

    “뭐 이 샌님 새끼가?”

    관절을 중심으로 퍼지는 통증. 심한 발열. 몸의 부위가 까맣게 변질되는 증상.

    라피스는 마왕의 말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갑자기 볼일이 떠올랐어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배웅은 괜찮아요.”

    하고 라피스가 일어서려는 의원을 제지했다. 그녀는 의원에게 은화 두 냥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빠른 발걸음으로 온천장에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의사가 환자를 째려보았다.

    “네놈 때문에 아가씨가 나가신 거 아니냐!”

    “엥? 그거 또 왜 나 때문이야?”

    “네놈 입이 천해도 너무 천해서 귀족께선 견딜 수 없는 거지. 으이구, 이래서 군인 놈들은 안 돼요. 저 잘난 것만 알지 다른 사람 생각은 까마귀 발톱에 낀 때만큼도 못해.”

    두 사람이 다시 말싸움을 시작했다.

    한편 온천장 복도를 걸어가는 라피스의 마음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녀들이 그녀를 마주치고 역시 귀족인 줄 알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라피스에겐 일일이 대응할 틈이 없었다.

    ‘정말이었어. 마왕 전하의 말이 맞았어.’

    당장 마왕을 찾아가야 했다. 다음으로는 상회에 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비상사태였다!

    이틀 후, 환자가 온몸이 까매진 채로 죽었다.

    일주일 후에 의사가 돌연 죽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시의 어느 누구도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열흘이 흘러 온천장을 애용하던 사람들이 깡그리 몰살당하고, 보름 안에 도시 전역에서 사람들의 몸이 까매지자 비로소 모든 이가 사태를 파악했다.

    돌림병이 창궐했다.

    *  *  *

    쿤쿠스카 상회는 무능한 집단이 아니었다.

    만약 무능했다면 마계의 정상에 올라서지 못했을 터. 상회의 간부들은 설령 조직에서 괄시되는 말단 직원의 보고서일지라도 진실에 적중하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회의실에 간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상회를 지탱한 최고 간부였다.

    “설마 단탈리안이 예언자였을 줄이야. 의외로군.”

    흡혈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간부가 반박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나는 아직도 그가 애송이 마왕이라고 생각해.”

    “허, 참. 전염병을 예언했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전염병이야.”

    하고 늑대족의 장로가 말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인가? 무릇 조직이란 조심할 때는 한없이 조심해야 하고 과감할 때는 끝없이 과감해야 하는 법. 처음에 직원이 보고서를 올렸을 때 우리는 전형적으로 조심스러워하는 자세를 취했네.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지. 지금 증거가 나왔다네. 동지들! 과거에 자신이 내린 결정에 집착하지 말게. 집착은…….”

    “퇴보의 어머니요, 무지의 아버지다.”

    흡혈귀가 말을 받았다.

    “예전에 회장께서 즐겨 말씀하셨지. 회장께서 돌아가신 지 어언 칠백 년. 그동안 우리 일곱 명이 쿤쿠스카를 정상의 자리에서 지켜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마왕들에 친화적이기 때문이었다.”

    간부들이 잠자코 흡혈귀의 얘기를 경청했다.

    명목상 간부들은 동등했다. 그래도 실질적인 리더는 흡혈귀였다. 그는 누구보다 오래 상회를 지켰다.

    흡혈귀가 무표정하게 말해나갔다.

    “우리는 마왕에 적대적인 마족을 손수 토벌했고, 그 대가로 마왕들은 우리에게 무제한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마왕과 쿤쿠스카는 혈맹 그 이상이다. 단탈리안 역시 서열 제71위라 하나 마왕. 만약 그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다 하면, 쿤쿠스카는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야겠지.”

    “나는 인정할 수 없어!”

    맞은편에서 늙은 고블린이 끽끽 소리쳤다. 그는 미간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하게 잡혔다.

    “예언이라니? 하이고, 너희도 늙더니 드디어 두개골에서 정신이 가출했구나. 예언처럼 비이성적인 현상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쿤쿠스카 최고 간부들이 믿다니! 여섯 명밖에 없는 동지 놈들이 이리도 순진해서야 내 얼른 뒈질 것을 지금까지 살아남아 괜히 복장이 터지는구나. 도둑놈이 불알 한 짝 훔쳐가도 아이고 도둑님, 아이고 양상군자님 나머지 한 짝도 얼른 가져가쇼, 할 놈이 네놈들인가 하노라. 어디 쪽팔려서 나돌아 다닐 수가 없겠다!”

    “이보게, 난쟁이 떠벌이 친구.”

    늑대족이 으르렁거렸다.

    “벌써 인간의 도시 세 곳이 당했네. 돌림병이 발발한 지 불과 보름 만에 세 도시가 끝장났어. 내가 수백 년을 살았지만 그토록 전염이 빠른 질병은 듣도 보도 못했다네. 전문가들은 벌써 대륙의 인종 중에 절반 가까이가 떼몰살 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어. 어떻게 이런 걸 거짓말로 찍어낼 수 있는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튼 예언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암.”

    늙은 고블린이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늑대족이 코웃음 쳤다.

    “우길 줄만 알지 근거를 댈 줄 모르는군. 그게 자네가 말하는 이성이라면 거 대단한 이성일세. 나는 차라리 비이성적이게 되고 싶구만. 혹시 자네 파이몬 전하를 상대할 때도 그딴 식으로 말하지는 않으리라 믿네.”

    “아, 파이몬 전하 얘기가 왜 갑자기 나와? 아무튼 예언은 아니라고!”

    흡혈귀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블린이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흡혈귀가 고블린에게 말했다.

    “토르켈, 나의 오래된 친우여.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고블린이 언제 조용했냐는 듯 방방 날뛰었다.

    “역시 어둠의 귀족인 흡혈귀야! 머리에 달린 거라곤 주둥이밖에 없는 어느 늑대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지! 이봐, 머저리 늑대. 앞으로 누가 네놈보고 ‘누구냐’라고 물어보면 달리 대답하지 말고 꼭 ‘내가 바로 천하의 멍텅구리 머저리요외다’라고 대답하여라. 행여나 우리 상회 이름은 들먹이지 말고!”

    주변에서 간부들이 한숨을 쉬었다.

    욕을 먹은 당사자인 늑대족도 화를 내지 않고 혀를 찼다. 저 고블린은 쿤쿠스카의 간부치고는 말투가 너무 경망했다. 상재(商材)가 뛰어나지 않았다면 진즉 간부 자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자아. 단탈리안에게 예언력이 없다고 가정해보지.”

    흡혈귀가 깍지를 끼면서 말했다.

    “그는 전염병이 일어난다고 예언했다. 실제로 전염병이 발발했다. 동지들이여. 이것이 만약 예언력이 아니라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응? 그야…… 허억!?”

    고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부들도 흡혈귀의 의중을 알아채고 경악했다.

    흡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는 경우의 수는 단 한 가지. 마왕 단탈리안이 일부러 전염병을 일으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그럴 리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네. 차라리 단탈리안에게 예언력이 있다면 좋겠다고. 만일 아니라면 그는 사상 최악의 전염병을 자의로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셈이니까. 나로서는…… 그런 마왕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군.”

    흡혈귀가 토로했다. 그 경우에는 마왕 단탈리안을 대적할 수 없다고.

    웬만한 마왕도 한수 접어주고 시작하는 쿤쿠스카 상회의 최고 간부. 흡혈귀는 서열 제25위의 마왕 글라샬라볼라스가 이자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왕의 던전을 초토화시켰다.

    그런 장본인이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꿀꺽!

    회의장에서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