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5화 (15/510)

00015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청년. 아니, 어린 친구. 여기 던전에 대해 몇 가지 좀 물어봅세.”

사내가 살갑게 말해왔다. 호크라는 자였다. 이번 모험대의 대장이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숨기지 않았다.

“혹여 자네의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리지 않을까 걱정되네만.”

“괘, 괜찮습니다. 저를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일생의 은인입니다.”

“어린 친구가 예의가 무척 바르군.”

호크가 기꺼워하며 주변 동료에게 말했다.

“내 자식 놈들이 딱 이만큼 철이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말이야.”

“뭔 소리야? 팰릭스 정도면 벌써 제 앞가림은 하지. 내 아들이야말로 인사불성이야, 쯧쯧.”

“요새 젊은이는 예의가 없어, 예의가.”

조금 웃겼다. 요즘 젊은이가 무례하다는 명제는 옛날에나 지금에나, 심지어 차원을 막론하고 통용되고 있었다.

“동료가 몬스터의 습격에 당했다고 들었네. 먼저 애도를 표하네. 그런데 혹시 어떤 종류의 몬스터가 주로 있었는가? 또 몇 마리가 있었나?”

“골렘이었습니다. 골렘 부대였어요. 무려 열네 마리가 있었어요…….”

“뭐? 열네 마리!?”

모험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F급 모험자에게 골렘이란 최소 다섯 명이서 대열을 짜고 덤벼들어야 감당할 수 있는 몬스터이다. 골렘 열네 마리는 그들에게 죽음과 같다. 별 볼 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침입한 던전에 그만한 전력이 갖추어져 있다니 놀랄 수밖에.

“크흑, 처음에는 골렘 한 마리가 정면에서 등장했습니다. 고작 한 마리였죠.”

내가 눈물을 흘렸다.

“저희는 명성도 실력도 부족한 모험대였지만 골렘 한 마리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진 않았습니다. 얼른 진형을 갖춰서 대항했습죠. 그런데, 그런데 그때 측면의 통로에서 골렘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험자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던전을 지킨 병력은 부족하다. 모험자는 계속 몰려온다. 이런 골때리는 상황에서 내가 택한 대전략은 간단하다. 바로 구라를 치는 것이다.

혹자는 꼴사납고 치사하다 욕하리라. 하지만 이 수법은 병법에도 엄연히 허장성세라 불리며 등장한다. 연기 스킬밖에 갖지 못한 나로서는 이게 최선의 한수이다.

‘제발 걸려라.’

지금까지 작전은 꽤 잘 먹혔다.

저번 주에도 모험대가 나의 명연기에 속아 발길을 돌렸다. 골렘 열네 마리는 허접한 모험대가 감당하기엔 버거웠으니까. 그러나 꽤 잘 먹힌다는 것은 달리 말해, 먹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모험대 대장 호크가 입을 열었다.

“친구들, 동료들, 긴급사태일세.”

그는 극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는 자네들에게 이름을 걸고 약속했네. 같은 마을에서 자라난 죽마고우로서, 진창처럼 험난한 삶을 함께 뚫고 지나온 친우로서, 이중에서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채 살려 보내겠다고 맹세했지. 자네들은 내 말을 신뢰해주었네. 나만 믿고 생전 처음 던전에 나서준 친구도 있지. 하나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해야겠네. 나는 약속을 지킨다고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네.”

“끄응.”

“뭐, 골렘이 열 마리가 넘는데 도리가 있나…….”

모험자들이 한숨을 쉬었다. 공연히 지나쳐온 길을 뒤돌아보는 자도 있었다.

산줄기에 평범하게 자생하는 몬스터 부락민과 다르게 던전의 몬스터는 돈이 많이 나간다. 가죽만 해도 야생 몬스터보다 던전 몬스터가 훨씬 더 고급스럽다. 한몫 노리자는 마음에 두려움을 이겨내고 던전에 왔건만, 지나치게 강대한 적 앞에서 욕심마저 힘을 잃고 있었다.

“다행히 여기 청년이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주었지. 꼼짝없이 당하는 미래를 막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운아일지 모르겠네. 여기서 돌아가고 싶은 이가 있다 해도 결코 말리지 않겠네. 다만!”

불현듯 효과음이 울렸다.

「초급 모험자 호크가 ‘연설’ 스킬을 발동했습니다!」

‘뭐라고!?’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강아지가 초복에 탭댄스 추는 소리인가.

나는 서둘러서 호크의 능력치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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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호크

종족: 인간   소속: 레비앙 마을

속성: 선(+25)

레벨: 3    명성: 2

직업: 어부(B+), 모험자(F)

통솔: 20  무력: 12  지력: 3

정치: 15  매력: 10  기술: 10

호감도: 26

현재심리: ‘골렘 열네 마리…… 확실히 무시무시한 적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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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지만 뭐!?’

고작 F급 모험자가 스킬을 가지고 있다니 사기다. F급 마왕인 나도 연기 스킬을 갖고 있긴 하다. 그래도 나는 명색이 마왕이지 않은가.

던전 어택의 폐인인 내가 확신에 차서 장담한다. F급 NPC가 스킬을 가지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영웅 중에서도 영웅인 NPC마저 다 처음에는 스킬 없이 시작한다. 그런데 이 세계는 도대체…….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 거야!’

호크가 담담하고 힘차게 연설해나갔다.

“우리에겐 부양할 가족이 있네. 지금도 마을의 아낙네와 아이가 입에 거미줄을 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저 죽여 마땅할 영주 놈은 세금을 낮출 생각이 전혀 없네. 당장 다음 주에 악마와 같은 세금징수원이 찾아올 텐데 우리는 세금의 절반조차 낼 수 없다네.”

사람들이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들 각자가 자신의 집을 떠올리고 있음을 나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제기랄. 아내와 자식을 등에 짊어진 남자는 독해진다. 흐름이 좋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죽어버리면 본말전도일세. 솔직히 골렘 열네 마리는 목숨을 걸어도 절대 이길 수 없지. 하지만 동지들, 나에게 방책이 하나 있다면 어떤가?”

“방책? 그런 게 있겠나. 골렘 열네 마리라고.”

“반대로 생각해보는 걸세! 청년, 분명히 골렘 열네 마리라고 말했지?”

호크가 질문해왔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 외에 몬스터가 있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습니다.”

호크가 빙긋 웃었다.

“거기에 적의 약점이 있네. 오직 골렘 열네 마리만 있다는 것. 모두 알다시피 골렘은 꽤 느리네. 주먹질이 제법 빠르긴 하나 정작 이동하는 속도가 떨어지지. 알겠는가? 우리는 뒤로 후퇴하며 멀리에서 골렘을 저격하면 그만일세.”

“아!”

“그런 수법이!”

모험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반면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턱뼈가 땅바닥에 키스할 지경이었다. 저 말이 맞았다!

“만일 고블린이나 요정이 몇이라도 섞여 있었다면 우리의 작전은 실패하겠지. 그러나 골렘밖에 없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쉬워진다네. 활을 적극적으로 이용합세. 그저 뒷걸음치면서 적당히 화살을 날려주면 되네.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언젠가 골렘 부대를 전멸시킬 것이 틀림없네.”

모험자들이 신 나서 떠들었다. 그들은 벌써 전투에서 승리한 분위기였다.

“그래! 겁나게 간단한 방법이구만.”

“천만다행이야. 우리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힐 걱정이 사라졌군. 솔직히 이번에도 공손으로 들어가면 난 뒈진 목숨이거든.”

홀로그램이 떴다.

「레비앙 마을 모험대(F)의 연설 스킬이 성공합니다.」

「레비앙 마을 모험대(F)의 사기가 대폭 증가합니다!」

나도 모르게 욕설이 육성으로 터질 뻔했다. 하급 몬스터 중에서 가장 강력한 골렘을 구라패로 사용한 게 도리어 독이 될 줄이야.

나는 천하에 멍텅구리였다. 자살하고 싶었다. 만일 주변 1m에 종유석이라도 있었으면 얼른 머리통을 꼬라박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멍청한 탓이 크긴 해도 호크라는 모험자가 너무 잘났다.

말이야 바른 말이어도 어디 초보 모험대가 투석과 활만으로 골렘 열네 마리를 해치우는 일이 쉽겠는가. 엄청난 용기와 끈기가 필요하다. 모험대 대장 호크는 저들에게 용기와 끈기를 불어넣었다. 가족과 자식을 연상시킴으로써 말이다.

‘내가 가진 스킬이 저 정도라도 되었다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최하급 NPC보다 마왕이 못나다니. 어쩌다 던전 어택의 정점 플레이어가 이딴 처지에 몰리게 되었는가.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슬픔과 별개로 내 머리는 쌩쌩 돌아갔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다. 골렘에게 저런 약점이 있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어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몇 가지 책략을 준비해두었다.

“호크 대장님!”

내가 냉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음? 자네……?”

“대장님의 연설에 감동했습니다! 부디 저도 파티에 끼워주십시오!”

호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저에게도…… 저에게도 가족이 있습니다. 아직 어린 여동생 세 명과 늙은 모친께서 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벌써 세 달 동안 변변한 개죽조차 들지 못하고 있어요…… 저희 마을은 작년도 올해도 흉년이라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습니다.”

“허어, 그런 사정이.”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삶을 견디다 못해, 이 빌어먹을 던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몫 단단히 붙잡기는커녕 동료들이, 마을의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렇다 치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어쩌죠……? 저마저 돈을 벌지 못한다면, 흐윽. 우리 마을은, 우리 마을은…….”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내가 훌쩍이는 소리만 을씨년스레 동굴에 울렸다. 잠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자네…… 자네 정말.”

호크가 코를 크흥, 하고 풀었다.

“자네 정말 훌륭한 젊은이군! 나는 기껏해야 내 가족을 생각했을 뿐이네. 그런데 자네는 마을 전체를 걱정하는구만…… 이 얼마나 숭고한 청년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 호크, 마흔다섯의 인생 동안 이토록 부끄러운 순간이 없었다네! 자네와 같은 이가 다음 세대를 살아간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나의 이번 던전행은 이미 충분히 의미를 가지게 되었어!”

그가 내 두 어깨를 덥석 잡더니, 잔뜩 맹맹해진 목소리로 울었다.

“암, 암! 같이 가야지. 함께해야 하고말고! 우리가 남인가! 우리 모두 이 저주받을 세상에 태어난 자들이 아닌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인생 아니냐는 말일세. 나의 친애하는 동료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허, 섭섭한 사람일세. 우리라고 자네처럼 생각하지 않을 줄 알아?”

“우리도 뜨거운 심장을 가진 레비앙 마을 사나이다! 저 애의 말에 감동하지 않는다면 보랏빛 물길을 헤칠 자격이 없지!”

모험자들이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한 명씩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나이들 간의 말없는 교감이 오갔다. 내가 배낭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이런 기쁜 날에 술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마침 제가 파티의 짐꾼이었습니다. 양이 적어서 한 사람당 한입 정도밖에 못 마시겠지만, 어디 양이 문제이겠습니까. 우리 함께 전투에 앞서 결의를 나눕시다!”

좋소! 좋아! 하고 모험자들이 호응했다. 나는 술병을 건넸다. 모험자들이 돌아가면서 술로 입술을 축였다. 고래로부터 알코올은 곧잘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약간의 알코올은 병사의 사기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자아, 청년. 자네가 마지막일세.”

호크가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나는 공손하게 술병을 받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호크가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우리는 승리한다!”

“우오오오오!”

“우리는, 살아 돌아간다!”

“우오오오오오――!”

다시 한 번 사기가 대폭 올랐다는 알림창이 지나갔다. 이렇게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코앞에서 사나이의 기세가 넘쳐흐르다 못해 폭발하고 있었다. 나도 함성에 동참했다. 입안에 고인 술이 전부 튀어나갈 정도로 열렬하게 외쳤다.

마침내 일행이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좋아. 그럼 출발…… 라제프?”

모험자 한 명이 발을 내딛자 마치 땅바닥이 꺼진 것처럼 픽 쓰러졌다. 동료들이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어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 가고 순식간에 혼란이 들이닥쳤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어, 어……?”

“땅이……?”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모험자 전원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쓰러진 사람은 호크였다. 과연 대장은 대장이라는 것일까. 그는 무릎이 꺾이는 순간까지 당혹감에 혼란스러워했다.

일 분이 지나자 동굴에 선 사람은 나뿐이었다.

“퉤.”

입안에 침을 모아 바닥에 뱉었다. 혹시 몰라 해독제인 약초를 꺼내 열심히 씹었다. 비장의 수를 마련한 보람이 있었다.

내가 단검을 꺼내 들었다. 바닥에 꺼꾸러진 모험자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푸욱! 푹!

모험자 한 사람을 지나칠 때마다 그자의 목에 칼날을 쑤셨다. 단말마도, 공포도, 경악도 없는 죽음이 이어졌다. 어떤 이는 약발에 저항하는지 연신 신음을 내뱉었다. 신음으로는 칼을 막을 수 없었다. 단검이 목표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헤집었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당신들은 전부 좋은 인간이었다. 그래, 인간이었다. 마왕과 대적하는 종족이었다. 당신들이 살려면 내가 죽어야만 하고, 내가 살려면 당신들이 죽어야만 한다.

이번에는 내가 살았다. 그뿐이었다.

내 발걸음이 호크의 몸뚱어리 앞에서 멈추었다.

“차라리 그냥 돌아갔으면 좋았을 거야. 호크 대장.”

호크의 목을 찔렀다. 근육이 뚫리고 뼈가 긁히는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동굴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은 높았다. 높을수록 맑은 바깥 하늘과 다르게 동굴 천장은 높을수록 어두웠다. 나는 두통이 일어나서 깡통 투구를 벗어던졌다. 뗑그랑, 하고 투구가 동굴바닥에 쇳소리를 내며 굴렀다.

“제기랄.”

나는 제기랄 소리를 연신 내뱉으면서도 모험자의 시체를 일일이 뒤졌다. 값이 나갈 만한 물건을 싸그리 긁어모았다.

언제까지 이딴 짓을 해야 할까. 이 세계에 엔딩은 정말 있는 것일까……. 내 기분을 알았는지 어느 사이에 고블린과 골렘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녀석들은 말없이 그저 주변에 서 있기만 했다.

라피스가 흑사병의 발발을 알려온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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