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4화 (14/510)
  • 00014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필멸자가 숨을 쉬듯 자연만물에도 호흡이 있다. 병도 그와 같아 한 번의 쉼이 있다면 한 번의 날숨이 있어 바야흐로 대륙은 돌림병의 날숨에 휩싸일지니. 나는 그것을 검은 구름이라 부른다.’

    예언.

    고래로부터 마왕의 전매특허로 널리 알려진 능력이다.

    마왕이 신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신탁이라 불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혹은 세계에서 신비가 점차 걷히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마왕의 예언을 믿지 않게 되었다.

    예언 능력을 갖춘 마왕이 적다 못해 사라진 것이다. 마족 학자들은 ‘마왕이 범인보다 뛰어난 지성을 가진지라 앞날을 예견한 것을 예언이라 착각한 것 아니냐’하고 중론을 모으고 있다.

    단탈리안 전하가 예언력을 품고 있다고?

    그럴 리 없다. 라피스의 이성이 곧바로 반론했다. 제아무리 미래를 예견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위압감을 숨기고 있었나.

    라피스는 입안에 침이 고였다. 마왕 단탈리안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그녀를 연신 두들겼다.

    ‘일찍이 수많은 뭉게구름이 대지를 덮고 갔다. 그러나 어느 구름이 모든 대륙을 뒤덮었던가. 거대한 구름, 거대한 재앙이 필멸자들의 역사를 비웃으리라.’

    ‘하옵시면.’

    라피스가 말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말투가 바뀌었다. 단순한 존댓말에서 극존칭으로.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한 명의 고객이 아니라 왕이었다.

    ‘이 대륙에…… 얼마나 많은 피해가 일어나리라 보십니까?’

    단탈리안이 씨익 웃었다.

    ‘조급하구나. 내 너를 혼동시키고자 비유의 수법을 쓰는 줄 알았더냐? 예언이란 아직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언령의 힘을 빌려 지금 현재로 불러들이는 일. 지나치게 정확하게 재현하면 세계의 운명이 그만 흐름을 착각하여 크나큰 재앙이 발생할 수 있노라.’

    ‘소녀가 무지하여 결례를 범했습니다.’

    라피스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용서한다. 작금에 이르러 시간을 관조하는 마왕이 사라졌으니 어찌 예언의 예법을 기억하는 자가 있으랴. 소녀여, 내 말을 새겨들어라. 대륙에 세 개의 화살이 있다면 검은 구름은 그중 하나의 화살을 부서뜨릴지어다. 대륙에 아홉 개의 화살이 있다면 그중 세 개의 화살이 썩어버릴지어다.’

    ‘……!’

    대륙 인종 3분의 1이 전멸한다는 뜻.

    라피스는 등골에 오한이 달렸다. 말이 삼분지 일이지 수천만 명, 아니 아인종까지 합친다면 수억 명이 몰살한다는 애기였다. 농담으로라도 입에 담기에는 피해 수준이 너무 컸다.

    그녀는 단탈리안이 정말로 돌림병을 예언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더 나아가 설령 예언할지라도 작은 돌림병을 지적하는 데 그치리라 생각했다. 전염병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 지금도 대륙 어느 구석에선 전염병이 돌고 있겠지.

    그런 것을 예언이랍시고 꼬집는다면 결과적으로 단탈리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셈이 된다.

    하나 삼분지 일의 인종이 사라진다는 예언이라니? 그것도 두 달 안에?

    거짓말로 삼기엔 지나치게 리스크가 크다.

    막말로 두 달 후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단탈리안은 그녀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다. 변명의 여지 없이. 전담 사무원의 신뢰를 놓친다는 것은 곧 쿤쿠스카 상회 전체의 신뢰를 잃는 것으로 이어진다.

    설마 진실일까.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다. 세상에 천적이 없는 사물이란 없으며 검은 구름도 그러하다. 그 위력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천적은 도리어 보잘것없는 물건인 경우가 잦은바. 여느 산골짜기에서나 피어나는 자그마한 잡초가 검은 구름을 무찌를 수 있다. 나는 그 잡초를 미리 모아두고자 한다.’

    그녀는 바로 마왕의 심중을 이해했다. 독과점. 상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것을 마왕이 바라고 있었다. 독과점을 위한 자금력을 상회에서 빌리고자 함이라.

    ‘두 달 뒤에는 인간계의 왕후장상이 한낱 잡초를 얻기 위해 절규하리라. 그때 나는 약초를 공급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자 하나니. 라피스 라줄리, 내 제안을 숙고하여라.’

    침묵이 동굴에 흘렀다.

    ‘…….’

    라피스의 직감은 마왕이 진실하게 말하고 있다며 경고했다.

    정말로 유례없는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위기는 기회로 치환할 수 있다. 유례없는 위기에 유례없는 기회가 생겨나겠지.

    한편 라피스의 이성은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직감이냐. 이성이냐. 두 갈림길을 면전에 두고 라피스는 한동안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가 간신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오호라.’

    의외로 마왕은 불쾌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 흥미로워했다.

    ‘이유를 읊어보라.’

    라피스는 꼭 발록의 아가리에 들어간 것만 같았다. 거부는 용납한다. 그러나 하찮은 이유 때문에 감히 마왕의 제안을 무시한 것이라면 죽음을 대가로 치르라.

    마왕은 그렇게 눈동자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의 신념을 되새기며, 마왕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또박또박 말해나갔다.

    ‘우선 실제로 돌림병이 발발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선 전염병이 생기리라 지적하셨지요. 또한 대륙 전역으로 돌림병이 퍼져 인종의 삼분지 일이 전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이건 주장이 아닙니다. 근거가 없습니다. 상회에선 예언자에게 돈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상인은 어디까지나 이성적이어야 한다. 라피스는 그리 믿었다.

    만일 신념 때문에 단탈리안한테 죽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 마인에게 죽음이란 언젠가 다가올 흐릿한 미래가 아니라,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위협이다. 라피스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나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까지 마왕이 줄기차게 뿜어내던, 증기와 같은 위압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단탈리안은 다시 조금 전처럼 평범한 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빙긋 웃었다.

    ‘이러면 어떨까. 일단 내가 대출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상회에 알려. 그리고 내가 어떤 사업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상부에 보고해. 돈을 안 빌려줘도 상관없어.’

    이어지는 그의 말은 예상외였다. 애당초 단탈리안은 그녀가 거부하리란 것을 안 모양이었다. 상회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상회의 신뢰를 얻을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라피스는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그래, 정말 예언이 가능하다면 당장 전염병에만 집착할 이유가 없다!

    이 얼마나 무서운 능력인가.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마왕이었다. 그는 예언이라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예언을 이용했다. 라피스, 그녀에게 공포와 신뢰를 심기 위해서.

    그리고 목적이 성취되자마자 곧바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니, 진짜로 평범한 모습일까? 혹시 지금까지 내가 평범하게 여겨온 그 모습 역시――지금 이 순간을 위해 연기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라피스는 자책했다. 뼈아픈 후회였다.

    서열 제71위라서 방심하다니! 마왕은 죽어도 마왕이지 않은가.

    오히려 마왕이 성실했다. 마왕은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칼날을 갈고 있었다. 한순간을 위한 칼날을.

    라피스는 부끄러웠다. 문득, 마왕이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됐다. 자신은 쿤쿠스카 상회에서 형편없는 권력만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내가 마왕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왕의 시선에서 눈을 돌렸다.

    ‘……단탈리안 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라피스는 설명했다. 자기가 얼마나 천한 자인지.

    마왕 역시 자신을 경멸하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 마왕이 자신에게 헛된 기대를 갖고 있다면 지금 터트려주는 편이 좋았다. 나중에 가서 경멸의 눈초리를 받는 것보다…… 인연이 쌓이지 않은 지금 감내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고?’

    ――단탈리안은 달랐다.

    ‘혼혈인 게 뭐 어때서.’

    누구보다 잡종을 혐오할, 지고지순한 마왕인데도 불구하고.

    ‘그딴 거 신경 쓰지 마.’

    그런 것은 아주 하잘것없는 문제라고 단언했다.

    라피스가 멍하게 마왕을 쳐다보았다.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던가. 생애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접근하던 이들도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 떠나갔다. 예외는 없었다. 지난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남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별을 생각해야만 했던 삶이었다.

    언제나 듣기를 원한 말, 이제 포기해서 무의식에나 비틀어진 형태로 남게 된 열망이었다.

    그것을 마계에서 가장 드높은 존재에게 들었다.

    아――.

    라피스는 전에 없이 마음이 요동쳤다. 자신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상인은 약점이 잡히면 끝이다. 그러니까 얼른 던전에서 빠져나왔다. 자기가 뭐라고 변명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무실에 돌아와서 천장만 바라보았다. 좀처럼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잘된 일이다, 단탈리안 마왕이 원래 저렇게 뛰어난 자였다면 자신도 출세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앞으로 성심성의껏 마왕을 대접해야 한다, 라고 끊임없이 스스로 되새겼지만…… 그 어느 것도 지금의 감정을 뒤덮지는 못했다.

    결국 라피스는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상한 마왕.”

    그래도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라피스는 오늘은 이상한 날이라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상부에 보고할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서류는 마왕 단탈리안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을지 모른다는 문장으로 출발했다.

    「철광석(2개)을 채취했습니다.」

    “아싸, 또 두 개다!”

    그 와중에 어느 마왕은 곡괭이를 열심히 휘두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  *  *

    라피스에게 으름장을 놓은 지 두 달이 흘렀다.

    던전에는 대략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모험대가 쳐들어왔다.

    아직 게임 초반이라서 그럴까. 모험대는 죄다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졌다. 랭크도 하나같이 F급. 여기가 제대로 된 던전이었다면 F급 모험대는 입구를 넘는 순간 전멸했겠지.

    물론 내 마왕성, 차마 마왕성이라 자칭하기도 부끄럽고 민망한 던전은 제대로 된 곳이 아니었다. F급 모험대 하나하나가 생명의 위험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현재 절찬리에 바닥에 누워 있다.

    “어? 이봐,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

    “정말이잖아. 이보게나. 정신 차리게!”

    모험자가 다가와서 내 뺨을 두들겼다.

    내가 신음했다.

    “으으, 무울……물…….”

    “쯧! 탈수증에 걸렸군.”

    얼굴에 물이 쏟아졌다. 누군가가 물주머니를 내게 부은 것 같았다. 싸구려 투구의 틈새로 물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한여름의 개처럼 혀를 내밀어 정신없이 물을 핥아마셨다.

    “으, 으으. 가, 감사합니다.”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돕고 살아야지. 여보게. 어쩌다 이리됐나?”

    “그것이.”

    마음속으로 스킬을 외쳤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집니다.」

    “제가 던전에 들어온 것은 아마도 사흘 전입니다.”

    이후로 나의 구질구질한 사정이 이어졌다.

    나는 잘센 마을의 한센이다, 마을사람과 함께 던전을 들어왔는데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그만 동료가 뿔뿔이 흩어졌다, 길잡이 동료가 초장에 죽은 바람에 던전에서 미아가 되었다, 사흘 내내 밤낮으로 동굴을 헤매다가 도저히 몸이 견딜 수 없어서 쓰러졌다…… 내가 들어도 기막힌 연기 솜씨였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다.

    “흑, 너무 안타까운 사연이야!”

    “이토록 처절하디 처절한 이야기는 난생처음이로군.”

    “으허헝. 청년, 부디, 부디 좌절하지 말고 살아가게나. 아무리 지랄맞은 세상이더라도 볕 들 날이 오지 않겠나. 우리 미래를 믿읍세! 암, 믿어야 하고말고.”

    동굴 안이 눈물의 도가니가 되었다.

    모험자들은 평생을 햇볕과 뒹굴어 얼굴이 투박했다. 그런 갈색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시냇물처럼 흘렀다. 모험자들은 코를 팽 풀고 콧물범벅이 된 손바닥으로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으엑.

    ‘정말 연기에 약하네.’

    잘센 마을 모험대도 이만큼 연기에 허약하진 않았다.

    하긴, 나는 지금 투구를 쓰고 있다. 마왕의 증거인 뿔이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이 마왕이냐 인간이냐 하는 차이는 아무래도 거대하겠지. 나는 모험자들 호감도가 올랐다는 알림창이 연달아 뜨는 것을 보면서 납득했다.

    “청년. 아니, 어린 친구. 여기 던전에 대해 몇 가지 좀 물어봅세.”

    ============================ 작품 후기 ============================

    왜 갑자기 위압감이 사라졌는가.

    라피스가 명확하게 '거부'를 하자 연기스킬에 '실패판정'이 뜨는 바람에 스킬효과가 사라진 것이지만……허허. 우리 라피스 양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죠. 착각은 자유입니다.

    선추코 날려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