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13화 (13/510)

00013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흠.”

내가 왼발로 땅을 두어 번 두들겼다. 오른발이 망가져서 며칠 쓰지 못하자 생겨난 버릇이었다. 그다지 보기 좋은 버릇은 아니었다.

나는 상대방의 거부를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하지만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투로 말했다.

“왜지?”

“우선 실제로 돌림병이 발발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선 전염병이 생기리라 지적하셨지요. 또한 대륙 전역으로 돌림병이 퍼져 인종의 삼분지 일이 전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건 주장이 아닙니다. 근거가 없습니다. 상회에선 예언자에게 돈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래, 예상한 난관이다.

내가 게임의 설정을 알고 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걸로 다른 사람을 납득시키고 설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상상해보라. 누군가가 두 달 안에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 발생할 거고 그 때문에 대륙의 인종 절반이 죽어버린다고. 당장 반란을 선동하는 자로 몰려 잡혀 들어가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내가 라피스의 입장이었더라도 결코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야.’

그렇다고 이 기막히게 좋은 정보를 썩히면 천하의 멍텅구리이다.

내가 옅게 미소 지었다.

“이러면 어떨까. 일단 내가 대출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상회에 알려. 그리고 내가 어떤 사업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상부에 보고해. 돈을 안 빌려줘도 상관없어.”

“예?”

“나는 당장 급전으로 빌릴 수 있는 1000골드만 대출할게.”

“단탈리안 님, 급전은 이자가 무척…….”

“어마어마하게 높겠지.”

상관없다.

“이번에 상회가 돈을 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 말대로 전염병이 확산되면 그제야 상회에서 깨닫겠지. 나 단탈리안이 정말로 정확한 사업을 구상했다는 것을. 그럼 나에 대한 상회의 관심도가 부쩍 높아질 거야.”

아깝지만, 전염병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단념한다.

대신 쿤쿠스카 상회의 신뢰와 기대를 얻는다. 마왕 중에는 때때로 예언력을 타고나는 경우가 있다. 쿤쿠스카 상회에선 ‘어쩌면 단탈리안 마왕이?’하고 생각하게 되겠지. 그 오해 어린 신뢰를 바탕으로 다음 기회, 전염병 다음에 찾아올 대흉년을 노린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단탈리안 님께선 마치――.”

라피스가 제법 격하게 말했다.

“마치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조리 아시는 듯한 말투입니다. 진실한 예언가인지 희대의 도박꾼인지, 저로서는 판단하기 어렵군요.”

나는 빙긋 웃었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오해는 내버려두는 편이 좋다. 상대방이 알아서 날 과대평가 해준다니 고맙지 않은가. 상대가 돈을 빌려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더더욱.

“…….”

라피스가 내 시선을 피했다.

어라? 그녀가 눈길을 회피하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피스는 언제나 날 똑바로 바라보고 얘기했다. 지금 그녀가 혼란스러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상태창으로 심리상태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심리상태가 비출 만큼 그녀는 호감도가 높지 않았다.

지난 보름 내내 호감도를 올려보려 애교도 앙탈도 부려보았지만 라피스는 난공불락이었다. 잘센 마을의 수컷들 호감도를 올리는 게 엄청 쉬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난이도가 무지막지했다. 마계(魔界) 대표의 차도녀라고 불러야 할까.

“단탈리안 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상회에서 가진 발언권은 크지 않습니다. 아니, 무척 적습니다. 그래서 설령 단탈리안 님께서 확실한 사업 아이템을 갖고 계셨더라도 어차피 상부에서는 제 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거야 뭐. 5급 직원이라면서.”

말단인데 당연히 발언권이 적겠지.

라피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5급 직원마라도 최소한의 발언권과 재량권은 갖기 마련입니다. 쿤쿠스카 상회는 철저히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회사. 사원의 능력을 시험한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직원에게 많은 재량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호. 그럼 너도 어느 정도는 재량껏 돈을 융통할 수 있겠네?”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응?

“저에겐 최소한의 재량권밖에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상회에서 이단적인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상사와 동료는 저를 좋지 않게 생각하지요.”

“의외인걸. 라피스는 무뚝뚝하긴 해도 무척 유능해 보이는데. 사교성이 떨어져서 그런가?”

순간 라피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내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아, 실력주의라니까 그게 이유의 전부이진 않겠구나.”

“단탈리안 님도 알다시피 우리 마족은 본디 개인주의자입니다. 사교성은 권장할 만한 덕목이 아니지요. 저희의 가치는 실력과 성과입니다.”

라피스가 단언했다.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꽤 높은 것 같았다. 어휴, 차도녀 같으니.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내두르다가 문득 의문이 짙어졌다.

“잠깐, 그럼 더 모르겠는데. 왜 네가 고립되었다는 거야?”

“……저는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니까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라피스는 그 한마디만 내뱉고 싹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걸로 전부 설명했다는 것처럼.

내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래서 어쨌다고?”

“……네?”

“아, 그게 끝이야? 마족이랑 인간의 혼혈이라고. 신기하네.”

던전 어택에도 마족과 혼혈인 인간 히로인이 한 명 있었다. 로우메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마법사로 인간사회에서 경원시했다. 아무래도 다른 종족의 핏줄이 섞인 자는 배척되기 쉬웠다.

흑사병이 퍼진 이후로 마족에 대한 인간의 적개심이 극에 달하기도 하고. 하지만 아직은 마족과 인간 사이에 뭔가 대단한 원한이 생기지 않은 시대이다. 라피스도 아주 심하게 따돌림 당하지는 않고 있겠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혼혈인 게 뭐 어때서. 원래 인간이든 마족이든 자기와 조금 다르다 싶으면 싫어하고 따돌리고 그래. 근본적으로 유치한 짓거리지. 그딴 거 신경 쓰지 마.”

라피스가 멍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것 역시 처음 겪는 눈빛이었다. 오늘따라 라피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구나 싶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사무실로 돌아가서 단탈리안 님께 전해드릴 급전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상부에 내 계획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말고.”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라피스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발밑에서 연분홍색 마법진이 빛났다.

빛이 안개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몸이 사라졌다. 아마 마계로 돌아간 것이겠지. 라피스는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허리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음, 믿음직스럽군. 좀 고지식하긴 해도 예의가 바르고 좋은 아이다.

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곡괭이를 잡자, 불쑥 효과음이 귓가에 울렸다.

「하급 서큐버스 라피스 라줄리의 호감도가 15 오릅니다.」

“엥?”

입에서 절로 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동안 죽어라 올리려 해도 요지부동이던 호감도가 왜 갑자기 오른다는 말인가. 내가 무슨 말을 했나 천천히 되짚었지만, 도대체 어떤 대사가 라피스의 심장에 적중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참 낑낑거리며 고민하다가 이내 곡괭이를 들어올렸다.

“에라이, 일단 광석이나 파고 보자.”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내게 나쁜 일도 아니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동굴을 걸었다.

그나저나 라피스는 서큐버스였구나. 기본적인 상태창에는 종족도 표시되지 않아서 몰랐다.

*  *  *

분홍빛 안개가 라피스를 휘감다가 흩어졌다.

라피스가 생각했다. 마족에게 마법진의 색은 종족을 의미했다. 켄타우로스는 회색, 벰파이어는 붉은색. 그녀의 어미와 같은 서큐버스는 짙은 선홍색. 그러나 그녀 자신은…….

‘한없이 옅은 연분홍색이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이 허름했다. 단정하고 깨끗하지만 장식품 하나 없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책상이 유일한 사치품이라면 사치품이었다.

여기가 상회 지부에서 라피스에게 배정한 사무실. 상회에서는 5급 직원마부터 개인 사무실이 지급되었다. 이 작은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라피스는 수십 년 동안 수습 직원으로 고생했다.

라피스가 의자에 앉았다. 책상에 수십 묶음의 서류뭉치가 쌓여 있었다.

그녀가 담당하는 고객은 마왕 단탈리안 한 명이 아니었다. 주문은 언제나 넘쳐흘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다른 고객의 주문 따위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왕은 마왕…… 이라는 걸까.’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

첫인상은, 솔직히 영 미덥지 않았다.

‘그, 그런데…… 난 돈이 없는데.’

‘그렇습니까.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의 총재산은 얼마인지요?’

‘406골드.’

마왕은 단순히 조금 강한 개인이 아니다.

마족 중에서 유일하게 군단을 보유할 수 있는 자들이다. 몬스터의 심리를 장악하고, 읽어내고, 그리하여 언제나 투쟁과 배신이 끊이지 않는 마계에서 유일하게 통합을 이루어낸다. 마왕에겐 남다른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그런 기준에서 단탈리안은 확실히 낙제생이었다.

‘단탈리안 님, 던전에 몬스터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한 마리.’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존댓말까지 썼다. 마왕이 한낱 서큐버스에게 경어를 쓰다니, 다른 마족이 들었다면 웃겨서 바닥에 뒹굴어댈 이야기였다.

가끔 서열이 낮은 마왕보다 강력한 마족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마족조차 마왕에게는 경의를 표한다. 마계를 다스리고 재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마왕이므로.

본사에서 마왕 단탈리안을 담당하라고 지령이 내려왔을 때 라피스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5급 직원마 따위로 썩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마왕을 내 고객으로 만든다. 반드시.’

라피스가 무표정한 까닭은 어린 시절 겪은 비극과 따돌림에서 비롯했다. 변화 없는 얼굴 아래 그녀는 누구보다 치열한 권력욕과 복수욕을 감추고 있었다.

마계에서 인간과 핏줄이 뒤섞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약점이었다. 무력과 계략을 신봉하는 마족에게 있어 ‘허약한 인간에게 임신당해 낳은 아이’라는 꼬리표는 치명타로 다가왔다.

마인의 수치.

라피스가 백 년 남짓한 삶에서 제일 많이 들어본 단어였다. 질척한 열등감이 언제부터인가 딱딱하게 굳어져 그녀의 얼굴을 가면처럼 덮었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 실례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볼품없는 던전은 제 짧은 마생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마왕 단탈리안의 실상을 깨닫고 그녀가 얼마나 실망했던가.

솔직히 놀랍지도 않았다. 역시 그렇구나, 하는 감상이 먼저 들었다. 상회에서 자기 같은 혼혈 잡종에게 대업을 맡길 리 없었다. 제멋대로 기대한 자기가 어리석었다.

단탈리안과 대면한 직후에 라피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고객은 고객이다.’

라피스는 한순간이나마 고객를 신분상승의 도구로 여긴 것을 반성했다. 그녀는 본성이 성실했다. 사적인 기대를 전부 접어버리고 그녀는 단탈리안의 주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철 마석(魔石)처럼 보잘것없는 물품을 거래할 때도 일일이 마왕성에 찾아갔다.

마족의 삶은 수백 년이 넘는다. 지금 힘든 상황에 처했다지만 언제 처지가 달라질지 모른다.

조급함을 억누르고. 다급함을 잊고. 차근차근,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가 될 날이 오리라.

정말 그걸로 만족하겠느냐? 그런 반문이 심장의 구석 부근에서 올라왔지만 억지로 쑤셔 집어넣었다.

“……오늘은 달랐어.”

라피스가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그녀는 방금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마왕성을 찾아가니 단탈리안은 고블린과 놀아나고 있었다.

도대체 위엄이란 단어를 알기나 하는 걸까. 일개 고블린을 그렇게 귀여워하는 마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서열 제12위 마왕인 시트리 전하가 그 특유의 성적 취향으로 고블린들을 노리개로 삼는다는 소식은 들어봤지만.

‘돈을 대출하실 의향이 있다고요?’

‘그래.’

게다가 오늘은 어리석은 소리까지 해댔다. 돈을 빌리겠다니.

확실히 광석 따위를 파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급전을 빌리는 건 시대를 막론하고 무지의 극치에 달하는 행동이었다.

라피스는 고블린에게도 상냥한 이 이상한 마왕 전하에게 그녀 나름대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설득했다. 관두라고. 쿤쿠스카 상회가 어느 정도로 악독한지도 설명해주었다. 다행히 마왕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전염병.’

분위기가 급전한 것은 그때였다.

라피스는 동굴의 공기가 바뀐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 연못처럼 고요하던 공기가 갑작스럽게 야밤의 파도처럼 몰아쳤다. 긴장감이 등골을 휘감았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라피스가 아니었다면 크게 당황했으리라.

‘……전염병, 입니까?’

그런 라피스조차 단어를 끊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짓눌렸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칭찬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상대방이 어떤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마왕은 대담하게 미소 지었다.

‘내 예언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어린 마족의 소녀여.’

말투가 달라졌다. 단탈리안 전하가 저리 진중하게 말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저것이 원래 말투처럼 느껴졌다. 라피스는 차마 반문할 생각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마왕이 선언했다.

‘검은 구름이 대륙을 덮을지어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내, 대륙의 모든 인간이 절망과 비탄에 빠지리라. 이것은 마왕의 예언일진저!’

라피스의 가슴이 덜컥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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