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마음이 진정하는 데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근처의 너른 바위에 앉아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라피스에게 이미 볼꼴 못 볼꼴 다 보여준지라 허세를 부릴 건더기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진지해지고 싶었다.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라피스가 내 얘기를 듣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내게 상대방의 감정이 전해지는 능력이 없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살짝.
“돈을 대출하실 의향이 있다고요?”
“그래.”
쿤쿠스카 상회에선 은행 업무를 겸했다. 마왕에게도 급전이 필요했다. 그런 경우 상회에서 돈을 빌려주었다.
보름 내내 광석을 파내면서 내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언젠가 모험자의 도끼날에 비명횡사할 게 뻔하다!
하루에 2골드라니. 백날을 쉬지 않고 일해본들 200골드밖에 벌지 못한다.
200골드로는 최하급 골렘은커녕 고블린조차 살 수 없다. 뼈 빠지게 곡괭이를 휘둘러야 간신히 고블린을 더 고용한다는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겨우 골렘과 고블린 두 마리로 던전을 지켜낸다고?
‘불가능하다.’
모험자들은 호시탐탐 던전을 노린다. 원수가 되어버린 리프 일행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언제 모험대가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다. 한가하게 곡괭이질로 돈이 쌓이기를 기다릴 수 없다.
나는 차라리 큰돈을 대출해서 차근차근 이자를 갚아나가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자뿐만이 아니라 단번에 원금을 갚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라피스는 조용히 거부의 뜻을 말했다.
“단탈리안 님, 많은 마왕이 저희 상회의 돈을 빌렸습니다. 그중 이자만 겨우 갚아나가는 마왕도 적지 않습니다. 이자는 매달 꼬박꼬박 쌓이는데 반해서 던전의 수익은 비정기적이기 때문이지요.”
라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던전의 최대 수익원은 역설적으로 던전에 침입하는 모험자입니다. 모험자가 강할수록 던전의 수익도 늘어나지요. 강한 모험자는 필연적으로 좋은 무구와 값비싼 아이템을 가지기 마련이고, 마왕은 그걸 약탈할 수 있으니까요. 반대로 말해 질 낮은 모험자밖에 오지 않는 던전은 수익 또한 별 볼 일 없습니다.”
“…….”
“무엇보다도 상회에서 많은 돈을 빌려줄지도 의문입니다. 쿤쿠스카 상회는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는 곳. 같은 마족도 혀를 내두른다는 냉혈한 집단입니다.”
라피스가 재차 강조했다.
“확실하게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 시엔 제아무리 마왕이 대출을 요청할지라도 단호히 거부합니다.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 마왕의 격은 곧 신용의 격. F급이신 단탈리안 님을 쿤쿠스카 상회에서 얼마나 신뢰할지 의문입니다.”
“그렇겠지.”
“상회는 다수의 경호 부대를 고용하고 있고, 언제든 더 많은 부대를 고용할 재력이 있습니다. 대출금의 이자를 내지 않는 마왕에게 상회는 무자비합니다. 실제로 협박과 강요가 실행된 전례도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서열 제25위 마왕인 글라샬라볼라스 각하가 10만 골드를 대출했다가 70년 동안 이자를 납부하지 않자, 쿤쿠스카 상회에선 자그마치 36개의 마족 군단을 동원하여 글라샬라볼라스 각하의 던전을 침공했습니다. 마왕의 몬스터 부대는 패퇴했고 결국 글라샬라볼라스 각하는 70년 동안 밀린 이자를 전부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분의 던전은 파산했습니다.”
라피스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이 쿤쿠스카 상회의 힘입니다. 지난 삼천 년 동안 마계 제일의 상회로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지요. 단탈리안 님, 지금 저는 상회의 일개 직원마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족으로서 조언하고 있습니다. 섣부르게 상회의 돈을 빌리지 마십시오.”
상대방의 진심이 마음으로 전해졌다.
이 소녀는 정말로 내 제안을 어리석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냉혹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나를 속여서 대출을 받게 하는 편이 그녀 본인의 영업 실적에는 도움이 되리라.
푼돈을 빌려주어 마왕 한 명을 꽉 사로잡는 편이 상회의 이익에 부합할 것인데도, 라피스는 나에게 사기를 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성적과 조직의 이익을 외면했다.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인내하세요. 지금은 힘들지만 100년, 200년 차근차근 돈을 모아나간다면 단탈리안 님도 반드시 멋진 던전을 이룩해낼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라피스 라줄리. 싸늘한 표정과 말투, 그리고 사무적인 태도를 가진 마족.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녀는 순수했다. 순수한 신념으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 라피스이기에 나는 더더욱 의견을 밀어붙였다.
“만일 나한테 확실히 성공할 사업 제안이 있다면?”
“…….”
소녀가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물론 저희 상회에선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단탈리안 님께서 확실한 사업 아이디어를 갖고 계시다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요, 라고 그녀는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전염병.”
“……?”
라피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요?”
좋아, 관심을 가졌다.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연기 스킬 발동.’
눈앞에 알림창이 줄줄이 떠올랐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 효과가 스킬에 부가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집니다.」
튜토리얼 보상으로 얻은 연기 스킬. 이건 말 그대로 연기 실력을 높여주는 기술이다.
일정 확률로 상대방의 의심을 ‘경미하게, 다소, 많이, 대폭’ 낮춘다. 지금은 내 지력과 정치력이 쥐꼬리보다 형편없어서 기껏해야 경미하게 의심을 흐트러트린다.
어떤 종류의 스킬이 보상으로 떨어지는가는 튜토리얼에서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 같았다.
만약 튜토리얼을 무력으로 정면돌파했다면 천리행(千里行)이나 만인적(萬人敵)과 같은 스킬이, 계략으로 교묘하게 공략했다면 십면매복(十面埋伏)이나 팔진법(八陣法) 따위의 스킬을 얻었겠지.
예컨대 천리행은 캐릭터의 무력을 꽤나 긴 시간 동안 140% 높여주는 기술이다. 원래 던전 어택 게임에서 내 용사 캐릭터가 가진 스킬이기도 하다.
또한 팔진법은 캐릭터가 속한 파티 전체를 복병으로 만들 뿐더러 파티원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25% 올려준다. 어느 쪽이든 사기 스킬이라 평가받는다.
젠장할, 그에 반해 연기 스킬은 쓰레기다.
우선 전투와 직접 연관이 없다. 던전 어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코 전투이다. 이 점에서 벌써 연기 스킬은 낙제점을 받는다. 더욱이 상대방을 완벽하게 속여내지도 못한다! ‘다소’라느니 ‘많이’라느니 아주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이 제시될 따름이다.
애당초 스킬이 중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바로 ‘언제든지 믿음직스러운 효과를 발휘한다’라는 점에 있다. 항상 예상되는 효과를 발휘해주고, 그리하여 ‘아, 이때 이 스킬을 쓰면 이렇고 저렇게 되겠구나’ 하고 계획을 짜게 만들어준다.
언제 어느 정도의 효과가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는 스킬이라고?
웃기지도 않는다. 차라리 능력치를 조금이라도 높여주는 편이 나았다.
언젠가 던전 어택 팬사이트에서 연기를 비롯해 몇몇 스킬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적군의 지력을 저하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던전 어택에 따로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플레이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각에선 스킬 개수를 255개로 맞추기 위해 명목상 집어넣은 것 아니겠냐는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연기 스킬이 정확히 무슨 효과를 가져오는지 모른다. 이런 스킬이 게임에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던전 어택의 폐인 중 폐인인 나조차 생소한 쓰레기 기술. 그것이 연기였다.
‘뭐, 개미 발톱에 낀 때만큼은 도움이 되겠지.’
그냥 거기에 스킬이 있으니까 썼을 뿐.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나는 라피스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두 달 안에 인간계에서 전염병이 나돌아.”
잘 이해되지 않았는지 라피스가 꽤 오래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감정이 전달되었다.
“……전염병, 입니까?”
“검은 죽음(黑死病)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지. 제국력 1505년, 즉 올해 여름부터 대륙에선 전무후무한 사상자가 발생할 거야.”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건 던전 어택 세계관의 설정이었다.
작중 캐릭터가 용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연도, 즉 게이머가 플레이를 시작하는 연도가 제국력 1515년. 그보다 딱 십 년 앞서 흑사병이 온 대륙을 쓸어버린다.
북쪽 대륙부터 시작한 전염병은 순식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진다. 불과 수 년 사이에 대륙 인구의 20%에 달하는 인간과 엘프, 아인종이 병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여기에 대흉년까지 이어진다. 자그마치 십 년 내내 흉년이 지속된다. 농사지을 사람들이 다 병에 걸려버리고 지하수마저 병에 감염되니 농사가 잘되려야 될 수가 없겠지. 대륙의 인종은 비탄에 빠진다.
그리고 모든 원인을 마왕한테 돌린다.
마왕이 전염병을 불러일으켰고 흉년을 퍼트렸다는 식이다.
물론 진실이 아니었으나, 지식수준이 중세에 머무는 이 세계관의 사람들은 그 말을 확고하게 믿게 된다. 마족이 비교적 전염병에 의한 피해가 적었다는 것도 의심의 원인이다. 마족은 원체 환경이 험한 마계에서 태어나다 보니 면역력이 강했다. 그게 공교롭게도 마족이 퍼트린 질병이라 마족한테는 무해한 거라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인간들은 대륙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지상에서 모든 마왕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던전을 공략하라!’
바야흐로 대모험 시대. 조금이라도 창질을 할 줄 아는 이라면 너도 나도 던전에 몰려드는 시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던전 어택의 설정이다. 특히나 주인공 용사는 유년 시절 마왕의 약탈 행위에 부모를 잃은 자로서 누구보다 마왕을 증오한다. 이 증오도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진실을 깨달으면서 점차 희석되지만…… 음, 지금이랑 상관없는 얘기로군. 게임인 주제에 세계관이 시궁창이라서 골수팬을 만들어내기도 했지.
중요한 건 이거다. 이 세계에는 흑사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이 존재한다.
흑색 허브라고 불리는 약초인데, 내가 살던 현대에서 대략 더덕보다 조금 더 희귀한 식물이라 보면 된다. 요컨대 별로 희귀하지 않다.
다만 전염병이 발발한 초기에 흑색 허브가 특효약이란 게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마구잡이로 블랙 허브를 채취했다. 그 바람에 종자가 어마어마하게 귀해진다.
뒤늦게 국가 차원에서 흑색 허브를 관리해서 재배하기 시작하나 사태는 이미 언 발에 오줌 누기. 수확되는 양이 전염병 환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부족해진다. 결국 한 세기만에 대륙의 인종은 자그마치 절반으로 격감한다.
‘오해와 무지, 성급함이 겹쳐서 만들어낸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지.’
잔인하다 말할 수 있겠으나…… 내가 떨어진 시간대가 때마침 대륙력 1505년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환호했다. 얼마나 기뻤는지 멀쩡한 다리 한 짝으로 방방 뛰었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설정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곧 유례없는 대전염병이 대륙을 휩쓴다. 흑색 허브가 전염병에 특효약이다. 이건 오로지 나밖에 모르는 정보야!’
세상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뒷산에서 나는 흑색 허브, 평범한 질병엔 아무런 소용도 없고 질기기만 해서 음식으로 써먹을 수도 없고, 향신료로 쓸 수도 없는 이 보잘것없는 식물이 사상 최악의 전염병에 유일무이한 특효약이라고.
흑색 허브는 흑사병이 나돌기 전에는 이름조차 없는 잡초였다. 흑사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나중에야 흑색 허브라고 불린다. 흑색 허브의 효능이 발견되는 것도 흑사병이 대륙 전역에 퍼지고 몇 년이 흐른 뒤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 흑색 허브를 사재기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이득을 올릴 수 있어.’
분명 잔인한 짓이다. 내가 캐내게 될 흑색 허브가 원래대로라면 누군가를 구할 테니까.
그러나 내게는 설령 현실의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지라도, 게임 속의 인물들보다 나 자신이 소중했고, 골렘과 고블린이 귀중했다.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하여 던전을 비약시킬 기회를 잃어버릴 만큼 나는 착하지 못했다.
“나는 전염병의 특효약을 알고 있지. 그걸 미리 독점해두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어.”
우리 둘은 한동안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전염병이 퍼지리라 확신하느냐, 특효약의 정체는 어쩌다 알아냈느냐, 그런 대화였다. 나는 내가 아는 바에 적당히 살을 붙여서 거짓말했다.
자아, 라피스 라줄리. 어떻게 나올 거냐.
“…….”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이윽고 그녀의 연한 입술이 열렸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라피스는 눈동자에 망설임이 없었다. 단호한 거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