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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8화 (8/510)
  • 00008 약하게 뉴게임  =========================================================================

    잠시 후.

    “이제, 후욱. 안전합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내가 말했다.

    “크흠.”

    “커흠….”

    모험자들은 태도가 부쩍 조심스러웠다. 당장 금화를 먹어삼킬 것 같던 아까 전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그들은 너가 먼저, 아니 댁이 먼저, 하고 차례를 양보하고 있었다. 나는 웃음보가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에라이! 겁쟁이들 같으니라구.”

    이내 대장격인 리프가 나섰다.

    “거 아랫도리에 물건은 뭣하러 붙이고 다니냐! 콱 그냥 볼기짝에 도끼를 쑤셔버릴까 보다. 내 이런 놈들이랑 던전을 공략하겠답시고 의기양양했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그가 으르렁거렸다.

    “게다가 너, 애꾸눈. 너 임마 나랑 같이 다닌 지 몇 년인데 지금 애송이들 사이에 숨어 있어? 얼씨구. 어째 상판떼기는 아직까지 멀쩡하십니다?”

    “리프, 그게 나도 흑마법은 처음인지라….”

    “그럼 엄미 자궁 비집고 나온 건 처음이 아니라서 그리도 능숙했다냐? 세상에 처음 아니었던 게 어디 있어! 어디서 선배가 쫄아서는, 쓰읍.”

    리프는 모험자들을 일일이 노려보고 주저없이 금화더미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한 웅큼 금화를 쥐었다. 그가 동료들을 뒤돌아보았다.

    “봐라! 여기 어디 저주가 있는지. 새끼들…….”

    리프가 히죽 웃었다. 곰처럼 생긴 면상이 야비하게 미소까지 지으니 깡패가 따로없었다. 모험자들은 리프의 행동에 기가 죽은 듯 이리저리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렸다.

    반면에 나는 웃음을 참느라 무진장 애썼다. 호감도가 일정 이상 오른 탓인지, 내 눈에는 리프의 상태창에서 그의 심리가 표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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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리프

    종족: 인간   소속: 잘센 마을

    속성: 중립(-15)

    레벨: 3    명성: 2

    직업: 나무꾼(B), 농사꾼(D), 모험자(F)

    통솔: 15  무력: 30  지력: 4

    정치: 2   매력: 6   기술: 21

    호감도: 21

    현재심리: ‘아오 썅, 간뎅이 떨어지는 줄 알았네……난 세상에서 마법이 제일 싫어! 어우, 아직도 다리가 후달거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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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핫!’

    리프 역시 마법이란 단어에 벌벌 떠는 저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모험대의 대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나섰을 뿐이었다. 굳이 자존심을 세우는 성격이라고 할까. 그나저나 이거 참, 단탈리안만큼 초라한 능력치였다. 아마 게임으로 치자면 이 모험자들을 격퇴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튜토리얼이 아닌지 싶었다.

    모험자들이 은근슬쩍 금화더미에 다가왔다. 리프가 코웃음쳤다. 그들은 멋쩍어 하면서도 탐욕의 눈길로 금화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더 챙길까봐, 모험자들은 서로가 보는 앞에서 금화 하나하나를 새기 시작했다.

    리프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흘려보냈다.

    “흐, 489골드로군.”

    모험자들이 재화를 십오등분하여 32골드씩 챙겼다. 나는 여기 물가를 몰라서 32골드가 어느 정도로 막대한 재산인지 감이 안 왔으나, 사람들 얼굴에 화색이 만연할 것을 보아하니 '단단히 한몫 잡았다' 정도는 되는 듯했다. 나누기가 딱 떨어지지 않아 9골드가 남았는데 당연하다는 것처럼 리프가 쓱 챙겨갔다. 몇몇 사람이 그게 불만이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무도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벌써 기세에서 밀려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바쁜데 실례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어어, 말해봐.”

    모험자들이 건성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금화를 가방이나 신발에 집어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떤 이는 바지춤에 금화를 한 웅큼 쑤셔넣기도 했다. 우엑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짓이었지만 난 덤덤하게 할 말만 전했다.

    “여러분과 제가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금 막 또다른 모험자 파티가 던전에 들어왔어요.”

    사람들의 분주한 손길이 멈췄다.

    “뭐?”

    “몬스터가 없어서 그런지 빠른 속도로 마왕방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시간만에 도착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애꾸눈이 별명인 모험자가 소리쳤다.

    내가 개의치 않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여러분도 보셨다시피, 저는 던전과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던전의 주인이니까요. 골드를 소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입니다. 제게는 경보 마법도 있습니다. 요컨대…….”

    일부러 말끝을 살짝 끌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안타깝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던전에 침입해오면 저절로 제게 알려주는 마법이지요. 방금 경고가 울렸습니다. 총 스물다섯 명의 모험자가 제 던전에 들어왔군요…….”

    모험자들이 동요했다.

    *  *  *

    “와. 부장님, 이 플레이어 특이하네요. 쪼옵.”

    금발의 미청년이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그가 다른 한손으로 사과주스팩을 쫍쫍 소리 내며 빨아마셨다.

    미청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여인이 ‘앙?’ 하고 반문했다. 여인은 의자에 몸을 파묻히고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녀는 한창 만화책에 빠졌는지라 미청년의 방해가 달갑지 않았다.

    “누군데?”

    “그 있잖아요. 부장님이 열 받아서 치어받았다던 인간.”

    “아, 로리라떼?”

    여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며칠 전 일을 생각하니 불쑥 화가 치밀었다.

    “그놈이 변태긴 변태지. 자그마치 바알의 마왕성을 공략했거든.”

    “바알의 대마왕성이요? 던전 어택?”

    청년이 대경실색했다. 바알의 대마왕성이라면 자신도 깨보지 못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사실 깨라고 만들어놓은 던전이 아니니 당연했다.

    “세상에, 특급 플레이어잖아요!”

    “특급은 무슨. 재수없는 새끼야.”

    여인이 만화책을 덮었다.

    “감히 중역 개발자인 나에게 시스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불평하지 뭐야. 꼴이 같지 않아서 확 한방에 보내버렸지.”

    “설마… 부장님, 계약도 안 하고 플레이어로 만드신 건 아니겠죠?”

    “허, 강아지가 호랑이 걱정하네. 내가 장사 한두 번 해보냐.”

    그녀가 비릿하게 웃었다. 청년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거, 저렇게 웃을 때마다 뭐 일 하나 터지는데……그때마다 고생하는 것은 억울하게도 저 여자가 아니라 나인데……. 불행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고 했던가. 여인은 청년이 제일 바라지 않았던 대답을 내놓았다.

    “당근 야매로 통과시켰지.”

    “비리다……엄청난 비리를 태연하게 저지르는 사람이 여기 있어…….”

    청년은 머리통이 아파왔다. 그의 상사는 무척 유능했지만 때때로 이성을 잃곤 했다. 솔직히 말해 매우 자주 잃었다. 그리고 그녀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와야 하는 사람이 청년이었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생각해보면 그랬다. 사건은 어제 일어났다. 평소처럼 부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흥분해서 네 시간이 넘게 키보드를 두들기는 것 아닌가? 또 시시한 키보드배틀이나 하는 것이겠지, 하고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우씨! 짜증나!’

    부장이 벌떡 일어서서 괜히 멀쩡한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한참이나 괴상한 목소리로 ‘끄으으응’ 하고 신음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키보드로 두들기고 냉큼 사무실에서 나갔다.

    부장은 십 분만에 돌아왔다. 또 뭔 사고치고 돌아왔수, 하는 청년의 눈빛에 여인이 해맑게 웃었다. 어딘가 상쾌해졌다는 얼굴로.

    ‘일하고 왔어.’

    꼭 오 년 동안 고생한 변비가 싹 뚫린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환생트럭――부장의 애차로써 부장 본인이 붙인 이름이다. 청년은 개인적으로 부장의 네이밍 센스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다.――으로 사람 한 명을 보내버렸지 뭔가.

    금발의 청년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성격이 저 모양이니 본사에서 좌천됐지.’

    개발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면 뭐하누. 성격이 멍멍이가 형님! 하고 넙죽 엎드릴 만큼 개차반인걸. 그런데 이제 와서 얘기를 들어보니 거의 꼼수에 가까운 방법으로 플레이어의 동의를 얻어낸 모양이었다.

    “부장님, 이거 본사에 알려지면 징계 먹을 수도….”

    “아 씨. 본인에게 동의도 구했고, 경고까지 친절하게 해줬다니까. 문제없어.”

    “그건 우리들 생각이죠. 플레이어 본인이 본사에 항의하면 어쩌려고요? 저 사람이 <던전 디펜스> 클리어하면 본사에서 사람 보낼 텐데요.”

    “클리어?”

    여인이 히죽거렸다.

    “잘도 클리어하겠다. 광란(狂亂)의 모드로 설정했는데.”

    “헉.”

    최약체에다 빙의시킨 것도 모자라서 역사상 최고로 어려운 모드로 했다고!?

    ‘무, 무서운 여자….’

    청년은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여인은 예쁘장하게 생긴 것과 반대로 용서도, 자비도, 배려도 없었다.

    여인이 새로운 만화책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만약 그러고도 클리어한다면 글쎄, 내가 엎드려서 빌어주지. 용서해주세요~ 라고. 발끝에 입맞춤하지 못할 것도 없어. 그땐 진짜로 특급 플레이어가 된 셈이니까.”

    뭐 그럴 리 없겠지만, 피식 웃으면서 여인이 다시 만화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청년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오른발을 잃어버린 남자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장님이 선택한 플레이어치고 능력치가 영 구리다 싶었는데, 다 일부러 능력도 스킬도 낮게 설정해버린 것이었다. 불쌍해라.

    ‘힘내, 이름 모를 인간. 쪼옵.’

    청년은 사과주스팩을 마저 빨아마셨다.

    등 뒤로 여인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어떻게 하얀수염이 죽을 수 있냐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당장 작가를 트럭으로 치어박겠다고 울부짖는 그녀를 보면서, 이번엔 또 어떻게 화를 달랠지 청년이 고민했다. 더 이상 희생자를 늘릴 수는 없었으니까.

    *  *  *

    마왕방에서는 치열하게 설전이 벌어졌다. 맞서싸우자는 주장과 도망치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아, 그러니까 여기 마왕방에서 농성하자고!”

    “미쳤냐? 스물다섯 명이야, 스물 다섯. 쪽수에서 상대가 안 돼. 싸울려면 네놈이나 싸우시지. 난 빠지겠어.”

    “허! 지금 도망치겠다는 소리냐?”

    리프가 와락 소리쳤다. 그러나 애꾸눈도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리프를 마주 노려보았다. 파티 최고참인 두 명이 언성을 높이자, 나머지 사람들은 일단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던전을 공략하는 데 참여하기로 약속했어. 그리고 우리는 이미 던전을 공략했지. 빌어먹을 몬스터를 때려잡는 일이라면 몰라도, 다른 모험자 놈들이랑 싸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배신자 새끼!”

    “리프. 진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해봐.”

    애꾸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둘은 몰라도 나머지 애들은 이번에 처음 던전에 놀러온 애송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밭에서 봄갈이나 준비하던 애들이지. 이렇게 마왕을 잡게 된 게 순전히 우리의 실력 덕분이라 생각해? 헛소리. 다른 파티들이 여기를 쓸고 지나갔으니까 그런 거야. 우리는 손쉽게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을 뿐이지. 얘들 갖고 스물다섯 명의 적과 싸우는 건 무리야. 개죽음이라고.”

    “겁쟁이가 말은 청산유수군. 예전부터 내시가 말은 잘한다 그랬지.”

    리프가 손도끼를 잡았다.

    “닥치고 내 말에 따라, 쫄보 새끼들아.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모험자의 세계에서 한 번 우습게 여겨지면 끝장이라고. 던전을 공략했는데도 다른 파티가 무서워서 꽁무니를 뺀다? 하. 그 꼬라지를 보고 사느니 차라리 내가 네놈들을 장사 지내주마.”

    “이 멍청이가…!”

    애꾸눈도 창을 꼬나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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