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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7화 (7/510)
  • 00007 약하게 뉴게임  =========================================================================

    콰직!

    나무 문짝이 산산조각 났다. 마왕방의 정문은 그렇게 애처로이 대형 쓰레기로 전락했다.

    리프가 능숙하게 도끼를 들쳐메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흥, 별 거 아니군.”

    “역시 리프야. 잘센 최고의 나무꾼이지.”

    “무슨. 이 정도면 콧물 흘릴 줄밖에 모르는 꼬맹이도 할 수 있어.”

    리프를 선두로 일행이 한두 명씩 마왕방에 들어섰다.

    마왕방은 무척 초라했다. 넓긴 넓었지만 조금 정돈된 동굴이나 다름없었다. 한쪽 구석에 빨간 카펫이 깔렸다. 그 위에 침대가 있었다. 그게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게임에서 화려하게 묘사되는 마왕방의 배경 일러스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과연 D 클래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ABCD 할 때 그 D가 아니었다. 단탈리안(Dantalian)의 앞글자를 써서 D 클라스였다. 능력치와 던전창에서 충격을 먹고 나는 이 꼴지 마왕에게만 통용되는 클래스를 따로 제정하기로 결심했다. 단탈리안에게는 F급도 아까웠다. 던전 어택의 골수팬으로서 용납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다행인 점도 있었다. 바로 내가 마왕방의 문을 어떻게 여는지 몰랐다는데, 리프가 별다른 문제없이 문을 돌파했다는 것. 난리통에 그만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내 변명을 모험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줬다.

    ‘어차피 나무문인데 부숴버리면 그만이잖아?’

    한 모험자가 내민 의견이었다. 그 말대로 리프가 손도끼를 몇 번 휘두르자 문짝은 쉽게 열렸다. 하지만, 만약 미리미리 호감도를 사두지 않았으면 모험자들이 이런 사소한 일에도 짜증내지 않았을까?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지도 몰랐지만,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지금 상황에선 아까 전의 내 명연기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그래. 드디어 도착했군.”

    리프의 눈이 번득거렸다.

    “자네가 말한 그 메이룬토호인가 뭔가는 어디지?”

    “예. 제가, 제가 알고 있습니다……우흑!”

    내가 신입의 등에서 내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오른발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접질려서 그만 넘어져버렸다.

    모험자들이 부산을 떨었다.

    “어이쿠, 자네 괜찮은가?”

    “야, 야. 제대로 부축해줘야지!”

    나는 그들이 부축해주기 전에 얼른 일어나고자 노력했다. 진심이 반, 연기가 반 섞인 행동이었다. 나는 심각한 부상자이다. 당신들에게 한주먹꺼리도 안 된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여기서 핵심은 동정심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수고롭게 날 부축시켜서 그들을 짜증나고 귀찮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자력으로 일어섰다. 젠장. 아프기는 진짜 더럽게 아팠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래서야 제대로 걸을 수나 있겠나.”

    모험자가 걱정 어린 어투로 말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막다른 벽으로 다가갔다. 등 뒤로 안타까워하는 탄식이 들렸다. 물론 직접 부축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내가 벽에 손을 짚었다.

    “여러분, 바로 여깁니다.”

    “응? 하지만 벽밖에 없잖아.”

    “던전의 주인한테만 작동하는 마법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지요.”

    나는 모험자 전원이 들으라는 심산으로 약간 크게 말했다.

    “이 문양에 대고 정해진 문구를 외우면 던전의 재화가 나옵니다.”

    “허, 마법이라.”

    여기저기서 모험자가 감탄했다. 초짜 모험자들은 마법에 무지했다. 본래 농부거나 나무꾼을 천직으로 삼는 평민이었다. 살면서 언제 마법을 구경해보았겠는가. 마왕인 내가 마법이라 하니까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는 수밖에.

    나는 비장한 얼굴이었다.

    “여러분. 모두 열 걸음만 떨어져주십시오.”

    “음? 왜인가?”

    “이 마법은 마왕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외부인이 가까이 있으면 절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어 있죠. 자칫 잘못해서 오작동이 일어나 여러분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최악의 경우, 보물 자체가 봉인될지 모릅니다.”

    “……!”

    모험자들이 나와 똑같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과연 보물을 들먹이자 약효가 바로 나왔다. 그들은 다함께 줄을 맞추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정확히 열 걸음 떨어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 감상이 어땠냐면……마치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 수달들이 일렬로 대열을 정비하는 것 같았다.

    “자아.”

    리프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말한 대로 열 걸음 물러났네.”

    “…….”

    어찌 들으면 꼭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어투였다.

    잔인하게 화살을 날려대면서 또 저렇게 순진하다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옛날 중세의 평민이란 다 저랬을까? 여하간 나는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훌륭합니다. 딱 정확하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열 걸음이군요. 그 정도면 만에 하나라도 마법에 휘말릴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자 모험자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흐흐.”

    “우리가 원래 완벽하지.”

    “……그럼 이제부터 마법을 시전하겠습니다. 다들 정숙해주세요.”

    등을 돌리고 동굴벽과 마주했다. 밋밋하게 평평한 벽면이었다.

    나는 그곳에 어떤 신성한 글자라도 새겨져 있고, 오직 나만이 그 문자가 보인다는 것처럼, 잔뜩 위엄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쁜 새끼들!”

    당연하지만 한국어로.

    “개새끼,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어금니로 꽉 물고 또 물어서 염병할 찢어죽일 악어 가죽 같은 새끼! 잡것에 들깨를 말아먹어도 세 달 동안 변비에 걸려 항문이랑 배불뚝이가 터져서 뒈져버릴 잡새끼 같으니라고! 길 가다 괄약근 터져서 똥싸지를, 이 개――같은 개새끼들아!”

    내 기세가 심상치 않았음일까.

    모험자들이 짐짓 움츠러든 목소리로 뒤에서 수군거렸다.

    “음, 알아들을 수 없지만……. 뭔가 감정이 잔뜩 실려 있군.”

    “왠지 모르게 우리 동네에서 미친개한테 좆이 물린 고자새끼가 떠올라. 걔도 지가 고자가 됐다는 말 듣고 저런 식으로 소리쳤어. 뭐랄까, 마족의 언어는 상상하던 것과 좀 다르네. 조금 더 고상하고 요상한 느낌일 줄 알았어. 근데 이제 보니까 아주 상남자스럽구만.”

    “어딘지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는걸. 게이새키. 흠, 게이새키. 말하면 말할수록 입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야.”

    나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이 되든 말든 상관않고 소리쳤다.

    그 와중에 시선으로는 한창 '던전재산창'에서 인출금액을 정하고 있었다.

    ━━━━━━━━━━━━━━━━━━━━━━━━━

    던전의 재산을 인출합니다.

    너무 인출해버리면 파산할지도 몰라요?

    인출금액: _489골드

    잔여금액: _511골드

    ※인출하실 금액을 결정하신 후 '확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

    총재산의 절반가량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쯤이 적당해보였다. 혹시라도 정확하게 딱 500골드를 꺼내면 모험자들이 의심할까봐 대충 인출금액을 그럴듯하게 조정했다. 던전 재산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500으로 떨어진다면 이상하게 여기겠지.

    내가 두 팔을 높이 벌리면서 웅장하게 외쳤다.

    “――나중에 두고보자 개새끼들아!”

    그 순간, 허공에서 금화들이 나타났다.

    황금빛 소낙비가 시원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험자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금화, 금화다!”

    “씨발, 저게 다 얼마야!?”

    “정말로 마법이었어!”

    그들은 당장이라도 뛰어들 기세였다. 내가 얼른 소리쳤다.

    “아직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저주에 걸릴 수도 있어요!”

    처억. 막 달려오려고 준비하던 모험자들의 발이 저주라는 단어에 일제히 멈췄다.

    사실 굳이 그들을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다만 보험이라고 할까. 만약을 위해서 호감도를 조금이라도 더 높여두고 싶었다. 지금부터 내가 실행할 작전에는 그들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럼 전문가적인 모습을 연기하는 편이 좋겠지.

    동굴바닥에 금세 금화더미가 야트막하게 쌓였다.

    모험자들이 멀찍이서 입을 쩝쩝거렸다.

    “아이고, 저게 다 얼마야.”

    “이보시게들. 전부 공평하게 분배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당연하지. 이제 와서 말 바꾸는 놈 있으면 사형이야, 사형!”

    목소리에 아주 기름기가 철철 넘치는구만. 욕심의 기름이.

    ‘자아, 와라.’

    나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마침내 500골드 가량의 금화가 다 나왔다. 마지막 금화가 짤랑, 거리면서 굴러가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공중에서 돈이 생기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아니나 다를까. 이때까지 몹시 초조하게 기다렸을 모험자들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들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목소리였다.

    “어이, 이젠 아무 문제도 없는 거지?”

    바로 지금이다!

    내가 냉큼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아아아아아!”

    나는 무척 괴로운 것처럼 발버둥쳤다.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연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땅바닥에 일부러 오른발과 허벅지의 상처를 부비고 있다는 사실을, 모험자들은 죽어도 모르리라.

    “뭐, 뭐야!?”

    “대체 뭐야! 쟤 왜 저래!”

    “흐, 흑마법이다! 흑마법의 저주야!”

    그리하여 내 생애 최고의 열연기가 펼쳐졌다.

    “그, 그만둬……제기랄! 가라앉아라……눈……내, 눈이……! 으아아아악!”

    내가 양손으로 눈가를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모험자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세상에, 끔찍하군.”

    “으으.”

    그래도 개중 용감한 자가 있었는지 한 명이 나한테로 다가오려 했다.

    “어이, 왜 그래? 괜찮나?”

    “오, 오지 마십시오! 이건……크으윽! 어둠의 마법을 쓴 대가로 얻는 반동……! 제게 다가오면, 당신까지, 크, 크아아악! 휘……휘말려버립니다!”

    “헉!”

    사내가 발걸음을 뚝 멈췄다. 나는 거기에다 추격타를 날렸다.

    “최소한 열 걸음……아니, 아홉 걸음은 떨어져 있지 않으면……여러분도 저주에 걸릴지 몰라요!”

    열심히 바닥을 헤집으면서 슬쩍 모험자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들은 죄다 충격을 먹은 병아리 같은 표정이었다. 방금 전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난데없이 금화들이 생겨나는 장면을 목격한 터였다. 마법에 무지한 그들로서는 전문가처럼 보이는 내 말을 믿게 되리라.

    ‘그런데 왜 제대로 반응을 안 해주냐.’

    내가 뭐하러 이렇게 쪽팔린 짓까지 마다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말해줬는데도 모르진 않겠지?’

    나는 초조하게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모험대에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양반이 있었다. 한 사람이 뭔가를 깨달은 듯한 소리로 외친 것이었다.

    “설마 그것을 위해……우리들 보고 열 걸음 물러서라 그랬던 거냐?”

    그래. 바로 그 반응이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지금껏 그 어떤 비명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러댔다. 모험자들은 비명소리를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충격에 감싸인 채로 중얼거렸다.

    “난 저 녀석을 죽이려고만 했는데.”

    “우리를 없앨 수도 있는 기회를 이렇게…….”

    “잠깐, 정말로 아파보이잖아. 저거 안 말려도 괜찮겠어?”

    지금 이 순간 나는 틀림없이 세계 최고의 명배우였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사실 허벅지를 자극해서 고통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뿐이었지만, 저들이 진실을 알 리 없었다.

    “멍청아! 흑마법이라잖아. 흑마법에 걸렸다 뒈진 놈들 이야기 못 들어봤냐? 잠자코 기다려.”

    “다네프의 말이 옳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안타깝지만, 기다리는 것뿐이야.”

    “제기랄.”

    그쯤해서 예의 유쾌한 효과음이 팡파르처럼 울렸다.

    「초보 모험자 다네프의 호감도가 15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리프의 호감도가 16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루크의 호감도가 20 오릅니다.」

    ‘좋아, 아주 좋아!’

    원하던 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일이 생각대로 이루어졌는데도……내 마음속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겨우 수컷들의 호감도 좀 올리겠답시고 이 난리를 쳐야 했다. 어머니 얼굴이 절실하게 그리웠다.

    죄송해요, 어머니. 전 죽고 나서도 변변치 않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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