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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6화 (6/510)
  • 00006 약하게 뉴게임  =========================================================================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직 나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겠지만, 호감도가 착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적당히 연기하면 생뚱맞게 내 목을 날려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리프가 말했다.

    “신입! 마왕 전하를 아예 등에 업어라. 그편이 훨씬 빨라.”

    “예엡, 알겠습니다!”

    신입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는 냉큼 나를 들어 올려서 들쳐멨다.

    “가, 감사합니다.”

    “무얼. 평소에 뭘 먹었길래 수수깡처럼 가볍수? 허우대만 멀쩡하지 속은 영 비실하구만.”

    “하하. 끼니가 부족해서 말입니다.”

    신입이 혀를 쯧쯧 찼다. 농부든 마왕이든 요즘 세상이 살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라며, 신입은 자기 마을이 얼마나 지독하게 가난한지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대체로 자기네 영주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개자식이라는 얘기였다.

    그는 내가 정말로 가벼운지 힘차게 걸었다. 덕분에 난 편했다. 오른다리가 여전히 아팠지만 억지로 걷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솔직히 업어줄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휴우.’

    당장 죽을지 말지 오락가락하던 상황에서 벗어났다.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던전에 정말로 보물이 있는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꺼내는지,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

    마왕의 방에 도착했는데 막상 은화 한 푼 없다고 해봐라. 쥐꼬리만한 호감도는 증발해버리고 분기탱천해서 날 죽여버리겠지.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음 난관을 해결하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입술을 조그맣게 움직여서 발음했다.

    ‘마왕성창.’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아니고. 마왕성 상태창? 이것도 아니고. 마왕성 상황창…….’

    왜 갑자기 상태창 같은 것을 찾는 것일까.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단탈리안의 능력치를 표시하는 알림창이 있었다. 즉, 아마도 다른 종류의 알림창들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세계가 게임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면 겨우 플레이어의 능력치만 달랑 보여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퀘스트 목록창, 동맹창 등, 차례대로 이런저런 알림창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야.’

    나중에야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도 당장은 아니었다. 나는 발견된 알림창을 치워두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속삭였다.

    ‘던전창.’

    그러자 유쾌한 효과음이 울렸다.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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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 단탈리안의 마왕성]

    랭크: 동네 뒷산(F)

    기술연구: 0개

    마법연구: 0개

    *특수스킬: 없음

    *몬스터: 0개체

    *재산: 1000골드

    ※던전이 엉망진창입니다. 동네 꼬맹이들이 당신의 던전을 놀이터로 여깁니다! 언제라도 공략 당할 수 있습니다. 어서 빨리 '몬스터고용' 란에서 몬스터 부대를 고용하고, 태세를 정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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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았어!’

    내가 소리 없이 환호했다.

    솔직히 던전의 상태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이렇게 형편없고 초라한 던전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재산! 까마귀 발톱에 낀 땟국물만큼이라도 재산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전 재산 1000골드…….’

    초중반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지 떨어지는 수준의 금액이었다. 적지만, 아주 적지는 않은 돈. 이 정도만 되어도 꼼수를 발휘할 수가 있다.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알림창에서 재산이라 적힌 부분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수익과 지출, 흑적자 따위의 단어가 나타났다. 당장 수입구조를 개선하지 않을 경우 파산하고 말 거라면서 친절하게 경고까지 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알림창은 단연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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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의 재산을 인출합니다.

    너무 인출해버리면 파산할지도 몰라요?

    인출금액: ____골드

    잔여금액: ____골드

    ※인출하실 금액을 결정하신 후 '확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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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진 지 고작 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여기가 어떤 장르의 게임규칙을 따르는지 그럭저럭 짐작했다.

    이건, 아마도 1인칭 운영 시뮬레이션이다. 여기에 RPG 느낌이 가미되었겠지. 플레이어가 던전을 관리하기도 하고 혼자서 돌아다니기도 한다. 제트코스터 타이쿤을 1인칭 시점으로 즐긴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운영자금을 따로 뽑아서 쓸 수가 있다. 나는 바로 그런 기능을 고대한 것이다.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은 훌륭하게 나의 예상과 기대를 만족시켜주고 있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골드를 빼낼 수 있다.

    ‘모험자 녀석들이 돈 내놓으라고 협박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저들이 비록 날 살려두고 있지만 그건 놈들이 특별히 자비로워서가 아니었다. 보물창고의 문을 오직 나만 열 수 있다고 믿어서였다. 보물을 넘기자마자 날 죽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놈들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이야. 설령 이기적이지 않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옳아.’

    문득 마키아벨리가 조언한 바가 떠올랐다. 군주는 항상 이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던가.

    상대방이 이기적이지 않다면 문제가 없다. 내가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딱히 손해를 보지 않는다. 문제없다. 그러나 만약 상대방이 이기적이라면? 내가 방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손해를 본다. 심각한 경우에는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상대방이 이기적이라 상정한다. 상대방이 이기적이지 않다면 상관없고, 상대방이 이기적이라면 적어도 대응할 수 있다. 유비무환이다.

    ‘좁쌀만한 호감도만 믿을 수는 없어.’

    신기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과제 때문에 읽은 마키아벨리가 떠오르다니.

    인간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이전에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조언이 번뜩 생각난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신기하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설마 내가 그런 경우에 처하게 될 줄이야.

    ‘어쩌면 내 머리가 아예 쓰레기는 아닐지 모르겠는걸.’

    신입이 눈치채지 못하게 피식 웃었다. 이제는 농담을 할 정도로 마음이 여유로웠다.

    모험자들에게 돈을 주지 못해서 살해당할 일은 없어졌다. 모험자들한테 돈을 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죽지 않을까. 이제 그것이 문제였다.

    ‘인정에 호소해볼까?’

    재고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몬스터들한테 인질로 써먹을 수 있다고 말해보자.……아니, 이것도 안 돼.’

    나는 던전에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다고 울고불고 호소했다. 여기 와서 사실은 몬스터가 있었다고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모험자들은 나를 신뢰하지 못하겠지.

    ‘잠깐만.’

    그때 기가 막힌 해결책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돈을 주고 몬스터를 고용하면 되잖아!’

    나는 얼른 던전창을 다시 떠올렸다. 거기에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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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 단탈리안의 마왕성]

    랭크: 동네 뒷산(F)

    기술연구: 0개

    마법연구: 0개

    *특수스킬: 없음

    *몬스터: 0개체

    *재산: 1000골드

    ※던전이 엉망진창입니다. 동네 꼬맹이들이 당신의 던전을 놀이터로 여깁니다! 언제라도 공략 당할 수 있습니다. 어서 빨리 '몬스터 고용' 란에서 몬스터 부대를 고용하고, 태세를 정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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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스터 고용란에서 부대를 고용하시오!

    따로 발품을 팔지 않고도 몬스터를 고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정말 바보 같았다. 왜 친절하게 주의하라고 써놓은 문구를 무시했는가. 바로 코앞에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줄 동아줄이 내려와 있었는데.

    변명거리야 많았다. 나는 조금 전까지 거짓말이 들키지 않을까 끙끙거렸다. 재산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정말로 똑똑하다면 어땠을까?

    ‘돈을 확인하자마자 몬스터를 고용하자고 생각했겠지.’

    반면에 나는 마키아벨리의 주장 따위를 떠올리면서 내 머리가 쓸 만하다고 자축했다. 정말 머저리였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어버린 위인의 그럴싸한 말 한 마디가 이런 상황에서 뭐 대단한가.

    모험자가 이기적이라고? 당연했다.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나온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렴 이기적이지 않고 배길까. 마음에 독기를 품었을 거다. 모험자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굳이 마키아벨리까지 운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당연한 사실을 그럴듯한 헛소리로 포장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조차 나 자신을 멋지게 포장하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 귀중하고 또 귀중한 일분일초를.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로리타! 정신 차려라!’

    나는 모험자들이 손에 쥔 무기를 살펴보았다.

    창, 쇠몽둥이, 활, 칼. 저것들이 나를 죽일 흉기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방심한 그때 창끝은 나의 심장을 쑤실 것이다.

    나는 화살이 스친 허벅지에 일부러 신경을 집중했다. 아팠다. 그 아픔을 육체에, 뇌에, 기억에 새겨놓고 싶었다. 그래야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조금이라도 뜯어고칠 수 있겠지.

    “이봐.”

    신입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너무 아파서 목소리도 안 나오는 거냐?”

    “……아니요. 괜찮습니다. 견딜 수 있어요.”

    “음. 심하게 아프다 싶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게 아팠다. 아까 전부터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목소리에 웃음기를 능숙하게 섞어내면서,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하고 말했다.

    “아니, 뭐. 그 정도까지야.”

    신입이 쑥스러워했다.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순진함이 고마웠다.

    이 모험자들은 초짜이다. 확신했다. 험상궂게 생긴 외모에 지레 겁먹었지만, 그냥 시골에서 곡괭이를 휘두르던 양반들이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튜토리얼 연습용 NPC에 불과하다. 정신만 바싹 차리면 허무하게 목이 날아갈 일은 없다.

    나는 몬스터 부대를 고용하는 홀로그램을 곧장 떠올렸다.

    ‘몬스터 고용창.’

    반투명한 목록이 좌르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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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스터명]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슬라임       2   2   2    70골드

    -최하급요정     4   3   2    160골드

    -고블린       4   4   4    250골드

    -최하급골렘     7   5   5    400골드

    [소지금: 1000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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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하다.

    게다가 비싸다.

    ‘더, 던전 어택에서 마왕들은……싸구려 몬스터를 이렇게 바가지 씌어서 장만한 거냐.’

    게임에서는 주인공의 칼질 한방에 부대 단위로 썰리는 잡몹들이었다.

    나는 몬스터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시선을 집중하면 몬스터 개개의 능력치가 조금 더 세세하게 떠올랐다.

    능력치라고 해봐야 별 볼 일 없었다. 슬라임의 경우에는 스킬이 ‘회복’ 하나만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체력이 차오르는 기술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슬라임의 체력이 고작 3이라는 게 문제였지. 미처 회복 기술을 써먹을 틈도 없이 죽어버릴 게 뻔했다.

    ‘젠장. 혹시 모험자들도 능력치가 엄청 후달리는 거 아냐?’

    모험자도 약하고 몬스터도 약하고. 그러면 몬스터의 상상을 초월하는 약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모험대 대장인 리프를 노려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초보 모험자 리프의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능력치만 공개됩니다.」

    띠링, 하고 효과음과 함께 리프의 머리 위로 홀로그램이 비추었다. 단탈리안의 능력치를 볼 때와 다르게 형식이 아주 간략했다. 아마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한다면 호감도를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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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리프     6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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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응.”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리프의 능력치는 다 합쳐서 13이었다. 몬스터로 따지면 딱 고블린만큼 강했다. 약하긴 약하다.

    하지만……지금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의 수준에서 비추어보면 리프는 충분히 강력했다. 내가 가진 1000골드로는 고블린을 네 마리밖에 고용할 수 없으니까.

    그에 반해서 모험자들은 열다섯 명.

    모험자들의 능력치를 일일이 확인해봤다. 다행히 리프가 가장 강했다. 다른 모험자는 대체로 능력치 총합이 5에서 8로 고만고만했다. 그렇다고 한들 고블린 네 마리로 감당하기엔 모험대가 너무도 막강했다.

    새삼스럽게 실망감이 샘솟았다. 몬스터를 고용해도 승리하기란 요원한 걸까.

    “이제 다 왔어!”

    한 모험자가 소리쳤다. 마왕의 방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었다.

    모험자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어휴, 진짜 쓸데없이 넓네.”

    “네가 던전을 처음 와본 거라서 그렇다, 멍청아. 이 정도는 보통이야. 원래는 중간중간에 몬스터랑 함정이 쏟아져 나오니까 더 넓게 느껴진다고. 우린 엄청 빨리 도착한 셈이야.”

    “정말 쉬운 던전이었군.”

    젠장.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사고에 몰두했다. 게임의 틀 안에서 생각해보고 틀 밖에서 생각해봤다.

    ‘슬라임을 많이 고용해서 물량을 보충할까? 아냐. 아예 가장 강한 골렘을 고용해서 한방 기습을 노리는 쪽이. 아니면…….’

    마침내 모험자 일행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도착했다! 저기가 마왕의 방이다!”

    그와 동시에 나 또한 가까스로 답안을 내놓았다. 나는 입술을 까득 물었다. 핏물이 입안에 흘러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좋아. 이 방법으로 간다……!’

    동굴은 변함없었다. 변함없이 거대하고 고요했다.

    조명 역할을 하는 이상한 구체만이 통로를 따라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고, 모험자들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그러나 이곳에서 단 한 사람. 나만은 모든 것이 변하고 있고 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살아남는다!’

    이 순간 나의 생존기가 더없이 조용히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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