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화 (5/510)
  • 00005 약하게 뉴게임  =========================================================================

    ‘어쩌지?’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모험자의 마수에서 벗어날까?

    단탈리안은 지금 모험대에 생포되어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근처의 도시에 끌려가서 처형당할 판국이다. 모험대는 포상금을 받고 좋아라하겠지. 도시 시장은 작은 축제를 열어서 자기가 마왕을 토벌했다고 자랑스레 떠벌릴 것이다. 그동안 나의 목은 창대에 꽂혀서 도시 광장에 전시되리라.

    제기랄.

    호랑이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 말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 경우에 호랑이굴에 물려간 것은 인간이다. 토끼가 아니란 말이다! 토끼는 제아무리 정신을 차려본들 호랑이굴에서 그냥 죽어버린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다. 우울하다…….

    ‘하다못해 서열 제32위 아스데모스. 아니, 제68위 벨리알이라도 되었다면.’

    입맛이 썼다.

    날 생포한 모험대는 결코 수준이 높지 않았다. 리프인가 뭔가 하는 모험자의 겉옷을 보니 딱 거지 냄새가 풀풀 풍겼다. 다른 모험자들도 그들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거지스러움이 열렬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최하급. 랭크 F급의 모험대겠지.

    나에게 고블린 스무 마리만 부하로 있으면 저쯤 되는 모험대야 얼마든지 쓸어버린다. 이래봬도 던전 어택에서 정점을 찍은 플레이어이다. 누구보다 모험자의 약점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네 뒷산에 널렸다는 고블린조차 지금의 나에게는 한 마리도 없었다. 이래서야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야. 저거 아무리 다리가 삐었다지만 너무 느리잖아.”

    “일부러 시간 끌려고 굼벵이처럼 기어오는 거라니까.”

    마침 모험자들 사이에서 잡담이 끊겼다. 화제가 일시적으로 떨어진 것일까. 녀석들은 이번에는 나를 대화거리로 삼기로 결정했는지 괜히 험악한 말투로 떠들었다.

    모험대의 대장인 리프가 실실 웃었다.

    “마왕 전하. 이거, 내 동료들이 인내심이 별로 넓지 못해서 말이야.”

    나쁜 자식들. 내가 오른발이 병신이 되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더 빨리 걷겠습니다!”

    나는 냉큼 고개를 조아리면서 사죄했다. 약한 게 죄였다.

    리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이쿠. 대답이 빠릿빠릿해서 좋구만. 그래도 말이지, 이거 모험자란 거에 직업병이 있거든. 아무래도 내 동료들은 마왕 전하께서 우리를 속이고 계시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어. 이대로 시간을 끌어서 혹시라도 마왕 전하의 부하들이 도착할 때까지 뻐팅기는 것 아니냐고.”

    나는 서울역에서 제일 억울한 노숙자의 표정을 지었다.

    “절대로 그럴 일 없습니다!”

    정말로 나한테 부하 몬스터가 한 마리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뾰족한 동굴바닥에 쓸린 허벅지가 죽도록 아팠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저에게도 부하가 있었습니다. 고블린, 림프, 오크……보잘 것 없어도 소중한 부하였습니다.”

    나는 적당히 거짓말을 보탰다. 어차피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다고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겠지.

    “하지만 여러분께서 오시기 전에 모험대가 무려 세 개나 연속으로 몰아닥쳤습니다! 여러분이 네 번째로 왔지요. 제 부하는 다 죽었습니다……크흑, 삼십 년 전부터 함께해온 아이들이었는데…….”

    “어, 어이?”

    리프의 목소리가 당황했다.

    “설마 너 울고 있냐?”

    “흐흑……아닙니다…….”

    나는 마치 울음을 힘껏 참고 있다는 듯 서럽게 말했다. 차가운 볼에 눈물이 흘렀다.

    말이야 거짓말이었지만 내가 서럽다는 것만은 진짜였다. 쓰레기처럼 생활하고 있었지만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나 나름대로 애정을 가진 일상이 있었다.

    그런데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어버리지 않나. 일어나자마자 다리병신이 되지 않나. 허벅지엔 화살까지 찔렸다. 무엇보다 생판 처음 보는 남들한테 구질구질하게 싹싹 빌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억울했다.

    “흐으윽……어머니……크흑.”

    어머니 생각까지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아들이 공부에 매진했으리라 믿으실 어머니.

    내가 죽었다니 어떻게 생각하실까. 더운 날 아들이 카페에서 열심히 공부하다가 그만 귀가하는 길에 변을 당했다.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카페에서 공부하라고 권하신 것은 당신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자기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실지 몰랐다. 사실은 전혀 아닌데 말이다. 나는 끝내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한테 평생의 짐을 넘겨버렸다. 못난 녀석.

    “으흐흑…….”

    동굴 천장에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그러자 도리어 모험자들이 당황했다. 리프가 짐짓 화를 냈다.

    “야, 야. 시발. 누가 얘 울렸어?”

    “아니. 쟤 사정이 저럴 줄이야 몰랐지.”

    내 발걸음이 느리다고 탓했던 이가 우물쭈물 변명했다.

    “던전치고 몬스터가 너무 적다 싶었더니, 다른 놈들이 먼저 싹쓸이했구나.”

    “저 녀석은 졸지에 알거지 된 셈이네. 쯔쯧…….”

    “하긴 마왕도 생명인데 어머니가 있겠지.”

    공기가 물렁해졌다.

    머릿속에 효과음이 들린 것이 그때였다. 눈앞에 홀로그램이 줄줄이 떠올랐다.

    「초보 모험자 리프의 호감도가 3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다네프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루크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나는 눈물이 뚝 멈추었다.

    아니, 수컷 놈들한테도 호감도 시스템이 있어?

    아무래도 이 세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모양이었다. 다소 서럽게 울었다고 몬스터의 군주인 마왕에게 호감을 품은 인간이란 또 무엇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아픈 것을 잊고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한편 모험자들은 자기네가 알아서 내 시선을 해석해주고 있었다.

    “아휴. 저거 세상 다 잃었다는 눈빛 좀 봐라.”

    “던전 망했으면 마왕이 신세 조진 것은 맞지, 뭐.”

    “지금까지 줄창 몬스터만 봐서 그런가, 마왕은 생각보다 인간적이군.”

    사람들이 지나치게 순진했다. 시대상이 중세라서 그런가?

    게임 설정상 모험자는 대부분이 평범한 농민이었다. 귀족의 수탈이 극심해지자, 어차피 가난하게 죽을 거 인생한방이나 노리고 죽어보자며 몬스터 사냥에 나섰다. 그중 정말 강력한 용병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모험자는 농사를 짓다가 못 살겠다 싶어서 괭이 대신 창을 들었을 따름이다.

    중세의 인간이란 게 인권 개념이 없어 잔혹해질 때는 한없이 잔혹해지지만, 또한 감정이 한없이 풍부하기도 한 그런 군상이다.

    ‘어라.’

    무언가를 문득 깨달았다.

    ‘이거, 잘만 하면 써먹을 수 있겠는데?’

    머릿속에서 빠르게 주판을 튕겼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모험대의 약점이 무엇인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저들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두려워할 게 무엇인지도 알았다.

    확률은 반반. 먹힐지도 모르고 안 먹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가는 광장에 효수될 게 뻔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못해도 본전이지 않은가.

    나는 재빨리 연기에 들어갔다.

    “그래도 여러분을 만나서 다행입니다. 마왕인 저를 보고도 바로 죽이시지 않았으니까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웠다.

    “몸이 크게 다친 저를 배려해주시고, 이렇게 부축까지 해주시다니……흐윽. 여러분만큼 선량한 모험자 분을 저는 이백 년 평생 처음 봤습니다. 그나마 여러분 같은 선인에게 잡혔으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당연히 구라이다.

    저들은 날 보자마자 화살을 무더기로 날렸다. 내 목숨을 살려둔 것도 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단지 던전의 보물창고를 털어먹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진실 따위는 어찌되든 좋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의 호감을 얻어야 했다.

    ‘어떻게 될까.’

    초조하게 기다렸다. 나는 없는 행동을 지어서 말하지 않았다. 저들의 행동에 해석을 덧붙이기만 했다. 사람은 무릇 자기가 한 행동을 더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모험자들이 반응했다.

    “아니, 우리가 하긴 뭘 했다고…….”

    “자네도 우리들 말에 순순히 협조해주지 않았는가.”

    「초보 모험자 리프의 호감도가 6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다네프의 호감도가 4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루크의 호감도가 6 오릅니다.」

    그 외에도 열댓 명의 모험자가 전원 호감도가 올랐다.

    ‘그렇지!’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까 전에 호감도가 자잘하게 오른 것에 비해서 이번엔 제법 큰 폭으로 높아졌다. 대충 감이 잡혔다.

    “발걸음을 지체해서 죄송합니다. 자아, 어서 보물창고로 가시지요.”

    나는 애써 활기차게 말했다. 정말로 활기차게 말한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저 애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만 활기차게 말했다.

    모험자들이 헛기침했다.

    “크흠. 흠. 우리가 굳이 막 서두를 이유까진 없지?”

    “음, 그렇지. 보물창고에 어디 발이 달려서 도망치는 것도 아닐 테고.”

    “자네도 발이 많이 아플 텐데 천천히 가세. 어차피 몬스터도 없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들은 마냥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요컨대 말이 통하는 짐승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험자라는 짐승이 무엇에 가장 약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 하지만…….”

    내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곤란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시간을 너무 끌면 다른 모험대가 던전에 침입할지 모릅니다. 몬스터가 전멸했으니 그들은 손쉽게 마왕의 방까지 들어갈 거고요. 그러면 여러분께서 곤란하시지 않을까요……?”

    “뭐!”

    모험자들이 깜짝 놀랐다.

    던전의 몬스터는 마왕을 해치지 못한다. 나를 인질로 잡은 이상 이 모험대는 몬스터의 위협에서 안전하다. 그렇지만 몬스터가 아닌 동족의 인간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험대들은 던전을 두고 때로는 협력하지만 때로는 경쟁한다. 던전의 재화, 현상금이 걸린 마왕의 목……모험자에겐 먹음직스러운 사냥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돈을 벌려고 고향을 떠나 멀리 타지까지 온 이들이다. 돈주머니를 가진 자가 몬스터이든 인간이든 무슨 상관일까. 여차하면 언제든지 도적떼로 변할 수 있다. 모험자란 그런 거다.

    이 세계에서 모험자라는 직종은 평판이 나쁘다.

    ‘어차피 돈을 벌려고 떠돌아다니는 예비 도적단 아니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응당 나고 자란 곳에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답게 떠돌이에 대한 취급이 가혹하다. 그러나 아니 뗀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모험대가 다른 모험대를 약탈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모험자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저들끼리 얘기했다.

    “젠장.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른 모험대가 온다는 보장이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멍청아! 최근에만 모험대가 세 개나 들렸다고 하잖아. 소문을 듣고 다른 새끼들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충분해.”

    모험자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던전이 약해진 틈을 노린다……그런 건가. 충분히 있을 법하다.”

    “마왕이 한 말대로 몬스터가 정말 한 마리도 없으면, 우리는 쌩쌩한 모험대랑 목숨을 걸고 춤을 춰야겠군.”

    “제기랄! 기껏 다된 밥상을 딴 새끼들한테 넘길까보냐!”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연장자가 동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던전에서 평정심을 잃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박에 인생역전을 노리고 던전에 뛰어든 농부들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여러분.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모험대가 다가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걱정이 뚝뚝 묻어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보물창고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토론은 걸으면서 해도 좋을 겁니다.”

    “맞는 말이야.”

    “먼저 보물부터 챙겨야지! 암!”

    사람들이 옳은 소리라며 맞장구쳤다.

    「초보 모험대 ‘잘센마을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경계심을 다소 풉니다.」

    “싸게싸게 움직이자고. 지체할 시간은 네놈들 거시기 길이만큼도 없다!”

    “우리 잘센의 사나이가 어디서 눈 뜨고 코 베일 종자냐!”

    모험자들이 저마다 고함을 치면서 분주하게 길을 걸어나갔다.

    ============================ 작품 후기 ============================

    ForSmile// 첫 덧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도 환생트럭에 한번 치여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김조작// 하반신이 먼치킨일지라도 이미 오른발이 망가졌으므로... 물론 망가지면 망가진 대로 플레이(?)가 가능하겠지만요!

    fewfqew// 첫 쿠폰 감사드립니다. 재밌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