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화 (4/510)
  • 00004 약하게 뉴게임  =========================================================================

    동굴이 계속 이어졌다.

    어림잡아 삼십 분을 걸었는데도 지하공동은 끝날 기색이 안 보였다. 여기 동굴은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걸까.

    그러나 내게는 자연의 신비에 느긋하게 감탄할 틈 따위가 없었다.

    조금 전부터 앞쪽에서 살벌한 대화가 들려왔다.

    “그냥 이쯤에서 죽여버리는 게 어때.”

    하고 한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좀도둑도 아니고 말이야, 명색에 모험자잖아. 굳이 재화에 집착할 필요가 있겠어? 저 마왕 새끼 목에 걸린 현상금으로 충분해.”

    “네놈은 얼굴에도 입구멍 대신 엉덩이를 달아놓았어. 입만 열면 방귀 냄새가 풍기거든.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냐? 이렇게 생고생을 했는데도 일천 골드야. 저 새끼 목을 잘라서 갖다바쳐도――.”

    리프가 내게 손가락질했다.

    “고작 일천 골드야! 게으름뱅이 자식아, 부지런히 발이나 움직여라. 집에 하루 늦게 돌아간다 해서 네놈 마누라 젖탱이가 어디 도망치진 않을 거다.”

    사람들이 낄낄거렸다. 나를 대충 부축하는 신입도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미친놈들!’

    녀석들은 내 생사를 한낱 농담거리로 삼고 있었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들은 계속 농담을 떠들어재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리프 대장. 저 녀석 마누라는 젖탱이가 훌륭하기로 마을에 소문이 났거든요. 그 엉덩이만한 젖탱이에 얼굴이 깔려서 한번쯤 숨이 막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랬다는 걸 밝혀야겠는데. 아마 저놈은 마누라 젖탱이가 온 마을을 싸돌아다니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을 거야.”

    “변태 자식들!”

    나는 가만히 쥐죽은 듯 침묵하고 있었다.

    목숨의 위협이 당장은 사라지자 상황이 서서히 파악되었다.

    일단 저들은 한국말로 대화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쓰는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죽었는가 싶었더니 갑작스레 동굴에서 깨어난 것도 그렇고,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비정상적이었다.

    ‘침착하게……침착하게 생각하자.’

    일부러 심호흡했다. 박자에 맞추어서 천천히.

    이렇게 숨쉬기에 집중하면 사고가 충격에서 벗어난다는 말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정보가 왜인지 지금 떠올랐다. 그만큼 내 두뇌가 필사적이라는 뜻이겠지.

    저들은 제법 많은 정보를 노출했다. 아까 전에는 정신머리가 없어 몰랐지만 말이다.

    - 그들은 이 정체모를 동굴을 던전이라 불렀다.

    - 그들은 던전을 공략한다고 말했다.

    - 그들은 자기네를 모험자라고 자칭했다.

    -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마왕이라 불렀다.

    던전, 공략, 모험자……마왕.

    왠지 모르게 벌써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져도 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 <던전 어택>에 빠져 있었다. 저절로 게임이 떠올랐다. 그 직후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함께 떠올랐다.

    ‘나는 분명히 죽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바를 소리 없이 되새겼다. 입술을 움직여 뻐끔거렸다. 상처가 욱신거려서 이러지 않고는 생각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던전, 공략, 모험자, 마왕, 죽음. 그렇게 다섯 개의 낱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좋다. 조금 전보다 머릿속이 훨씬 더 환해졌다. 적어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다만 결정적으로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수학문제를 앞에 두고 마지막 계산에서 뭔가 하나를 놓친 기분이었다.

    “난 저놈이 마음에 안 들어. 저게 딴 마음을 먹고 연기하는 거라면 손해 보는 쪽은 우리야. 던전 어디에 아직도 고블린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이구. 언제부터 우리 동지께서 쫄보가 되셨는지, 원. 던전의 괴물들은 무조건 마왕한테 복종한다. 알겠냐? 우리가 마왕을 잡은 이상 놈들은 무용지물이야. 미노타우르스든 오우거든 어디 와보라 그래.”

    동굴에 말소리가 두런두런 울렸다.

    “후우……후욱…….”

    나는 상처 탓에 끙끙거리는 척하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무엇을 빠트린 것인가. 나는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어떤 광경을.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화살에 맞았을 때,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교통사고. 그러자 한 장면이 의식의 바다에서 잠수함처럼 부상했다.

    후속작.

    “……!”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비너스빤스, 그 자식은 나에게 던전 어택 후속작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눈앞이 불현듯 뚜렷해졌다. 저 무리의 정체, 저들이 사용하는 낱말이 속속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급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입안에서 소리 없이 문장을 되새겼다.

    - 비너스빤스는 나에게 던전 어택 후속작을 당장 보내준다 얘기했다.

    - 그는 이상하게도 후회하지 않을 거냐면서 몇 번이고 물었다.

    ‘미친! 빌어 처먹을!’

    호흡이 가빠왔다. 저것이 전부 우연에 불과할까.

    누군가가 나에게 게임의 후속작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직후, 나는 사망했다. 눈을 떠보니 그 게임과 무척 유사한 세계에 떨어져 있었다.――이것이 전부 우연이라고?

    심장이 달아오르건 말건 내 머리는 침착하게 판단했다. 그럴 리 없다.

    빌어먹을,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는 줄을 스무 살 중반이 넘도록 몰랐다! 오른발이 아작나서 병신이 되었는데도 냉정하게 사고하는 능력 말이다. 내 재능을 깨닫게 해주어 고맙다고 당장 이 사건의 원흉을 찾아가 뺨따귀라도 갈겨주고 싶었다.

    나는 빠르게 가능한 답안을 내놓았다.

    1. 게임의 세계에 들어왔다.

    2. 게임과 유사한 세계에 빙의되었다.

    3. 환상, 아니면 꿈이다.

    4. 죽은 다음 지옥에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네 가지 답안지라.

    얼핏 생각하면 경우의 수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겁먹지 마라, 하고 스스로 다독였다. 선택지를 하나씩 줄여나가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어렵지 않다. 정말로 어려운지 쉬운지는 상관없다. 이럴 때는 어렵지 않다,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먼저 첫 번째 답안지부터.’

    이걸 어떻게 점검할 수 있을까. 이때 살아가면서 몇 번 접해본 소설이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만약 여기가 게임의 세계라면 틀림없이 이 말에 반응하리라.

    “어이, 마왕 전하. 옥체에 어디 편찮은 구석 없어? 응?”

    신입이 말했다. 걱정한다기보다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마왕 전하가 쓰러지면 우린 죄다 공손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지. 우리한테도 나쁜 일이지만, 마왕 전하한테는 정말로 나쁜 일이 될 거야! 리프 대장은 꽤나 잔인하거든.”

    “괜찮……후욱, 괜찮습니다…….”

    “그래. 바로 그런 기세가 인생에서 참 중요하지. 하하. 발 한쪽이 조금 부러진 것쯤이야, 응. 침만 발라도 낫는 거 아니겠어. 명색이 사나이라면 꿋꿋하게 견뎌야지.”

    어딜 봐서 이게 조금 부러진 거냐!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쳤다.

    나는 고통에 신음하는 척하면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오른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척 아팠다. 연기하기 쉬웠다.

    “상태창.”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당황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자그맣게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그때 경쾌한 효과음이 울렸다.

    ─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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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0)

    레벨: 1     악명: 7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F)

    통솔: 11/15  무력: 2/5   지력: 25/25

    정치: 10/15  매력: 3/10  기술: 1/10

    *칭호: 칭호가 없습니다.

    *능력: 능력이 없습니다.

    *스킬: 스킬이 없습니다.

    [업적: 0개]

    [부하: 0개체/20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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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투명하고 푸른 홀로그램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서 있었다. 신입이 소리쳤다.

    “뭘 허수아비처럼 넋이 나갔어!”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한 대 때릴 기세였다. 아마도 그에게 홀로그램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겠지.

    “죄, 죄송합니다. 발이 아파서.”

    “에잉. 쯧! 마왕이란 작자가 걷는 것도 제대로 못하니 원.”

    나는 허둥지둥 발을 움직였다.

    이때 내가 느낀 감정이란 절체절명의 순간에 냉정한 사고를 유지해서 자랑스럽다는 것도, 마침내 정답을 알아내서 기쁘다는 것도, 상황이 어처구니없어 당혹스럽다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사태의 원흉일 비너스빤스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고, 나에게 화살빵을 먹인 모험자에 대한 살의도 아니었다.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절망감만이 나를 둘러쌌다.

    ‘우라질.’

    평소에 연이 없는 욕지거리까지 튀어나왔다.

    ‘존나게……진짜 존나게 망캐잖아, 이거!’

    *  *  *

    던전 어택. 한국에서 발매한 성인용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장르는 ‘던전 공략하는 시뮬레이션 RPG.’ 정말로 공식 홈페이지에 그렇게 쓰여 있다. 여기 제작사에서는 맨날 웃기지도 않은 장르를 창조하여 자기네 게임에 붙인다. 자기네 딴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게임 속 주인공은 건장한 산골청년이다.

    나쁘게 말하면 촌놈.

    어떤 마왕의 군대에 고향이 쑥대밭이 되어버리자 모든 마왕에게 복수하겠다! 라고 맹세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용사 주인공인데……던전 어택의 특징은 바로 난이도에 있다. 용사 주인공이 정말로 힘 좀 센 촌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황제의 숨겨진 자식? 드레곤의 마지막 후예? 우연히 만난 스승이 사실은 대마법사?

    그런 거 없다.

    주인공은 정말로 시골에서 자라나 글 읽을 줄도 모르는 정진정명 촌놈이다.

    당연하게도 1회차에는 마왕을 서너 명 쓰러트리기도 어렵다. 5회차, 6회차는 진행해야 본격적인 시나리오에 진입할 수가 있다. 대략 10회차까지 플레이하면 비로소 거의 모든 시나리오를 관람한다. 숨겨진 시나리오까지 깨고 싶을 경우에는 적어도 나처럼 17회차는 가야겠지. 그것도 나 같은 고수나 할 수 있는 짓이다. 미친 난이도가 아니고 뭔가.

    여기서 마왕이란, RPG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마왕이다. 주인공이 용사이니까 적은 마왕. 간단한 논리이다.

    마왕들은 던전을 짓고 사는데, 몬스터들이 첩첩산중처럼 던전을 지키고 있다. 플레이어는 그런 던전을 실력과 물량, 계략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공략해야만 한다.

    흔하디흔한 설정이다마는 던전 어택만의 특징도 있다. 보통 RPG에는 마왕이 한 명밖에 없다. 그런데 던전 어택에는 마왕이 여러 명, 그것도 무려 72명의 마왕이 등장한다. 플레이어는 72명의 마왕을 전부 무찔러야 한다.

    서열 제1위 바알, 서열 제2위 아가레스, 서열 제3위 바싸고, 서열 제4위 가미긴…….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게임에서 단탈리안이라는 마왕은 그야말로 최악, 최약, 최저의 약골이다!

    제아무리 게임에 재능이 눈꼽만치도 없는 초보자도 단탈리안만큼은 1회차에 깬다. 당연하다. 애시당초 초보자용으로 만들어진 마왕이다. 다른 게임에 비유하자면 초보자 사냥터의 토끼나 다름없다. 클릭만 할 줄 알면 토끼 정도야 누구나 때려잡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단탈리안 취급이 얼마나 나쁘냐면……모든 마왕이 예쁘장하고 멋진 일러스트를 갖고 등장하는 데 반하여 딱 한 명, 단탈리안에겐 일러스트가 없다.

    완전히 엑스트라 취급. 이름만 마왕이지 약간 강한 몬스터보다 못하다.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깨부순 서열 제1위의 마왕 바알은 능력치가 대충 이렇다. 공략하려고 능력치를 수백 번도 더 봤으니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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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바알

    직업: 던전운영자(SSS+), 마왕(SSS+)

    레벨: 389.      악명: 8700078

    통솔: 356  무력: 402  지력: 311

    정치: 287  매력: 210  기술: 109

    *칭호: 1.대마왕 2.전설의 던전운영자 3.전설의 학살자

    *능력: 전술SSS+, 작전술SSS+, 제왕학SSS, 검술SSS+, 마법S

    *스킬: 마신의 강령, 필살무효(改), 마법무효(改)

    [업적: 2500개]

    [부하: 7500개체/7500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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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황찬란하다. 대마왕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다. 무릇 한 게임의 진짜 보스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고 말하는 듯한 포스라고 할까.

    괴물 같은 능력치에 어울리게 일러스트도 잘 빠졌다. 잘 생긴 중년의 남자이다. 주인공보다 대마왕이 더 멋있다고 얘기하는 게이머도 꽤 있다.

    반면에 방금 단탈리안은 능력치가 어떠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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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0)

    레벨: 1     악명: 7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F)

    통솔: 11/15  무력: 2/5   지력: 25/25

    정치: 10/15  매력: 3/10  기술: 1/10

    *칭호: 칭호가 없습니다.

    *능력: 능력이 없습니다.

    *스킬: 스킬이 없습니다.

    [업적: 0개]

    [부하: 0개체/20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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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한 게임의 샌드백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말하는 듯한 포스……말도 안 된다. 뭐냐 이건.

    마왕이라 해서 다 똑같은 마왕이 아닌 것이다. 바알과 단탈리안 사이에는 실로 미국과 네팔 사이 정도의 세력 차이가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당해내지 못한다.

    참고로 말해서.

    1회차가 끝나고 2회차 플레이부터 단탈리안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귀찮아 할까봐 제작사에서 배려해준 것이다.

    예를 들어, 레벨 20짜리 검사한테 ‘초보자 사냥터의 토끼를 잡아오세요!’라는 퀘스트가 떨어진다고 해보자.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런 퀘스트는 제작사에서 적당히 생략해주어야 한다. 마왕 단탈리안이 딱 그 짝이다. 차마 상대하기도 귀찮은 토끼……. 냉정하게 판단하여, 던전 어택에서 단탈리안이라는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란 기껏해야 그 정도 수준이겠지.

    문제는 이제 내가 그 토끼가 되었다는 거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선작, 추천,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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