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화 (2/510)

00002 약하게 뉴게임  =========================================================================

엔딩 스크롤이 길게 이어졌다.

시나리오 제작자, 디자인 담당자, 캐릭터 일러스트레이터……모니터에 수백의 이름이 명멸했다. 나는 그저 멍하게 화면을 바라다보았다. 이름이 눈에 비추었지만 머릿속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내가 몇 시간 동안 이걸 붙잡았더라?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뇌수가 개점휴업을 선언한 것 같았다.

나는 삐꺽대는 고개를 돌렸다. 벽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저녁인가, 아침인가……그러고보니 창문 바깥이 환했다. 아침 아홉 시였다.

책상에 앉은 뒤로 아홉 시라는 시각을 적어도 세 번은 확인했다. 요컨대 게임이 시작한 지 아무리 적어도 36시간이 흘렀다.

“흐으.”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폐인이 따로 없네.”

뭔가를 더 말하려다 말았다. 어젯밤에 페트병째로 들이킨 콜라가 찌꺼기가 되어 입안에 눌어붙었다. 최소 36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입구멍이 열리니까 갑작스레 입안이 텁텁해졌다.  심각했다. 만일 사람들이 지금 내 입 냄새를 맡는다면 당장 시위를 일으켜서 입 냄새 특별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할 것이었다. 나는 법정에 서서 부당하다 항변하겠지만 입 냄새 때문에 판사들이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재판 없이 투옥되겠지…….

아마도 서너 끼를 컵라면과 삶은 계란으로만 버텼다.

컵라면의 기름기가 콧등과 뺨, 두개골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문득 내 몸뚱어리가 거대한 음식물쓰레기 봉투처럼 느껴졌다.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니었다. 음식물쓰레기는 누군가가 수거해가는 반면에, 나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점을 빼고.

“흐으.”

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돌렸다.

마침 모니터에 플레이어 캐릭터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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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리타 문두스

직업: 모험자(SSS+), 검사(SSS)

레벨: 98      명성: 63050

통솔: 94/100  무력: 132/140  지력: 125/125

정치: 93/95   매력: 100/100  기술: 80/81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2. 전설의 용병 3. 던전 브레이커

*능력: 전술SSS, 검술SSS, 작전술S, 설득 S+, 기마술 S, 원소마법 A

*스킬: 의용군, 천리지행, 필살무효

[업적 달성: 108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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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우.”

머리를 뒤로 젖혔다. 나는 의자에 파묻혀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골에서 뇌만 빠져나가 홀라당 모니터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나에게는 두개골만 남았다. 그렇게 느껴졌다.

사실상 플레이어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치.

“몇 회차……저번이 16회차?”

아예 머리가 맛이 갔는지 문장 단위가 아니라 낱말 단위로 말이 튀어나왔다. 사고가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징검다리 건너가듯이 생각이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생각의 선을 억지로라도 이어붙이기 위해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던전 RPG <던전 어택>.

이 게임은 처절한 난이도로 유명했다. 1회차만 플레이해서는 중간보스조차 못 잡았다. 최종보스는 꿈도 못 꾸고. 2회차, 3회차, 4회차. 마침내 17회차까지 노가다한 끝에야, 나는 겨우 최종보스 대마왕 바알을 잡아냈다.

대마왕 바알의 군단은 강했다. 그러나 그들과 나 사이에는 간극이 놓여 있었다. 회차 플레이라는 간극이.

자고로 노가다에 장사 없었다. 나는 플레이어로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여 그들을 이겼다. 바알 입장에서 보자면 치트이고 꼼수이겠지. 어쩌겠는가. 그것이 플레이어와 NPC의 시스템적인 차이인걸.

그런데 승리의 순간에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기쁨이 아니었다. 결코.

면상에 내려앉은 기름기보다 더 끈적거리는 허무감이었다.

“올해 여름방학도 끝났구나.”

단칸방.

제대로 청소한 것이 대체 언제인지 바닥에 머리카락이 덩어리째 굴러다녔다. 전공서적이 방구석 여기저기 쌓여서 피사의 사탑을 연출했다. 기필코 학과 일등을 먹으리라, 기나긴 휴학 끝에 그렇게 다짐했다. 용돈을 쏟아부어서 장만한 자기계발서가……지금은 야트막한 먼지의 언덕을 이루었다.

이게 아니었다.

자취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분명히 의욕에 넘쳤다.

“…….”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것이 나의 세계였다.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이것조차 하나의 세계였다. 말라비틀어진 정액 휴지뭉치처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그저 한때의 의욕만이 휘발되어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 모니터 속의 세계와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곳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축적된다.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의 레벨업은 반드시 한 번의 레벨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레벨 90이 돌연 레벨 80이 되어버리거나, 능력치가 떨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일단 실재하면 계속 실재한다! 어찌된 것이 이쪽 세계는 무엇이든 남김없이 증발해버린다. 도대체 어디가 진짜인가.

“……젠장.”

마우스를 잡았다.

『다음 계승을 위해 데이터를 보존하겠습니까?』

화면에 떠오른 질문에 대하여 당연히 『예』를 클릭했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취방에서 나갔다.

*  *  *

늦여름.

후덥지근한 공기가 나를 반기었다. 달리 말해, 날 반길 만한 것은 더운 공기 정도밖에 없었다. 수증기가 폐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자취집 앞 편의점에 들어가서 담배를 한 갑 샀다. 어머니가 준 카드를 긁어서.

아르바이트생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나는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편의점에서 나왔다. 외진 골목에 진을 치고 담배를 피웠다.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마도 카드로 담배를 긁었더니 곧바로 어머니 휴대폰으로 정보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담배를 버렸다.

“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휴대폰 너머로 어머니가 밝게 말했다. 물론 어머니 목소리라는 게 다 그러하듯 밝지만 슬픈 애정이 서려 있었다.

「아니. 우리 아들 뭐하나 싶어서.」

지금부터 거짓말을 할 차례였다.

“공부하다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더워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띵해서…….”

이건 내가 들어도 제법 웃겼다. 당연히 머리가 띵하지 않겠는가. 수십 시간 내내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전파와 함께 밤샘파티를 벌였는데 말이다. 그러고도 정신머리가 온건하다면 도리어 신기할 노릇이었다.

“네, 맞아요. 그래요.”

참고로 내 목소리에는 영 힘이 없었는데, 어머니께 거짓말해서 죄송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거짓말을 보다 그럴싸하게 꾸미기 위해서였다. 내가 유일하게 자신 있는 분야가 바로 거짓말이다. 농담이 아니다. 올림픽에 거짓말대회가 정식종목으로 있었다면 나는 진즉에 병역을 면제했을 거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내 목소리를 아들내미 체력이 떨어졌다는 빨간색 신호등으로 받아들였다. 목소리가 더더욱 상냥해져서 나의 근황을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힘없는 목소리를 연출했다. 네, 잘 지내요. 그럼요. 그럭저럭 공부도 하고 있어요. 실로 청산유수였다.

「먹고 싶은 거 먹어. 살 거 있으면 사. 커피도 마실 거면 비싸고 좋은 거 마시고. 기왕이면 그 어디냐, 시원한 카페 들어가서 공부하렴. 아들이 돈 쓰는 거 부담스럽게 만들 정도로 우리집 곤란하지 않은 거 알지?」

내가 정말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네, 어머니. 그럼 저 다시 공부하러 들어갈게요.”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훌륭한 구라쟁이가 여기 있었다.

나는 담배를 물었다. 다시 공부하겠다니? 언제는 공부를 하긴 했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나 역시 진심으로 공부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최고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존중받는 수준의 대학에 입학했다. 그놈의 피해망상이 날 망쳤다. 수능을 위해서 여태까지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부당하게 참았다는 망상이.

……아니. 그런 망상에도 약간만 빠졌으면 괜찮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보면 억!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화려하고 방탕하게 놀아재꼈다. 첫 학기에 수업 하나를 제외하고 F로 도배한 놈은 전교를 통틀어서 다섯 명밖에 없었다. 성적표에 내가 뒤에서 여섯 번째 순위를 먹었으니 틀림없었다.

대학에 가서 놀라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놀아버린들 뭐 문제가 있겠어.

‘오빠. 정신 좀 차리지?’

내 모습을 여동생은 한심하게 지켜보았다. 부모님은 말리지 않았다. 그럭저럭 좋은 대학을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시는 분들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가업을 이어서 맨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아.”

결국 그 정도 인간이다, 나란 녀석은.

자취방에서 노트북을 챙겼다. 나는 시원한 에어컨을 찾아서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내가 종일토록 한 것이라고는 인터넷 서핑이 전부였다. 이 사이트 저 사이트 옮기면서 영양가 없는 글에 웃었고, 역시나 영양가 없는 글을 썼다.

내가 오래 머무르는 인터넷 커뮤니티는 단연 <던전 어택 팬 사이트>이다.

던전 어택은 지나치게 높은 난이도 때문에 오히려 골수팬을 양성했다. 어려워서 좋다! 어렵지 않으면 싫다! 하는 변태가 세상에는 생각보다 즐비했다. 그런 변태가 모여들어 만든 성지가 이곳이었다.

나는 플레이어 캐릭터 ‘로리타’가 오늘 달성한 업적을 게시글로 올렸다.

글을 올리자마자 회원들이 댓글을 달았다. 빨랐다! 이 인간들은 밥 먹고 인터넷만 하나.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대단했다…….

─골수고어: 대박. 능력치 좀 보소.

─흑장미: 명불허전 데낄라떼. 능력치 죄다 S로 도배한 거 혐오스럽다.

데낄라떼는 내가 쓰는 닉네임이었다.

─자칭소년: 님 이거 도대체 몇 회차임?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17회차라고 답변했다. 다시 회원들이 댓글을 우르르 달았다.

─푸슛사과: 십칠이래. 미쳤다, 미쳤어.

─마유림: 플레이시간 대충 따져도 오천 시간은 즈려밟을 듯. 시발, 바알 대마왕성이 정말로 공략하라고 만들어놓은 던전인지 개발자 정신상태가 심히 우려스러웠는데 이제는 데낄라떼 정신머리를 의심해야 할 판국.

─리챠: 정신병원은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갓름날: 여기가 소문으로만 듣던 정신병원인가요?

─율베리아: 정신병원 찾아왔습니다.(2)

─정육쩜: 님아, 마법사 로우메이 어떻게 공략함? 추천글에 나온 대로 가프 던전 깼는데도 호감도 제한이 풀리지 않음.

─쓰레기김씨: 그래봤자 폐인.

뚝.

마우스 휠이 멈추었다. 시선이 댓글에 걸렸다.

‘그래봤자 폐인.’

댓글 아래로 여기 폐인 아닌 놈 어디 있냐면서 비아냥거리는 반응이 이어졌다. 회원들이 내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고맙긴 했다. 그래도 알고 있었다. 저 자가 한 말이 진실이라고. 정말로 나는 그래봤자 폐인에 불과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제는 내가 별로 개의치도 않는다는 거지.’

폐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데도 그 처지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단순히 폐인이 아니라 음식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어째서인지 머리와 혀가 달려서 어머니 카드로 6,500원짜리 카페모카를 사먹을 줄 아는 음식쓰레기 말이다.

그때 게시판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제목: 데낄라떼는 보시오. ·····닉네임: 비너스빤스』

비너스빤스, 얘는 나랑 곧잘 사이트에서 부닥치는 회원이었다.

누구보다 게임 지식이 해박했는데, 던전 어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와 달라서 부단히도 충돌했다. 우리 두 사람은 모든 회원이 인정하는 폐인계의 양대산맥이었다.

만약 누가 어느 던전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냐고 질문하면 우리 둘은 즉각 그 자리에서 열일곱 가지의 공략법을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요컨대 비너스빤스나 나나 던전 어택에 인생을 바친 놈들이었다.

참고로 비너스빤스의 경우, 오직 게임 개발자만 알 법한 내부사정에도 통달하여 일각에선 혹시 진짜 개발자 아니냐고 의혹이 돌았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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