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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134화 (134/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34화

    강백현의 사전감사 결과 보고서를 앞에 두고 치열한 눈싸움이 계속 되었다.

    한 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는 백현을 보며 기가 차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고태준 실장.

    그는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나가!”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가라고. 나 결재 안하니까 나가!”

    고태준은 바깥으로 나가는 강백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전감사결과 보고서의 내용에는 허점이 없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직무유기라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공무원 인생을 파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강백현의 문서를 결재하면 당장 자신의 공무원 인생이 끝장날 터였다.

    어떻게 이룬 인맥인데! 어떻게 만들어 놓은 관계인데.

    도지사와 연결된 커넥션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대선후보 9위에 걸맞는 인재.

    도지사를 따르면 인생의 정점에 닿을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걸 터트리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뻔하다.

    대한민국에 공익제보자란 타이틀은 없다.

    운이 좋아 언론의 비호 속에 화를 면했다 하더라도, 공무원을 고발하는 행위를 공무원 조직 내에서 눈감아줄 리는 없었다.

    양자택일.

    두 가지 선택지가 모두 죽는 길로 이어지는 상황. 그 앞에서 고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저런 놈을 받아가지고, 키워줄 생각을 했었다니.’

    강백현은 지금의 고태준에게는 최악의 부하였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올려줄 수 있는데, 왜! 도대체 왜 말을 안 듣는 건데?

    고태준의 입장에서 강백현은 그야말로 역량 범위 밖이었다.

    설득이 안 되고, 고리타분하고, 원리원칙대로만 업무를 수행하는 꼰대 놈이다.

    가끔은 뇌물도 받고, 가끔은 접대도 받으면서 재밌게 살 수 있는 공무원이란 신의 직업을 가졌으면서 왜 저렇게 멍청하게 사는 걸까?

    고태준은 단단히 화가 난 상태로 결심을 굳혔다.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고태준.

    “부지사님, 고 실장입니다.”

    - 아, 그래. 무슨 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강 팀장 관련 일입니다.”

    * * *

    같은 시각.

    실장실에서 굳은 표정으로 나오는 강백현을 발견한 차우현이 백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팀장님. 잠시.”

    “네.”

    차우현과 강백현이 나가는 것을 본 김태웅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아, 존나 심각해진 것 같은데.’

    차우현 또한 강백현을 걱정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차창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는 차우현.

    “아직 많이 춥네요. 팀장님. 3월 초인데도 아직 쌀쌀하니, 식물들도 많이 움츠려 있겠죠?”

    “식물이요?”

    “네. 지금 싹을 틔우면 얼어 죽고 말테니까요. 전 팀장님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존경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말씀드렸죠. 그런데 결국 제가 우려하던 상황이 오고 말았네요.”

    강백현이 차우현의 진지한 말에 고개를 숙였다.

    “압니다. 그 도덕성, 청렴함. 그게 팀장님의 장점이고, 제가 팀장님을 따르는 이유이기도 하죠.”

    차우현이 분위기를 잡자, 백현은 내려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후회 없으신 겁니까? 지금이라도 늦진 않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이겨낼 겁니다.”

    “아니요. 이겨내지 못합니다. 전임자인 최용규 팀장님도 이겨내지 못한 일입니다. 그때와 똑같은 상황에서 강백현 팀장님이 이 일을 정면돌파하기는 힘들 겁니다. 전 그냥 잘못했다고 하시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아니요. 전 원칙대로 할 겁니다. 범죄를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누군지 모를 한 사람의 기회를 앗아갔어요. 친인척을 우선해서 정규직 전환을 시키는 건 아무리 도지사님이라고 해도 아니잖습니까. 떨어진 사람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강백현의 말에 차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억울하겠죠. 그러나 모르는 일이잖아요. 모르고 넘어간 일이잖아요. 팀장님만 조용히 해주시면 팀장님 인생은 탄탄대로가 될 거예요.”

    “넘어가게 된다면 한두 번으로 끝나진 않겠죠.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열 번 되고, 열 번이 백 번도 되는 거니까요. 넘어가라고요? 제 인생의 성공을 위해 억울한 사람들이 계속 나와도 그대로 넘어가라고요?”

    차우현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못 말리겠네요. 이제는 더 이상 말씀드려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팀장님, 그게 팀장님의 생각이라면….”

    “만약 이 일로 잘못된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차우현 주무관은 몰랐던 걸로 하세요.”

    “팀장님!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둘 사이에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진짜 친해졌다고 생각한 차우현의 직언에 강백현은 눈물에 시야가 가렸다.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돌린 강백현이 자신의 심정을 말했다.

    “그만 들어가죠. 날씨가 많이 춥네요. 저희 둘 사이도 더 추워지겠어요.”

    “이 와중에 장난하시는 것도 아니고.”

    “장난 아닙니다. 결과 기다려보죠.”

    * * *

    그날 오후, 고태준 실장은 부지사와 함께 도지사실로 들어가 사전감사결과를 들이밀었다.

    “여기 한 번 봐주십시오.”

    “이게 뭐야!”

    “강백현 팀장이 작성한 서천군 사전감사 결과입니다. 도지사님의 사촌 채용 관련 조사결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 백현 팀장이? 너희 감사팀 강백현이 작성한 것 맞아?”

    도지사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확인한 고태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그동안 제가 잘 관리하려고 했는데, 그게 처음부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힘들다니?”

    “최장철 국회의원에게 포섭된 것 같습니다. 부하직원들 얘기에 따르면 최장철 의원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장철 의원 딸이 강백현 팀장과 동기지 않습니까? 공무원 연수원도 같이 나왔고요.”

    “이 새끼, 어쩐지! 어쩐지 유학 신청까지 한 게 모두 계획이었나? 4월 중으로 국비유학 가겠다고 신청해놨던데.”

    도지사의 말에 고태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나쁜 새끼! 고 실장!”

    “네.”

    “그 새끼한테 가서 내가 메모한 대로 말해. 그리고 어디서 뇌물 쳐먹었나 자체조사 실시하고.”

    “홍천군 감사는 어떻게 진행합니까?”

    “그 새끼 빼놓고 진행하면 되잖아. 문제 있나?”

    “없습니다. 그럼 메모 적힌 대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 *

    그날 오후, 강백현은 싸늘한 사무실 분위기를 뒤로 하고 정기감사를 위해 작성해둔 체크 리스트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차우현 주무관님, 조달청 아이디 비밀번호 초기화 했어요?”

    “네. 했습니다.”

    “건설행정 프로그램하고 급식지원 프로그램 아이디, 비밀번호도 초기화 해주세요. 저번에 30일 지나 로그인이 안 돼서 중간에 감사 중단됐었잖아요. 그런 일 없도록 비밀번호 재설정해두자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때, 도지사실에 다녀온 고태준 실장이 강백현 팀장의 자리로 걸어왔다.

    “강백현 팀장.”

    “네. 실장님.”

    “아, 자네는 오늘부로 직무정지일세.”

    “네?”

    “도지사님 자체 권한으로 지금 이 시각부로 자네는 직무정지 상태로 결정되었네. 민원실로 가서 대기해. 차우현 주무관!”

    고태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차우현을 불렀다.

    “강백현 팀장 자리 전화 연결 해제하고, 직무대리로 자네가 당분간 팀장이야. 알았나?”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건 좀.”

    “나도 어쩔 수 없어. 선을 넘으면 안 돼지. 다들 잘 기억하라고. 더 할 말 있나?”

    “아닙니다.”

    “그럼 차우현 주무관은 팀장 직무대리로서, 사전감사 결과보고서 다시 재작성해서 월요일 아침까지 나한테 보고 올리도록 해. 알았나?”

    차우현이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웃나?”

    “아닙니다. 당황스러워서.”

    “월요일까지 준비해. 그럼!”

    실제 공무원들 사이에서 이런 일은 제법 벌어지는 편이었다.

    차우현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5급 공채 수석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실장이 떠나고 차우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백현에게 물었다.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마음이 아프네요. 나 걱정 말고 다들 일해요. 나 정말 괜찮아요!”

    “팀장님….”

    “괜찮다니까~. 이제 나 팀장 아니니까. 그렇게 부르지도 말고요. 다 내가 자초한 일이잖아요. 왜! 왜 그렇게 봐요? 김태웅 주무관!”

    “네. 팀장님.”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부족한 팀장이자 친구 만나서 마음고생 많았는데, 잘 따라줘서 고마워요.”

    조은혜 주무관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3개월간 쌓인 정도 많았는데.

    최용규와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이 또 이렇게 떠나가니 마음이 아프다.

    “팀장님.”

    “아, 조은혜 주무관, 다 내 잘못입니다. 괜히 내 편 들다가 같은 꼴 당하지 말고, 열심히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 해주세요. 저는 이제 가볼게요.”

    “팀장님! 팀장님! 팀장님!”

    조은혜, 차우현, 김태웅은 강백현이 짐을 싸들고 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물론 강백현도 마찬가지였다.

    직무정지, 이건 도지사의 정당한 권한.

    아무 이유 없어도 직무정지를 시킬 수 있는 게 바로 지방기초단체장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원실에서 한숨을 쉬며 대기하는 백현에게 오복주 감찰팀장이 찾아왔다.

    “잘 지냈어?”

    “네?”

    오복주의 반말에 강백현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 인상도 오복주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엿 먹이더니, 꼴좋다 인마.”

    “저 대화 섞을 기분이 아닙니다.”

    “도지사님이 너 비리 있는지 조사해보라고 하신다.”

    오복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백현에게 사실을 전했다.

    “네. 조사하시죠.”

    강백현은 당당하게 나왔고 오복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털어도 먼지 안 나올 거 알아. 네가 어떤 놈인데. 200만원도 마다하는 놈이잖아. 그런 놈 털어봐야 뭐가 나오겠냐. 그래도 뭔가는 나올 거야. 네가 했든 안 했든. 지금의 상황은 결국 벌어질 일이었단 말이지~”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내가 인생 선배로서 한 마디 해줄게. 너 미쳤지?”

    “네?”

    “너 미친놈이잖아. 어차피 도지사랑 싸워봐야 못 이기는데 싸움 걸었잖아.”

    “그런데요?”

    “미친 척 한 번 더 해. 사건 이렇게 정공법으로 터트리지 말고, 아예 크게 터트리라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친놈아. 내가 더 어떻게 말해? 어차피 너 공무원 포기할 생각으로 터트린 거잖아. 우현이가 어제 울면서 나한테 사정사정하더라. 제발 너 말려달라고. 근데 내가 널 왜 말리냐? 뭐, 예상된 일이었지만, 직무정지 당할 만 하지. 도지사를 공격했는데, 당연히 당할 만 하지. 하지만 도지사도 약점이 있어. 그게 뭔지는 너도 잘 알잖아.”

    “그걸 하면 제 인생도 끝장나겠죠.”

    “이미 끝장났잖아?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래? 이미 넌 쓰레기 중 쓰레기가 다 됐는데.”

    * * *

    강백현은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오복주 감찰팀장.

    자신과 대립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조언은 확실히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그건 자신의 인생을 끝장낼 수도 있는 선택지였지만, 분명 적어도 이번의 비리 하나는 확고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강백현이 컴퓨터를 켜서 카메라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카메라와 함께 마이크를 켜서 녹음이 잘 되는지를 확인했다.

    새벽 1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방송을 보는 시간.

    어느 사이트의 라이브 생방송.

    제목 : 어느 사무관의 고백.

    강백현이 녹화버튼을 눌러 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보직 해임된 사무관 강백현이라고 합니다. 어제까지 전 충남도청 공직기강감사실 감사팀장으로 서천군의 사전감사를 맡고 있었죠. 그런 제가 왜 제가 보직에서 해임되었는지,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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