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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130화 (130/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30화

    한쪽 신장을 주면 회사에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신장을 주지 않으면 회사에서 쫓겨난다.

    올해 서른셋.

    성한 그룹이 있어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고, 성한 그룹이 있기에 지금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성한 그룹에서 쫓겨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집안에서 쫓겨나면 나는 뭘 해야 하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다.

    사고를 쳐도 성한 그룹 변호사가 해결해주었고, 돈이 없으면 성한 그룹의 회계전문가가 해결해주고, 집안일은 성한 그룹이 고용한 파출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비서들이 자신의 수족인 마냥 처리해주었다.

    33년 동안 그런 생활을 해왔는데, 지금부터 그렇게 살지 말라는 건 고기웅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없다.”

    “할아버지, 아버지도 있잖아요.”

    “네 말대로라면 젊은 신장을 줘야 맞잖아. 기준이에겐 네 신장이 더 필요할 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안을 포기하는 게냐?”

    고기웅은 완벽한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준 형을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준이는 올라오고 있나?”

    “네. 제주도에서 출발했다는 연락 받았습니다.”

    “그래. 잘됐군.”

    * * *

    한편 김성현은 호텔 내 입점한 샬롯 매장의 인테리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상당히 신경 쓴 게 표가 난다.

    외장재의 마감이나 목재로 짜여진 전체적인 틀, 거기에 바닥도 대리석으로 다시 깔았다.

    회사가 힘들고 불안한 와중에도 자신의 계획을 믿고 실행해준 회장의 배려에 김성현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운다. 우는 거 맞죠?”

    강백현의 짓궂은 농담에 김성현이 애써 웃음 짓고 대답했다.

    “아니거든요?”

    “에이~ 우는 거 맞는데? 진희 씨, 연주 씨, 실장님 웁니다. 감격해서 우는 것 같은데?”

    강백현의 말에 고연주가 혀를 쯧쯧 차며 지적했다.

    “놀리면 어떻게 해요.”

    “놀리는 거 아니에요. 어색할까봐, 웃으라고 농담한 겁니다. 오늘 같이 행복한 날 웃어야지, 울면 되겠어요?”

    김성현이 백현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요. 아직 삽도 뜨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울면 안 되죠. 저 회장님께 전화 드릴 테니까 조금만 조용해주세요.”

    김성현은 바로 자신의 아빠인 김도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성현아.

    “아빠, 인테리어된 것 확인했어요. 원하던 실내디자인 그대로 나온 것 같고, 마감도 꼼꼼하게 잘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 아니야. 잘해봐. 성현아, 부담 갖지 말고. 아직 시간 많으니까. 나도 방방곡곡 뛰면서 회사 정상화될 때까지 노력할게.

    “네. 저도 노력할게요. 고마워요. 아빠.”

    채권 만기까지 앞으로 3개월. 앞서 연장 신청한 1월 만기 회사채는 응찰자가 없었고, 때문에 급하게 호텔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그렇게 막은 금액이 226억원.

    2월 도래금액 158억, 3월 도래금액 51억, 그리고 4월 도래하는 회사채 만기 2945억.

    경영권 정상화를 위해 돈 되는 자산을 정리중이지만, 잔존만기 80일짜리 2945억 회사채를 막을 자신은 도저히 없는 김도한 회장. 그는 지금도 호텔자산 매각을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있었다.

    “백현 씨, 와줘서 고마워요. 이제 알아서 할게요. 내려가 봐요.”

    강백현은 김성현의 작별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이 여기 있어봐야 짐이나 다름없다. 이제 런칭을 위해 보도자료도 내야하고, 세관을 통해 물품을 수입해서 매장의 인테리어와 어울리게 진열하는 일도 있다.

    호텔과 협업하는 새로운 사업인 만큼 기존 샬롯 직원들의 근무를 일부 전환해서 호텔별로 재배치를 해야 하고, 그에 따른 교육도 새로 해야 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메리 프랑수아는 샬롯에서 신규 런칭한 브랜드지만 기존 브랜드와 비교해 인지도 면에서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고급스럽게, 럭셔리하게 보이도록 외관 장식부터 하나하나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 실장님, 이제 잠도 못 자겠네. 갈게요. 박 비서님! 저 집까지 태워주세요.”

    강백현은 아쉬운 헤어짐을 뒤로 하고 박창현을 불렀다.

    김성현이 손을 흔들자 강백현이 그 손을 잡으며 물었다.

    “숙제 안 할 거예요?”

    “여기서?”

    “큰 거 말고, 작은 숙제. 지금 해요.”

    강백현이 방긋 웃으며 김성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자, 김성현이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익숙한 듯 양 팔을 백현의 목에 감고 몸을 밀착시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에서 야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진짜, 누가 커플 아니랄까봐.”

    “어머머머머, 실장님, 대범하셔.”

    “헐… 아가씨.”

    주변에 고연주와 윤진희, 박창현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김성현이 감았던 손을 풀고 강백현을 밀어냈다.

    강백현도 쑥스러운 듯 몸을 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김성현은 애써 하하하, 하고 웃더니, 강백현에게 장난조로 말했다.

    “다음부터 공공장소에서 갑자기 훅 들어오기 없어요. 조심히 가요.”

    강백현은 인사 대신 볼에 뽀뽀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 다음은 손을 흔들었다.

    ‘성현 씨, 꼭 성공해요. 할 수 있다는 모습, 꼭 대중에게 보여줘요.’

    * * *

    호텔을 빠져나온 강백현은 박창현이 운전하는 차량에 탑승했다.

    박창현은 질투 반 부러움 반의 표정으로 백현에게 말했다.

    “찐하더라?”

    “아, 네.”

    “진짜 결혼하냐?”

    “아직 그런 얘기 없어요. 이제 막 만나는 사이죠.”

    “우쭈쭈~ 그랬어요? 이제 막 만나는 사람들이 『작은 숙제, 지금 해요.』 이런 말을 하냐?”

    박창현의 말에 강백현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화제를 돌렸다.

    “날씨 좋네요. 뭔가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미 잘 된 것 같은데, 메리야트 그룹의 사위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지.”

    박창현이 부럽다는 투로 말하자 강백현이 현실을 꺼내들었다.

    “박 비서님도 그게 아닌 거 알잖아요. 이제 곧 위기가 올 거고, 그걸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김도한 회장님을 비롯해서 메리야트 그룹의 미래가 결정되겠죠. 저는 뭐, 논외로 하고요.”

    “크크크, 아무튼 부럽다. 부러워. 집이 부주시지?”

    “네. 저번에 부주시 온 적 있으시죠?”

    “어. 보육원에 아가씨 모시고 가서 너 처음 봤었잖아. 걱정 마라. 편안하게 데려다 줄게.”

    강백현은 차창 밖 풍경을 보며 여유를 즐겼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 그리고 행복.

    김성현에게는 인생을 건 도전일지도 몰랐지만, 사실 강백현에게는 많은 사건 중 하나에 불과했다.

    “백현이 넌 무슨 생각으로 사냐?”

    “모르겠어요. 사실 제 꿈은 5급 공채에 붙어 비리의 온상인 부주시의 시장을 몰아내고 크게 복수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 꿈을 이루고 나니 뭔가 허무한 기분이네요. 근데 그걸 왜 물으세요?”

    “가끔은 이렇게 아무생각 없이 여유롭게 사는 게 좋지 않나 해서.”

    박창현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동차의 엑셀을 밟았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세요?”

    “본래는 나는 좀 불안했는데 말이야. 도련님 저렇게 되고 나서 보니, 지금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드네. 회사도 어려운 시기이고, 만약 회사가 잘못 되면 당분간은 그냥 떠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박창현의 말에 강백현이 씩 웃었다.

    “박 비서님 덕분에 하나 깨달은 게 있어요.”

    “뭐냐.”

    “제가 고민한다고 바뀌는 건 없다는 점이요. 사실 저도 공무원 조직 내에서 굉장히 혼란스럽거든요.”

    “공무원이 혼란스러울 게 뭐가 있어.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조직이 공무원인데.”

    “꼭 그렇진 않아요. 컨트롤 타워가 매번 바뀌니까 모순이나 갈등이 항상 생기거든요. 회사에서도 그룹 전체에서 보면 김도한 회장님을 따르는 분이 있는가 하면, 김도희 회장님을 따르는 분도 있잖아요. 공무원도 마찬가지에요. 대통령이 이끄는 정책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죠.”

    “넌 어디 쪽이야?”

    “저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뭐야. 그 모순적인 말투는. 결국 결정 못했다는 거잖아.”

    “맞아요. 전 그 정책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지 못했으니까요. 다만…….”

    박창현은 신호등 앞에 대기하면서 입을 다문 강백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뭔가 신비한 아우라가 펼쳐진 것만 같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했을까? 그 고민의 결과가 백현의 얼굴에 걸려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시 비리를 절대 괄시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잘못된 선례와 관례를 바로잡아 대한민이라는 나라를 좀 더 깨끗하고 온전한 국가로 만드는 일. 박 비서님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네요.”

    강백현은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가슴에 담았다.

    절대 굽히지 않겠다고.

    자신이 감사원에 지원한 이유를 잊지 않고 끝까지 초심을 지키겠다고.

    “다 왔다. 오늘 고생 많았어. 실장님 행복해보이더라. 너랑 잘 됐으면 좋겠다.”

    “박 비서님도 어울리는 짝, 빨리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응. 즐거웠어.”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 맞다. 그거 들었냐? 성한 그룹 회장님, 또 신장 악화되었단다. 그것 때문에 성한 그룹에서 회장님에 맞는 신장 찾느라 분주하다고 하던데.”

    “네? 성한 그룹이면 고기웅 본부장?”

    “어. 맞아. 고기웅 본부장 있지. 그거 아냐? 고기웅 본부장이 10년 전인가? 회장님한테 신장 안 주려고 마약 손댔다던 이야기도 있었는데.”

    강백현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잠깐만요.”

    “왜? 왜! 집에 안 들어가?”

    “고기웅한테 전화 좀 해보고요.”

    강백현이 고기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뭐지? 윤수 건강검진은 뭐였어?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박창현은 얼굴이 딱딱해진 강백현을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왜? 뭔데?”

    “아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고기웅 본부장하고 전화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전화를 안 받아요.”

    “뭐가 그렇게 심각한데.”

    “확실한 게 아니라서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알아봐줘?”

    “네? 어떻게요?”

    “내 사촌동생 지훈이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걔가 고기웅 본부장 수행비서니까.”

    박창현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사촌동생에게 전화를 거는 박창현.

    - 어. 창현이 형, 잘 지냈지?

    “야. 고기웅 본부장, 전화를 안 받는다는데 무슨 일 있냐?”

    - 아, 형도 소식 들었구나. 우리 회장님이 본부장님한테 신장 떼서 기준 도련님 드리라고 그랬대.

    “고기준 도련님? 그 성한 그룹 회장께 신장 드린 그 분?”

    - 응. 그거 안 주면 집안에서 쫓겨날 생각 하라고 호통을 치셨나봐. 지금 이식 수술 중이야. 인터넷 열심히 찾아보더니, 신장 이식해도 일상생활에 크게 문제없을 거라고 해서 눈물 흘리면서 수술하러 들어가더라. 난 100억원 줘도 신장은 못 떼 줄 것 같은데. 재벌이 참 무서워. 맞지?

    “응. 고맙다. 다음에 통화하자.”

    - 응. 형도 잘 지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기에 모든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백현이었다. 박창현이 멍한 얼굴의 백현에게 물었다.

    “큰일이 있었네. 신장 이식 수술 중이라는데? 넌 왜 이렇게 흥분한 거야?”

    그때, 강백현의 핸드폰에 수신된 문자.

    [윤수] : 형, 언제 들어와? 배고파.

    강백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릴게요.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그래. 수고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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