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29화
고 회장은 김 박사와 통화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기웅이 이놈! 혼외 자식이 있었어?’
아들 놈 하나는 처음부터 버린 자식이라고 취급했지만, 그래도 막내 손주 고기웅은 믿고 있었다. 아무리 허튼 짓을 해도 경영에 대한 의지와 배우려는 자세는 진실이라고 믿었기에, 여성편력도 한 때의 일이라며 웃어 넘겼던 고 회장이다.
근데 뭐? 혼외 자식이 있어? 그리고 그 아들을 찾자마자 신장 적합도 검사를 시켜?
천하의 몹쓸 놈. 이제까지 보였던 행동들이 모두 재산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니.
고 회장은 고심 끝에 고기웅을 호출했다.
“기웅아. 준비 됐니?”
“할아버지,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할아버지한테 딱 맞는 신장을 제가 찾았어요.”
고기웅은 신이 나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신장은 아끼고.
“그래? 그거 좋은 소식이구나.”
“중국인 꼬마인데, 곧 세상을 뜰 것 같대요. 그래서 장기기증 해달라고 그쪽 부모님께 부탁드려봤더니, 너무나 쉽게 허락해주셔서 사례비도 지급해드렸어요.”
“음… 조직검사도 이상 없고?”
“네. 김 박사 말로는 전부 일치한대요. 일주일 동안 전국을 수소문 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 이제 건강해지실 거예요.”
“만약 그 아이가 안 되면?”
“그럼 제 걸 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저희 성한 그룹의 기둥이시니까요.”
악독하고 거짓 가득한 표정이 손주의 얼굴에 걸린 것을 확인한 고 회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만약 김 박사에게 정보를 전해듣지 않았다면 저 연기에 속아 넘어갔을 거라 생각하니 울분이 치밀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두 손주.
하지만 오늘 고 회장은 두 손주 중 하나를 마음속에서 지워나갔다.
“그래. 기웅아, 이 할애비가 하나만 물어보자. 네 건강은 문제없는 거지? 너한테 회사를 물려줄까 했는데 건강에 문제 있으면 안 되잖니. 저번에 신장도 마약에 찌들어있다는 말이 신경이 쓰이는데. 기업을 물려받는데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아, 지금부터 운동 열심히 할게요. 신장도 회복할 수 있도록 건강관리 열심히 하고, 마약도 일절 손대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릴 수 있어요.”
고기웅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주주나 임원들을 설득하려면 결과가 있어야 해.”
“결과요?”
“그래. 건강검진 받도록 해. 박 비서 통해서 준비해놓을 거니까, 마약에 장기가 손상되지 않았기를 간절히 하자꾸나. 손상되지 않았다면 회사의 모든 권리를 네게 상속해주마.”
할아버지의 말에 고기웅은 자신의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던 것, 절대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인생의 목표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가 성한 그룹을 접수하면?’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 중 하나, 성한 그룹.
거기에서도 또 최고의 위치를 마다할 사람은 없을 터.
고기웅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네.”
* * *
고기웅은 곧장 1층으로 내려와 윤수를 데리고 있는 백현네 가족에게 말했다.
“강 비서, 결과 확인해 봤는데….”
“네. 저희도 확인했어요. 하지만 윤수한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그래. 내가 준비되면 바로 데려가도록 할게. 내 자식이지만, 아직 난 총각이니까 준비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거든. 가족들에게도 말해야 하고,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맡아줄 수 있겠어? 아, 양육비 정도는 안 되겠지만, 돌봐줄 동안 이 정도 금액이면 조금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준비했어.”
고기웅이 건네는 돈을 받은 강백현이 말했다.
“네. 하지만 너무 길게 끌진 마요. 아빠 엄마, 집에 가시죠. 윤수야. 돌아가자.”
“응. 형, 나 졸려. 검사 너무 많이 했나봐.”
“그래. 집에 가서 푹 자. 자고 일어나면 맛있는 거 사줄게.”
“응.”
강백현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들어 있는 윤수를 보며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
“친자 맞지?”
“네. 그런가 봐요. 아는 사람이라 더 걸리네요.”
“부자라며. 윤수한테 잘된 거지 뭐.”
“그렇긴 한데, 고기웅 본부장이 좋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지 자식새끼 찾으러 온 거 보면, 핏줄이 끌린 거겠지. 설마 자식한테 해코지 할까.”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의견을 보탰다.
“그래. 눈 안에 넣어도 안 아픈 게 자식이야. 백현이 너도 너무 걱정 말고, 윤수 맛있는 거나 사주자고.”
“네.”
“근데 얼마 넣어놨어? 액수가 궁금하네.”
“네?”
“5만원 짜리가 몇 개야. 하나, 둘, 200장? 200장이면 천만원이니?”
강백현은 어머니의 말에 동의했다.
1000만원, 결코 작은 금액은 아니다. 자기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 * *
다음 날, 강백현은 연가 신청을 내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2시간 40분 거리까지 손수 이동하는 이유는 김성현이 오는 날이기 때문.
“연주 씨, 여기요!”
백현이 손을 흔들자, 프랑스에서 막 도착한 고연주가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백현 씨, 이것 좀 들어줘요.”
“네. 이게 신상인 거죠?”
“넵. 실장님이 손수 디자인한 명품들이죠.”
“실장님은요?”
“곧 올 거예요.”
백현은 세관을 통과한 물품들을 바라보았다.
샬롯의 새로운 브랜드 《메리 프랑수아》.
누가 봐도 프랑스 명품 브랜드 같은 느낌이지만, 디자인을 한 사람은 김성현.
“오오오, 프랑스 장인들이 손수 만든 거라면서요.”
“네. 30년 이상 경력의 장인들이 실장님이 그린 디자인을 보고 직접 만든 거지요. 마감도 엄청 꼼꼼하게 잘되어 있어요. 기계가 한 거랑 완전 달라요.”
때마침 뒤늦게 입국장에 들어선 김성현을 본 백현이 손을 흔들었다.
“이쪽이에요.”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금방 왔죠. 짐은 이게 전부에요?”
“네. 일단 기본 세팅할 것만 가져왔고, 나머지는 3일 안에 세관 통과될 것 같아요.”
“고생했어요. 바로 호텔로 갈 거죠?”
“네.”
“바로 모실게요. 차량도 준비 마쳤어요.”
백현은 걱정 말라는 손짓을 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 어. 도착했어?
“네. 박 비서님은 다 오셨죠?”
- 응. 단기주차장으로 와. 거기 3D로 오면 돼.
“네. 알겠습니다.”
박창현 비서의 대기까지 확인한 백현. 이를 본 윤진희가 넉살 좋은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백현 씨, 실장님하고 사귄다면서요.”
“네?”
“잡아떼지 말아요. 이미 다 들었어요. 아~ 부럽다. 나도 남자친구 있으면 좋을 텐데. 어디 좋은 사람 없나?”
윤진희의 말에 강백현이 물었다.
“박 비서님은 어떠세요?”
“박 비서요?”
“네. 박창현 비서요. 얼굴 아시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랑 제가 왜 만나요? 백현 씨는 제가 얼굴도 안 보는 줄 아세요?”
진심으로 화를 내는 윤진희의 말에 강백현이 김성현에게 SOS를 요청했다.
“백현 씨, 농담도 그건 좀 심했어요. 알죠?”
“아니~ 박창현 비서, 성실하잖아요. 돈도 꽤 모았고. 착실하고.”
강백현은 일단 자신과 같이 몇 달을 지낸 박창현 비서를 최대한 어필했다. 그러나 여자들의 싸늘한 시선 뒤로 험담이 이어졌다.
“얼굴이 문제죠.”
“어리버리한 것도 문제고요.”
“여자는 남자를 볼 때 그 남자의 미래를 봐요. 못 생긴 것도 어리버리한 것도 참는데, 자기 생각 똑바로 말 못하는 남자는 못 참아요.”
강백현은 여자 셋이 속사포로 말하는 탓에 한 대 맞은 듯 말문이 막혔다.
“마르코 씨는요?”
“그러네. 마르코 어디 있어? 우리랑 같이 나오는 것 아니었나?”
여자 셋이 마르코를 찾기 위해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때, 마르코가 누군가와 재회의 포옹을 하고 있다.
강백현은 마르코와 포옹을 하는 사람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조성민 MD잖아?’
대현백화점 판교점 상품기획자를 맡고 있는 조성민.
마르코와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둘이 다시 사귀어요?”
“네. 프랑스에 있을 때 마르코가 전화 진짜 오래 붙들고 있었어요. 짐작은 했는데. 오~ 멋있어. 멋있어.”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조성민과 작고 아담한 마르코의 포옹. 눈살이 찌푸려지는 백현에 비해 여자 셋은 아름다운 사랑을 응원하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박창현이 끌고 온 카니발 차량에 도착했다.
세관을 통과한 명품들을 차량에 싣고 사람들이 차량에 타기 시작한다.
“박 비서님, 오랜만이에요.”
“응. 백현이 너도 얼굴 좋아 보인다? 실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창현은 차량에 탑승한 사람들을 확인하고 메리야트 호텔 본점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잠깐 휴게소 들렸다 가요. 화장실 좀 갔다 오죠.”
“네. 바로 주차하겠습니다.”
영종도 근처의 휴게소에 들린 박창현은 여자들이 화장실에 간 사이 혼자 남은 백현에게 물었다.
“백현아.”
“네. 박 비서님.”
“결혼 언제 하냐?”
“결혼은 아직 생각 없는데요.”
“나 외롭다.”
“박 비서님도 얼른 결혼하셔야죠.”
“뒤쪽에 그 머리 짧은 여자분, 남자친구 있냐?”
박창현의 질문에 강백현이 씩 웃었다.
“윤진희 씨 말하는 거예요?”
“아, 진희 씨구나. 딱 내 스타일인 것 같은데?”
“남자친구는 없는데, 힘드실 것 같은데요.”
“왜? 내가 뭐 어때서? 대기업에 다니는 비서잖아. 몸도 좋고.”
“얼굴이 안 되잖아요.”
“뭐?”
“아니, 얼굴 못 생겨서 싫대요.”
“야! 농담 하지 말고.”
강백현은 장난인 듯 받아치는 박창현의 말에 정색하며 답했다.
“농담 아닙니다. 제가 하늘같은 박 비서님을 두고 왜 농담을 해요?”
* * *
같은 시각.
고기웅은 김 박사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건강하시네요. 장기 모두 깨끗합니다.”
“그래요? 그런 거죠?! 나 건강한 거죠?”
“네. 장기이식 해도 문제없을 만큼 건강하십니다.”
“네?! 장기이식이라뇨. 김 박사님, 할아버지의 이식은 저번에 데려온 그 아이가 할 겁니다.”
고기웅은 이해를 못해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김 박사 뒤에서 고 회장이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기웅아, 네 자식이 있다는 건 들었다. 혼외자식이라며? 그 아이 장기이식 검사는 왜 한 거니?”
“할아버지, 잠깐만요. 제가 장기이식을 하고 싶지 않아서 안하는 게 아니고요. 진짜 해드리고 싶은데, 기왕이면 젊은 몸으로 해드리는 게 맞잖아요.”
“됐다. 난 너한테 신장 받을 생각 없다. 이미 건강한데? 난 팔팔해.”
“네?”
“회장님은 원래부터 건강하셨습니다. 고기준 도련님이 기증하신 신장이 아직도 잘 움직이고 계시죠.”
김 박사의 말에 고기웅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뭐야. 이제까지 나 혼자 개고생한 거잖아. 그것보다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일종의 테스트였나? 그럼 아버지가 이긴 거야?’
“할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버지도 혼외자식이 있어요.”
“뭐?!”
“그러니까 저만 원망하시지 마시고. 아버지도 같은 사람이니까,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고 회장은 손주나 자식들의 행동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메인은 지금부터다.
“기웅아,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둘 중 하나로만 결정해야 한다.”
“네. 할아버지.”
“그래. 내가 알아보니까 기웅이 네 신장이 기준이한테 이식이 가능하다고 하더구나.”
“네?”
“기준이한테 장기이식을 하고 회사에 남을래? 아니면 장기이식을 포기하고, 회사와 집안에서 나갈래?”
“기준이요? 기준이 형이요?”
고기웅의 말에 김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준 도련님이 제주도에서 요양 중이신 것은 고기웅 도련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알죠.”
“남은 신장 하나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 투석치료 중이셨는데, 때마침 고기웅 도련님의 신장이 이식에 적합했습니다.”
김 박사의 말에 고 회장이 말을 보탰다.
“수술 준비해. 아~ 기준이한테는 네가 신장 줬다는 소리 입 밖에도 꺼내지 말고. 마음 착한 기준이가 알면 얼마나 속상할꼬. 쯧쯧, 불쌍한 것.”
“할아버지, 저도 손주잖아요.”
“그래. 손주지. 신장 2개가 멀쩡한 손주.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네 스스로가 잘 알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