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127화 (127/139)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27화

“강 팀장,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네.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해. 알았나?”

고태준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강백현은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처음부터 중립이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적 견해나 논리 상관없이 정해진 규칙과 법규 내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이고 싶었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헌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따라야 할 것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인데, 왜 누군가의 편이 되어야 하는 건가?

작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차수진이라는 희생양을 발판으로 특정한 조직에 소속해서 활동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강백현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그런 활동으로 공직 사회에서 승진이 빨라진다고 해도 전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장님, 저는 누구한테도 소속되고 싶지 않습니다.”

“인마! 더 위로 올라가고 싶지 않아? 근속승진 말고, 남들보다 더 빨리, 남들보다 더 위대한 삶을 살고 싶지 않냐고!”

고태준 실장은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짜놓은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는 부하들의 행동이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약 3개월 동안 강백현을 자신의 편이라고 믿고 부지사, 도지사에게 키워볼만한 인재라며 어필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뭐?

누구한테도 소속되고 싶지 않아?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럼 이제까지 보여준 행동은 뭐였는데?

부주시장을 비롯한 놈들에게 최소한의 자비조차 베풀지 않았던 그 냉혈한 모습은 뭐였는데?

너 우리 쪽이잖아! 너 처음부터 우리 편이었잖아. 너 머리 좋은 놈이잖아!

고태준은 백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30대 초반에 저런 기회가 있었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텐데.

이 기회를 놓친다고?

“강 팀장. 앉게.”

“아닙니다. 나가보겠습니다.”

“앉아!”

고태준 실장은 강백현을 억지로 앉히고는 차우현을 불렀다.

차우현은 소파에 앉은 강백현을 보며 실장에게 물었다.

“실장님, 부르셨습니까?”

“차 주무관이 해야 할 게 있어.”

“네. 뭡니까? 말씀만 하십쇼.”

“강 팀장 데리고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조금 흥분한 것 같은데, 흥분 좀 가라앉히고.”

“아, 네. 일단 다녀오겠습니다. 팀장님, 일어나시죠.”

차우현은 굳은 표정을 한 강백현을 억지로 일으켜 밖으로 나오며 말을 꺼냈다.

“차수진 주무관 때문에 그러시죠?”

“알고 있었습니까?”

“수진이가 저랑 6촌입니다. 가깝고도 먼 게 친척이라지만, 같은 공무원이니 모를 리 없지요.”

작은 도시 홍성.

홍성 내 공무원들끼리는 대부분 아는 사이. 한 집안 걸러 한 집안만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연결되어 있다.

“수진이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지훈 그 새끼가 얼마나 해먹었는지 더 이상 꼴보기 싫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경찰을 부른 거고요. 문서도 일부러 감찰팀으로 안 보내고 감사팀으로 보냈대요.”

“그런 거였습니까?”

“네. 오복주 감찰팀장은 주지훈하고 한 패거든요. 작은 뇌물도 마다하지 않는 썩어빠진 놈들이죠. 그런데 팀장님은 원리원칙대로 업무를 진행한다고 이미 소문이 나 있다 보니까, 일부러 우리 팀에 보냈나 봐요.”

“그걸 차 주무관님도 알고 있었군요?”

강백현의 말에 차우현이 고개를 숙였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까지 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요.”

“후-우, 담배 있습니까?”

“아- 피지 마십시오.”

“한 대 주십시오. 피고 싶습니다.”

“안 됩니다. 비흡연자한테 권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안 좋은 일이지요. 아무튼 수진이가 책임지고 끝내기로 한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업무 복귀하시죠. 1년 정도 휴직하고 다시 복직한다고 하니까 그때 되면 괜찮아질 겁니다. 시간이 약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네. 이미 결정된 일이고, 수진이도 휴직 신청 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그냥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징계사안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내부고발자로 몰리는 게 저로서는 마음이 쓰여 미치겠습니다.”

“압니다. 그 마음 너무나 잘 압니다. 하지만 공무원 바닥이 하루이틀 이랬습니까? 그리고 실장님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강 팀장님 밀어주느라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성과상여금도 저희가 받았고요.”

“하지만 전 정치적 견해나 논리에 휘둘리고 싶지 않습니다. 실장님이 어느 쪽 편이 아니라고 하면 저도 눈 한 번 감고 없던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내겠지만, 그게 아니잖습니까.”

강백현의 말에 차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렇죠. 이 문제에 답은 없습니다. 팀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시느냐에 따라 상황은 많이 달라지겠지요. 팀장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정부패, 비리 척결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오신 것 아닙니까?”

강백현은 차우현의 질문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행동들을 떠올렸다.

부주시에서 겪었던 수많은 부조리.

그런 폐단으로 망가져버린 공무원 조직.

그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했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렇죠. 분명 그렇습니다만.”

“결정을 못하시는 거죠? 이성적으로 판단해볼 때, 당장 눈앞에 있는 작은 부조리를 받아들여야 더 큰 부조리를 막을 수 있는데도, 그 작은 부조리를 받아들이시지 못하는 거죠?”

“……”

차우현이 현 상태에 대해 정확히 진단하자 강백현의 말문이 막혔다.

“이제 결정하십시오. 대의를 위해 작은 신념을 버리실 겁니까? 작은 신념을 위해 대의를 버리실 겁니까?”

차우현은 강백현의 먼 훗날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성공할 때마다 지방대라는 그 학벌이 꼬리표처럼 그의 인생을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하위 20% 삶이 강백현을 괴롭히고 또 괴롭힐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날에 사라진 지 오래.

2016년, 올해를 마지막으로 사법고시도 사라지고, 돈 있는 집안 자식들만 로스쿨에 입학하여 법조인이 될 수 있다.

서울과 지방의 정보력 차이.

그로 인해 서울, 그것도 대치동 인근에 사는 학생들은 더 좋은 성적으로 더 좋은 학교에 간다.

아파트 가격 10억이 우스운 대한민국의 부동산 가격.

그런 사회에서 강백현의 성공은 더욱 더 비난받을 것이다.

‘하지만 팀장님은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겠죠.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 있게 펼치고, 스스로가 지키기 어려운 규율을 하나하나 지켜가는 모습에 실장님이 인정하고, 부지사님과 도지사님이 인정하신 겁니다. 그래서 키워주고 싶어 하는 거고요. 이 기회를 놓치실 겁니까?’

차우현은 그 말을 내뱉진 않았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사무관 강백현은 여기까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속내를 파악하고도 남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의가 뭔지도 모르겠고, 제 신념이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념이면 신념이지, 작은 신념은 뭡니까?”

강백현의 말에 차우현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아, 몰라. 팀장님 마음대로 해요. 난 말할 거 다 했습니다.”

“뭘 다합니까? 저보고 늙어죽을 때까지 공무원 하라는 말밖에 더 했습니까? 대의요? 저도 사람이고 상처 입습니다. 누구 하나 저랑 뜻을 맞춰주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대의를 이룹니까? 부정부패, 비리척결. 말로는 정말 좋은 표현이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정말 깨끗합니까? 청와대 보십쇼. 매일 자화자찬, 대국민 사과를 해도 모자를 판에 자기 잘했다고 언론 플레이하기 바쁘죠. 윗선부터 더러운데 제가 노력해봐야 뭐가 변하겠습니까?”

차우현은 강백현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윗선을 바꿀 힘은 없었다. 이제 강백현의 말을 들어볼 차례였다.

“그래서 어떻게 결정하실 겁니까?”

“우리 모두는 올바르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리사욕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기 시작하면 바로 지금의 정치인들처럼 되는 겁니다. 한쪽 논리에 사로 잡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한 타협이 결국 지금의 여당과 야당을 만든 것이지요. 저는 타협하지 않을 겁니다. 실장님께서 한 제안으로 제 마음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강백현의 말을 들은 차우현이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좋습니다. 팀장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위로 못 올라갑니다.”

“위로 올라갈 생각 없습니다. 당장 내앞에 있는 부정부패한 사람들 처리하기도 바쁜데, 무슨 승진입니까. 저는 제 역할을 다 할 뿐입니다.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면 정말 죄송하지만, 전 이런 사람입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강백현은 자신의 결심을 드러냈다.

사실 여기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

그래서 최장철 국회의원과 도지사 등, 양쪽에 오해를 사게 한 행동도 지금에 와서는 후회가 되었다.

차우현은 강백현의 결심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또 뭐 하실 말씀이 남았습니까?”

“네. 자기편이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죠?”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누구 하나 자신과 뜻을 맞춰줄 사람이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기억 안 나십니까? 아무튼 이제 그 뜻을 맞춰줄 사람이 한 명은 생긴 것 같습니다.”

“네?”

“제가 팀장님 뜻을 맞춰드리겠습니다. 남자는 한 입으로 두 말 안 합니다. 그리고 제가 뱉은 말에는 책임을 집니다. 그러니 팀장님도 자신이 뱉은 말에는 책임지시는 겁니다.”

“……”

“대답하십시오. 책임지시는 겁니다.”

강백현은 차우현의 진지한 눈빛에 응했다.

“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한 달 뒤, 강백현은 차우현과 했던 이 대화를 후회했다. 그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을 줄은 몰랐으니까.

* * *

집에 돌아온 백현은 자신을 반겨주는 동생을 보며 씩 웃었다.

“윤수, 오늘 학원 갔다며.”

“응. 피아노 처음 쳐 봤어. 형이 돈 낸 거라며. 아저씨가 말해주셨어.”

강백현은 윤수의 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원래 어릴 때는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돼. 피아노 다니다가 적성 안 맞으면 말해. 미술학원 보내줄게. 형이 여유가 없어서 하나 밖에 못 보내준다. 이해하지?”

“응. 그런데 학원비 엄청 비싸던데, 형 괜찮아?”

“그래. 형 직업이 공무원이야. 너 학원 보내줄 돈은 있어.”

“알았엉. 형 같이 롤 할래?”

“롤? 저번에 그 욕하는 게임?”

“욕하는 건 아니고, 그거 엄청 재밌거든? 같이 듀오 한 번 하자.”

“나중에. 형 일단 좀 씻자.”

“응.”

윤수는 바로 컴퓨터를 켜 게임을 시작했다.

백현은 윤수의 게임하는 모습에 저러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오죽하면 학원 다녀와서 게임부터 켤까 싶기도 했다.

정상적인 집안에서 자랐다면 정말 행복하게 지냈을 텐데, 도대체 윤수 아빠는 누구길래 이렇게 착한 자식을 버렸을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집에 원장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 원장님. 윤수 때문에 전화하셨죠? 윤수 잘 지내요. 전화 바꿔드릴까요?”

- 백현아, 윤수, 친아빠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혹시 시간되면 올 수 있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