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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122화 (122/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22화

    “알아볼게요.”

    “있냐? 있어?”

    “생각나는 애가 하나 있어요.”

    “그럼 됐다. 됐어! 누구야? 내가 알아볼게. 이름하고 나이만 말해.”

    “제가 알아볼게요.”

    * * *

    10년 전, 고기웅의 나이 겨우 스물 셋.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그가 만난 건 가난한 국비 유학생 박희진. 그녀가 절망한 듯 소리쳤다.

    “야. 너 진짜 이럴 거야? 이게 얼마나 상처 주는 말인지 알아?”

    “박희진, 사랑이 밥 먹여주냐? 난 그냥 너 엔조이라고 했잖아.”

    “너 진짜 나쁜 새끼야.”

    “됐고, 너 돈 없지? 병원비 계좌이체 해줄 테니까 당장 가서 낙태수술 받아.”

    “아 진짜 그게 나한테 할 말이야?!”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에 하룻밤을 허락한 박희진은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고기웅의 말에 절망했다.

    고기웅은 며칠 째 학교에 나오지 않는 박희진의 소식이 궁금했다.

    ‘계좌번호 말하라니까 왜 말 안 했지? 지웠겠지? 안 지우면 곤란한데.’

    그래서 희진의 기숙사 동기인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 혹시 희진이 어디 간 줄 알아?”

    “한국 돌아간다고 했어.”

    “왜?”

    “기웅, 혹시 너한테 연락 오면, 미국에선 병원비 너무 비싸서 한국 가서 수술한다고 전해달래. 그런데 무슨 수술이야? 표정이 굉장히 안 좋던데. 혹시 죽을 병 걸린 거 아니지?”

    그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박희진은 연락이 없었다.

    한국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들었으니 관심도 없었고, 이후 양육비를 달라는 요구도 없어 고기웅은 잘 끝난 거라 생각하고 잊고 살았다.

    그 이후, 고기웅은 여성과의 관계가 끝나면 철저하게 금전으로 보상을 했다. 찝찝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혹여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구차하게 굴지 않도록.

    기브 앤 테이크.

    상대에게 만족스런 금액을 선사하고, 내가 원하는 여성과 뒤탈 없는 잠자리를 갖는다.

    박희진을 제외하면 이제까지 철저하게 그 법칙을 지켰고, 단 한 번도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

    ‘만약 낳았다면 한국 나이로 11살 정도 됐겠네.’

    그때, 귀찮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고기웅을 재촉했다.

    “이름하고 나이만 말해. 내가 알아본다니까.”

    “제가 알아볼게요. 그러니까 아버지, 더 이상 신장 기부하라는 소리 하지 마요. 알았어요?”

    “이 자식이!”

    “아무튼 쌤쌤입니다. 저도 알아볼 테니까, 아버지도 또 다른 자식 있나 알아보세요. 아시겠어요? 아무튼 제 신장은 기증 못합니다.”

    * * *

    한편, 백현은 씩 웃었다.

    “윤수야. 방이 좀 칙칙하다. 괜찮지?”

    옷장으로 쓰던 방.

    백현은 10년도 더 된 옷을 박스에 넣으며 말했다.

    “형, 괜찮아.”

    “그래. 윤수 너도 형처럼 이 옷들 박스에 넣어.”

    “응. 근데 형, 이거 옷 다 어떻게 할 거야?”

    “아, 이거 우리 엄마 아빠 둘 다 안 입는 거라서, 필요한 사람들한테 기부할 거야.”

    “아~ 그렇구나.”

    22살 차이나는 동생.

    형이라고 불리기에도 민망한 나이 차이.

    어떻게 보면 아빠와 아들 같은 사이라서 백현은 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윤수야. 네 친구들은 요즘 뭐하면서 놀아?”

    “롤.”

    “롤? 그게 뭔데?”

    “형, 엘오엘도 몰라? 우와. 진짜 오지네.”

    윤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백현은 삐진 표정이 되었다.

    “하나도 못 알아듣겠거든? 엘오엘이 뭔데?”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 있어. 우리 학교 친구들 중에 그 게임 모르는 사람 없어. 형 나 골드라서 친구들한테 인기 많아.”

    “골드는 또 뭔데?”

    “형, 집에 컴퓨터 있지?”

    “응.”

    “그럼 내가 보여줄게. 인터넷 돼?”

    “당연히 되지.”

    “응.”

    윤수가 컴퓨터를 킨 채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백현은 게임을 좋아하는 초등학생 윤수가 마냥 신기했다.

    자신이 어릴 때는 PC게임보다는 슈퍼컴보이가 유명했는데.

    “형, 내가 야스오로 캐리하는 거 보여줄게. 질풍검으로 미니언 타면서 딜교하면 쌉 이득이거든.”

    윤수가 캐릭터를 고르며 말했다. 그러자 컴퓨터 화면에 윤수를 비난하는 욕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dfalsd41 : 아, 벌레새끼, 서폿 야스오 뭔데.

    SIEd135 : ㅋㅋㅋ. 냅 둬. 이번 판 미드 오픈함.

    she121 : 야스오 충새끼. 서폿 야스오를 하고 있네?

    백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윤수에게 물었다.

    “다 너 욕하는 것 같은데?”

    “얘네들이 롤 잘 몰라서 그래. 지켜만 봐.”

    윤수가 방긋 웃으며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그런데 윤수의 팀 중 한 명이 자꾸 적에게 달려가며 죽어준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백현이 윤수에게 물었다.

    “쟤는 왜 저렇게 하는 거야?”

    “원래 게임에 정신병자 많아.”

    윤수가 다급했는지 채팅을 쳤다.

    입닥치면캐리함 : 안 던지면 캐리가능.

    그러자 아까 윤수를 욕하던 팀원들의 채팅이 올라왔다.

    she121 : 야스오충 새끼. 서폿 야스오를 하고 있네. 너 엄마 없지?

    dfalsd41 : 부모 없는 새끼들이 꼭 저런 픽을 하더라. 너 몇 살이냐?

    강백현은 채팅창에 올라오는 욕설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15분 만에 게임이 끝나버리고, 윤수는 억울한지 백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형, 내가 다음 판에서 캐리하는 거 보여줄게. 아, 팀원 잘못 걸려서.”

    백현은 부모 욕을 하는 게임이 탐탁치않아 화제를 돌렸다.

    “윤수야. 게임 끄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한 게임만 더 하면 안 돼?”

    칭얼거리는 윤수. 부모 어쩌구 욕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게 더 가슴이 아프다.

    “한 판 했잖아. 게임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뭐 먹을 건데?”

    “너 먹고 싶은 걸로.”

    “그럼 햄버거 사줘.”

    “그래. 가자!”

    “응.”

    생각해보니 요즘 윤수의 또래 애들은 나와서 노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학교, 학원, 집.

    “햄버거 맛있어?”

    “응. 지상 최고의 맛.”

    “웃겨. 감자튀김은 왜 안 먹어?”

    “먹어도 돼? 원장님이 몸에 안 좋다고 먹지 말라고 해서.”

    “괜찮아. 오늘은 특별히 형이 허락해줄게.”

    윤수가 조심스럽게 감자튀김을 먹더니 해맑은 표정이 나왔다.

    “진짜 맛있다. 너무 맛있어. 매일매일 먹고 싶다.”

    “매일매일 먹고 싶어?”

    “응.”

    “그럼 이상한 게임 하지 말고 공부해. 거기 게임하는 사람들, 욕 너무 많이 해서 보는 내내 스트레스 받더라.”

    “크응. 안 하면 친구들하고 놀 수가 없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반 남자애들 중에 롤 안하는 애 한 명도 없어. 다 해.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내려면 롤 잘 해야 돼.”

    “알았어. 대신 게임 너무 몰입하지 말고 공부도 열심히 하기. 알았지?”

    “응.”

    백현은 윤수가 오고 집안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을 알았다.

    사실 윤수를 꼭 데려올 필요는 없었다. 집으로 데려와서 살도록 하는 건 후견인의 역할을 넘어서는 것.

    윤수를 어릴 때부터 봤던 게 아니라면 집에까지 데려오진 않았겠지만, 이미 10년이란 세월이 있다 보니 윤수도, 아버지 어머니도 적응기간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윤수야. 속옷은 빨래통 안에 넣어야지. 아무데나 벗어놓으면 안 돼.”

    “네.”

    “드라마 좋아해?”

    “네. 시설에서는 밤 8시 넘으면 텔레비전 못 봐요. 근데 드라마 진짜 재밌어요.”

    “어린 게 드라마도 볼 줄 알고. 소파에 앉아서 봐. 너무 앞에서 보면 눈 나빠져.”

    “넵.”

    * * *

    월요일. 오늘은 실장님 등의 간부급들이 지역행사에 참여하는 날이다.

    “실장님, 오늘 태천 수산물축제, 도지사님이랑 같이 방문하실 거죠?”

    “아, 맞네. 누구랑 같이 가지?”

    “누구랑 같이 가셔야 합니까?”

    “실별로 2명 오라고 했거든. 강 팀장, 운전 가능하지?”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같이 가. 배차 신청 좀 해놓고.”

    “네.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백현은 갑자기 끼어든 업무에도 불만 없이 대응했다.

    배차를 신청하고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실장은 불만스런 말을 털어놓았다.

    “강 팀장, 노조 가입 아직 안 했지?”

    “네.”

    “아~ 진짜, 경기도 측에서 이제 간부급 이상 노조가입 자제해달라는 문자가 왔다고 확인해보라는데, 혹시 무슨 이유인지 아나?”

    백현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간부급 이상 노조가입을 자제하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노동자로 보는 게 아니라 사용자로 보는 게지. 일단 경기도는 조례부터 개정하고 입법추진도 한다더군. 맘에 안 들어. 경기도 걔네 진짜 정말 맘에 안 들어.”

    경기도라는 말이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최장철 의원의 지역구는 과천. 그의 끈이 닿아있는 경기도에서 시작된 물결은 점차 타 시, 도, 구로 전파될 것이다.

    ‘내 의견을 받아주신 거구나.’

    생각해보니 입법절차까지는 필요 없을 지도 몰랐다.

    공무원들의 발을 묶을 수 있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당장 조례를 개정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압박이 될 것이다.

    “출발하지.”

    “네.”

    태천, 수산물 시장에 도착한 백현은 시장 앞에 모인 공무원들을 바라보았다.

    태천 군수부터 그 밑에 국장, 과장까지 여럿이 나와 도지사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백현과 고태준 실장은 머쓱한 얼굴로 태천 공무원들에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청에서 오셨어요?”

    “네. 감사실장 고태준입니다.”

    “감사팀장 강백현입니다.”

    “도지사님은 언제 도착하시려나.”

    “저희랑 비슷하게 출발했는데, 10분 안에 도착하실 겁니다.”

    “아, 그렇군요.”

    태천군의 공무원은 백현에게 도지사의 도착시간을 듣고 곧바로 군수에게 달려가 상황을 전했다.

    “군수님, 도지사님 10분 안에 오신답니다.”

    “그래요. 이번에 모든 가게 30% 이상 할인하는 것 맞죠?”

    “네. 어촌계장 통해서 전달해놨기 때문에 문제없습니다.”

    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음, 개발과장, 지역 주민들이 좋아하겠죠? 좀 어수선해보여서 걱정되네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군수님이 부임하고 첫 행사다보니 걱정이 많으신 것 같은데, 다 문제없습니다. 알아서 잘 돌아갑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묘했다. 어민들이 단체로 몰려오기 시작한다.

    “태천 군수 어디 있어? 어떤 새끼가 이딴 행사 기획한 거야?”

    “저기 있네. 저 새끼네.”

    “아이고~ 우리 군수님! 미쳤어요? 행사한다고 금어기 제한을 걸면 어떻게 해. 야! 우리 먹고 살 거 생각 안 해? 안 해?”

    어민들이 군수를 향해 계란을 던지기 시작하자, 난장판이 벌어졌다.

    어떤 공무원들은 군수를 향해 날아오는 계란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어떤 공무원들은 군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몸으로 계란을 막아낸다.

    그걸 목격한 충남 도지사가 먼저 도착한 고태준 실장에게 묻는다.

    “고 실장, 지금 무슨 상황이야?”

    “어민들이 좀 화가 났나 봅니다.”

    “그래? 어떻게 하지?”

    “일단 행사 참여하지 마시고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는 저희가 상황 파악하고, 결과 전해드리겠습니다.”

    한편, 이제 막 부임한 태천군의 군수는 계란을 맞고는 당황한 듯 물었다.

    “아니~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금어기 제한을 어떻게 했기에 다들 화가 나셨어요? 네?”

    “아니 공무원 너희들 생각 좀 해라. 생각 없이 금어기 제한을 해버리니까 우리가 생계에 위협이 되잖아. 우린 뭐 먹고 살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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