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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121화 (121/139)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21화

김도한 회장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한때 호형호제 하던 고창훈이 부회장으로 있는 곳.

성한그룹과 메리야트 그룹은 IMF 이전까지만 해도 형제기업이라고 칭할 정도로 가까웠기에 신장병이 재발했다는 소식은 그에게 걱정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 * *

한편, 제주도에서 칩거 생활 중인 고기웅은 자신의 할아버지 고명규 회장의 신장병 재발 소식에 손을 바르르 떨었다.

“형, 진짜야? 할아버지가 또 신장병이 도지셨다고?”

“내가 그걸 왜 거짓말 하냐, 얼른 옷 챙겨 입어. 문안 인사 올리러 가야지.”

“하아! 미치겠네. 형이 신장 줬잖아. 근데 왜 재발해! 왜 재발하냐고!”

고기준은 자신의 동생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야. 고기웅, 넌 그렇게밖에 말 못하냐?”

“형이 신장 제대로 된 거 줬으면 이 사단이 났겠어?”

할아버지에게 신장이식을 하고 건강상태가 나빠진 고기준은 동생의 몹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자. 짐이나 챙겨. 아버지가 너 짐 싸들고 서울로 올라오래.”

고기준이 휠체어를 밀며 동생의 짐을 챙기자, 고기웅은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뱉어냈다.

“형, 이 상황이 즐겁지? 내가 형처럼 신장 뺏길 것 같으니까 기분 째지지? 어?”

“미친 놈. 그런 생각 안 해. 그리고 아버지 신장도 있잖아. 너랑 나, 그리고 아버지 셋 다 할아버지랑 조직적합항원검사 이상 없었던 거 기억 안 나? 아버지랑 잘 말해 봐.”

“아버지가 자기 신장을 포기할 리가 없잖아!”

고기웅이 심각성을 느꼈다.

조직적합검사 결과 할아버지에게 이식이 가능한 사람은 총 셋.

그 중 하나가 형인 고기준. 이미 10년 전에 할아버지에게 장기이식을 하고 지금은 제주도에서 요양 중이다.

그리고 두 번째, 그 사람은 아버지이자, 성한그룹의 부회장인 고창훈.

하지만 10년 전, 당사자 셋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은 도저히 신장이식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내뱉었던 전례가 있기에 이번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바로 자신이었다. 조직적합검사 결과 세 사람 중에 할아버지와 가장 잘 맞는 사람이 하필이면 자신이었던 것. 그 결과를 똑똑히 기억하는 고기웅이 좌절한 채 고개를 푹 숙이며 형에게 말했다.

“기준이형, 형이 남은 신장 하나 더 주면 안 돼?”

“미쳤냐? 나 죽으라고?”

“형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거 줬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나한테 말하지 말고 아버지랑 이야기 끝내. 이미 아버지도 나는 제주도에 남고 너만 올라오라더라.”

“아!!!!”

고기웅은 이대로 도망칠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성한그룹에서 챙길 수 있는 모든 권리가 날아갈 지도 모른다.

제주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날아가는 동안 고기웅은 몸을 덜덜 떨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신경 꺼.”

“네?”

“나한테 신경 끄라고.”

승무원에게 대응하는 말투로 그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다.

성한세브란스병원.

고명규 회장이 혈액투석을 마치고 쌕쌕거리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고기웅은 양복을 입고 대기하는 경호원의 인사를 무시하고 할아버지를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그래. 내 새끼. 기웅이 왔나?”

고명규 회장의 내 새끼란 말에 고기웅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내 새끼? 이 미친 노인네, 신장 필요하니까 내 새끼라고 부르냐?’

하지만 팔순이 다 되어가는 고명규 회장에겐 3조원이란 재산과 시가총액 88조원의 회사가 있다. 그에게 지명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아는 고기웅은 고개를 숙이며 바른 말을 내뱉었다.

“할아버지, 아프다고 하셔서 한 걸음에 달려왔어요. 괜찮으신 거죠?”

젊은 늑대의 아부, 고명규 회장은 손주의 연기를 보며 헛웃음을 토해냈다.

‘고얀 놈! 지 애비 닮아서 표정 하나는 잘 숨긴단 말이야. 난 그럼 이제 누구 신장을 받아야 되나?’

고명규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주를 불렀다.

“아휴~ 기웅아.”

“네. 할아버지.”

“나도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기준이가 준 신장이 망가질 줄 누가 알았겠니.”

“아니에요. 할아버지. 오래 사실 거예요.”

“그래? 일흔 아홉, 내년이면 여든인 내가 신장을 또 이식 받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어. 염치도 없지.”

고명규 회장의 말에 고기웅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야, 신장 이식을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고기웅은 일단 회장의 신임을 얻기 위해 아부의 말을 건넸다.

“오래 사셔야죠, 할아버지.”

“그래. 오래 살아야지. 내가 맡고 있는 성한그룹에 종사하는 사람이 몇 명인데. 오래 살아야지.”

고명규의 말에 고기웅은 자신의 아버지 고창훈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빨리 신장 드린다고 하세요!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네?’

고기웅의 절실한 눈빛을 외면한 고창훈은 고명규 회장을 보며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아버지, 신장이식 수술 받으세요. 아버지 나이에 일주일에 2번씩 혈액 투석 받는 것도 일이에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빨리 신장이식 수술 받고 쾌차하세요.”

고명규 회장은 고창훈의 말에 놀란 기색을 감췄다.

‘이 녀석, 설마 나한테 신장을 준다고?’

하나뿐인 아들. 그러나 다들 자식 농사 잘못 지었다고 할 정도로 동네에서 얼마나 야단이었는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고창훈의 어린 시절.

여자들은 무한정 울리고, 마약은 그렇게 해대고, 툭하면 사람 때리고, 그런 사건 사고로 자신이 얼마나 곤란했는지… 고명규 회장이 아들의 과거를 상기했다.

나이 50이 넘은 후엔 정신을 차린 듯 회사 일에 전념하고 있지만, 아직도 주주나 임원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진 못하고 있는 고창훈이다.

그런 아들의 입에서 신장을 주겠다는 소리가 나오니 고명규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그래. 아무래도 수술은 받아야겠지?”

고명규는 다시 한 번 운을 띄우며 아들과 손자의 답변을 유도했다.

그러자 고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주 고기웅을 가리킨다.

“기웅이가 아직 젊으니까 젊은 신장으로 이식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버지도 건강한 신장 이식받고 오래오래 사시고, 기웅이도 그룹을 위해 선양하는 길이니 얼마나 좋은 일일까요?”

고명규는 아들의 말에 손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까지는 표정을 잘 관리하던 손주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지는 걸 확인한 고명규가 아들과 손주의 속마음을 알고 쓴웃음을 짓는다.

역시나 예상이 다르지 않았다. 고기웅은 억지로 굳은 표정을 풀며 고명규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할아버지, 제가 마약을 많이 해서 건강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보다는 현재 마약 끊으신 아버지 신장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명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서로 신장이식을 미루는 모습에서 장손 기준이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같은 고추에서 나온 자식인데 왜 이리 다를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에게 신장을 이식해준 기준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고명규.

그에 비해 자신의 눈앞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아들과 손자. 그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창훈이 신장을 받는 것도 괜찮지. 언제 가능하니?”

“아버지, 저 이제 60이에요. 저보다는 기웅이 것을 받으셔야죠.”

“할아버지, 제 신장 이미 마약으로 찌들었어요. 저보다는 아버지 것 받으시는 게 더 좋으실 거예요.”

“야! 고기웅! 너 아빠 앞에서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어.”

“아빠도 말조심하세요. 왜 제 의견도 안 물어보고 할아버지한테 제 건강하지 않은 신장을 이식하려고 하세요? 그러다 할아버지 잘못되면 아빠가 책임지실 거예요? 이미 형 거 신장 이식한 게 망가져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엄마 쪽 유전자 때문에 할아버지랑 안 맞는 거라고요. 아버지가 이식하는 게 맞아요.”

진흙탕 싸움.

고명규는 꼴 보기 싫은 두 사람에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누가 줄 거야?”

“기웅이가 드릴 겁니다.”

“아닙니다. 아버지가 드릴 겁니다.”

고명규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이놈들이!”

고명규는 얼마 전 회사 법무팀에서 연락을 받았다.

80세 되기 전에 유언을 미리 작성해두는 게 좋겠다고. 재산분배는 어떻게 하실 건지 미리 작성해 은행 금고에 넣어두자는 말이었다.

고명규는 그로 인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명의 손주에게 어떻게 재산을 분배할지 고민 중이었다.

못난 아들이지만 지금껏 성한그룹을 위해 30년 이상 일한 것도 사실이고, 기웅이가 몹쓸 행동을 자주 하긴 하지만 패션, 영업 분야에서는 나름 두각을 나타낸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신장을 이식해준 기준이는 건강이 나빠져 제주도에서 요양 중이니 업무적인 역량은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따뜻한 품성과 꼼꼼한 성격 등 차기 성한 그룹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명규의 고함에 고창훈이 말했다.

“기웅이랑 상의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장이식 꼭 할 테니 아버지 너무 걱정 마세요. 급작스러워서 그런 거니 너무 노여워하시지 마시고요. 저 아버지 사랑하는 것 알죠?”

고창훈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들 고기웅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뭐라도 말을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할아버지,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 신장이 건강하기만 했다면 할아버지한테 당연히 드렸을 거고요. 저도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기업인으로서 존경하고 있고요.”

아들과 손주의 말에 고명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둘이 상의해서 빠른 시일 내로 알려줘. 곧 이식 수술 날짜 잡을 테니까.”

“네. 아버지.”

“할아버지, 알겠습니다.”

두 명이 혈액투석을 마친 고명규가 있던 회복실에서 나가며 서로를 째려본다.

고명규는 아들과 손주가 나간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주치의를 불렀다.

“김 박사, 회복실로.”

- 네.

고명규의 주치의 김 박사는 회복실로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회장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도 모르지?”

“네. 회장님 건강하신 건 저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고창훈 부회장과 고기웅 본부장에게는 제가 회장님 건강상태를 이야기할까요?”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이대로 몇 주만 더 기다려보지. 둘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자고.”

“알겠습니다.”

반전, 고명규 회장은 사실 건강했다. 이식받은 신장이 망가졌다는 것은 완벽한 거짓말이었던 것.

그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사람을 정하기 위해 주치의 김 박사와 함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한편, 회복실을 빠져나간 성한그룹의 고창훈 부회장은 자식에게 고함을 질렀다.

“인마! 그깟 신장 하나 못 줘? 하나 없다고 죽냐? 죽어?”

“아버지, 기준이 형이 한 번 줬으니까 이제는 아버지 차례죠. 당연히 아들이 신장 주는 게 맞지 않아요?”

“인마, 난 대사를 치를 사람이야. 성한그룹의 부회장이라고. 회장하고 부회장 둘 다 병원신세 지면 그룹은 누가 움직이냐?”

“임원들, 사장단들이 움직이겠죠. 할아버지 없어도 아버지 없어도 회사 잘 굴러가잖아요.”

“이게 진짜 못하는 말이 없어. 일단 기다려 봐. 조직검사 결과 곧 나올 테니까.”

“네? 조직검사라뇨?”

“너 말고도 한 명 더 있어. 현웅이라고, 지금 조직검사 시켰으니까 곧 결과 나올 거야.”

충격이었다. 고기웅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숨겨놓은 자식이 있으셨어요?”

“너한테도 좋은 일 아니냐? 걔가 조직검사 맞으면 네 신장 이식 안 해도 되잖아.”

“걔가 이식 안 해준다고 하면요?”

“5억이면 되겠지. 그게 아니면 더 주고. 그깟 거 돈으로 해결하면 돼.”

고창훈은 초조한 눈빛으로 연락을 기다렸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

고창훈은 조직검사 결과를 알리기 위해 연락한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그래. 어떻게 됐어?”

- 부적합 나왔습니다.

“뭐야?!”

- 5개 조직검사 중 1개 밖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젠장할! 알았어. 일단 현숙이한테 3천만원 송금하고, 입 다무는 조건이라고 전해. 입 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거라고도 반드시 전하고.”

-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혼외자식을 숨기고 있던 고창훈을 본 고기웅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창훈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웅아, 아무래도 네가 해야겠다.”

“아버지!”

“왜? 난 최소한 대체인원이라도 알아보기라도 했잖아. 넌 뭐했는데? 넌 없냐? 넌 혼외자식 없어?”

아버지의 말에 고기웅의 머릿속에 한 명의 여자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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