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19화
최장철은 백현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철원아.”
- 네. 의원님.
“공무원 노조, 간부가입 제한 관련해서 입법 가능한지 자료 좀 모아봐라. 다른 방법이 있으면 또 알아보고.”
-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강백현은 최장철 의원이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의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음식 앞에서 뭐하나, 일단 먹지.”
“네.”
약주가 나오자 최장철 의원은 딸 앞에서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젊은 친구를 보니까 예전 생각이 나는구만. 내 선친이 나를 정치에 입문시켰을 때는 군부정권 시절이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굉장히 조심스러웠지. 특히 20대 후반이던 나에게는 두려움의 연속이었지.”
“그때는 통금제도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맞아. 야간통행금지 제도. 내가 그때는 그 야간통행 증명서를 받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나? 물론 금방 해제되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아련해. 내가 벌써 6학년 4반이니, 지금이라도 그때로 돌아가면 어떨까 싶네.”
“아빠.”
“아무튼 내가 소문으로만 듣던 자네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고, 이 자리를 통해 확신이 생겼네.”
“어떤 확신이십니까?”
“자네를 키워주겠네. 내 우리 정당 의원들 있는 자리에서 의견 물어보고 자네를 영입하고 말지 곧 결정해서 알려주도록 하지.”
“의원님, 저는 그럴 그릇이 아닙니다. 학교도 지방대 나왔고요. 집안도 잘 사는 집안이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보다는 좀 더 훌륭한 인재가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 세상의 흐름은 변하고 있지. 일반 국민들과 별다를 바 없이 살아온 자네의 그 세월이 오히려 강점으로 다가올게야.”
강백현은 실감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치는 귀족정치였다. 대물림되고, 세습되고. 물론 새로운 인물도 가끔가다 나오긴 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대한민국 엘리트 출신이었다.
검사, 판사, 변호사 또는 학교 총장, 기업인. 대부분 그런 사람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닐세, 나도 젊은 친구와 함께 하니 기분이 좋군. 일어나지.”
최장철 의원은 일어나며 자신의 딸인 현희에게 카드를 건네었다.
“네가 계산해.”
“응.”
그런데 이미 오늘 먹은 금액만큼은 백현이 계산한 상태다.
“술값만 계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누가 계산했나요?”
“젊은 청년 하나가 미리 계산하던데요?”
강백현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예의를 갖췄다.
“김영란 법에 걸려서요. 밥값은 제가 계산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각자 계산하지.”
“아닙니다. 나중에 3만원 이하로 맛있는 음식 얻어먹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집에는 어떻게 내려가나?”
“콜택시 불렀습니다. 버스예약 해뒀으니 그거 타고 가면 됩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후후, 그래. 다음에 봅세나.”
최장철은 운전기사가 모는 관용차량에 탑승한 후, 딸에게 말했다.
“괜찮은 친구네.”
“아빠. 아직 몰라. 그쪽 편일 수도. 의심은 해봐야지.”
“네가 한 번 뒷조사 해봐. 괜찮은 친구면 우리 편으로 넘어오도록 설득하는 게 방법이 될 수도 있겠지.”
“왜?”
“멍청한 충견 다섯보다는 똑똑한 옆집 개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 * *
강백현은 지방으로 내려오기 전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런 일을 상의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처음 생각한 사람은 가족이었다.
아빠라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사실 아빠는 최하위층 노동 계층으로서 야당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최저임금이 높아져야 생활의 수준이 높아진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 맞는 건 아니었고 애초에 입장이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실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엄마, 엄마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엄마가 바라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 풍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뿐.
정치 뉴스보다 아침, 일일 드라마를 더 좋아하는 엄마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란 무리가 아닐까.
공무원 동료들에게 이야기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친구들끼리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들이 자신의 고민을 이해해줄 만한 배경지식을 지니고 있을지도 의문.
그렇다고 지금 한창 바쁜 실장님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강 비서, 자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그냥 도청 출근하면서 일상생활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언제 서울 한 번 올라오지. 자네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네.”
“지금 서울인데, 혹시 오늘도 시간 괜찮으신지요.”
“그런가? 그럼 집으로 오게.”
* * *
삽시간에 결정된 김도한 회장의 자택 방문.
예비사위의 입장으로 방문하는 지금의 상황이 어색했지만 초인종을 눌러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서울에 있었으면 먼저 연락을 해야 될 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불편하나?”
“아닙니다.”
“그래. 약주나 한 잔 하지. 얼굴이 빨간 것 보니까 조금 취한 것 같은데?”
“네. 한 잔 마셨습니다.”
“자네 나이면 한참 마실 때지. 아줌마! 술 한상 봐줘요.”
“네. 회장님.”
강백현은 김도한 회장의 집에서 경직된 자세로 술을 받았다.
“누구랑 만나고 오는 길인가?”
강백현은 김도한 회장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사실대로 대답했다.
“최장철 의원과 동기인 최현희 사무관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최장철 의원? 이번에 5선 당선된 그 당대표 최장철 의원?”
“네.”
“자네와 정치적 연관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저랑 정치적 커넥션은 없습니다. 다만, 하아. 조금 말씀드리기 곤란한 일이 생겨서.”
“어떤 일이지? 나, 김도한 60평생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네. 자네가 겪는 곤란한 일은 어찌보면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일일지도 모르지. 말해보지.”
강백현은 회장의 말에 자신이 겪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여당과 야당이 자신을 청년대표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부주시에서 겪었던 일.
그리고 공무원 노조의 활동과 가입권유.
그러한 이야기를 들은 김도한 회장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결국 우리 동성이가 시작한 일이 되겠군.”
“네?”
“동성이가 용규를 그렇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자네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일이 아닌가. 진심으로 미안하네.”
“아닙니다. 회장님. 저는 사과의 말을 듣고 싶어서 여기 온 게 아닙니다.”
“그래. 내가 하고 싶었어.”
김도한 회장이 자신의 가슴을 팍 치며 감정을 토해냈다.
“내 답답한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고 싶어서 자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네. 그래서 보자고 했고.”
“……”
김도한은 잠시 후 감정을 추스르며 물었다.
“그래. 공무원 노조 가입 권유를 받았다는 건가? 그리고 한 쪽에서는 청년 의원으로 밀어줄 테니 당원으로 활동하라는 권유를 받은 거고.”
“네.”
“난 기업인으로서 말하겠네. 야당과 여당, 어느 한쪽 편에 서지 말게. 기업인이란 자고로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해.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정당이 있지. 그러나 그들의 이해논리에 완벽하게 부합할 수 있는 기업은 없네. 어딘가에서 이득을 보면 어딘가에서 손해를 보기 마련이지. 공무원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느 한쪽에서 키워준다는 말은 어느 한쪽에서 견제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않는가.”
“그렇죠. 저도 그래서 지금 고민인 겁니다. 언젠가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텐데, 이대로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할 순 없을 것 같아서요.”
김도한은 씩 웃으며 백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자네를 잘 불렀구만. 우리 강 비서, 그 부분은 고민할 필요가 없네.”
“네? 어떤 좋은 해결책이라도…….”
“둘 다 포기하는 걸세.”
“둘 다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아예 욕심도 부리지 않는 걸세. 자네는 공무원으로서 어디까지 올라가고 싶은 겐가?”
“권력 욕심은 없습니다. 승진보다는 그냥 대한민국 사회의 부정부패가 사라져, 좀 더 올바른 사회가 되었으면 싶은… 그런 마음 밖에는.”
“내 앞에서 가식 부릴 필요는 없네. 진짜 욕심이 없는 겐가?”
“네.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확실해졌군. 승진, 권력 욕심이 없다면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는 게 맞는 걸세. 다만,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럼 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거야 자네가 찾아야 하는 게지. 내가 거기까지 어떻게 해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 메리야트 그룹, 자네가 말한 대로 샬롯 측과 잘 이야기가 되었네. 곧 기사가 나오게 될 거야.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보다는 좋은 상황이 이어지겠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은 누가 갖나?”
“사모님이 가지십니다.”
“아니지. 우리 성현이가 가지지. 그리고 성현이 남편은 누가 될 건가?”
“……”
“왜 대답을 못해. 누가 될 겐가?”
“제가 되겠습니다.”
“그래! 그 대답이 듣고 싶었네. 난 자네를 믿네. 그리고 자네가 우리 성현이와 함께 메리야트 그룹의 미래를 이끌어줄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네.”
“아닙니다 회장님. 회장님이 이끄셔야죠.”
“후후, 벌써 나이 60이야. 나한테 남은 세월은 그리 길지 않아. 짧으면 10년, 길어야 15년 정도겠지. 그 다음 세대를 이끄는 건 바로 강 비서, 자네가 되어 줘야 할 게야.”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만, 전 그런 욕심은 없습니다. 회장님. 전 제 분수를 압니다.”
“후후, 분수를 아는 놈이 우리 성현이를 꼬셔?”
“……”
“아무튼 오늘 좋은 시간이었네. 그리고 내가 한 이야기 잘 생각해 봐. 어느 한쪽의 편도 들지 않는 게 결국은 가장 오래 살아남는 길일세.”
강백현은 김도한 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맞는 말씀이십니다. 오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오후 10시 30분, 강백현이 막차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김도한 회장이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벌써 일어나?”
“막차 시간이 되어서 지금 택시타고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취기가 꽤나 올라온 김도한 회장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더 마셔. 밤은 기네.”
강백현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회장의 주도를 말렸다.
“이미 2시간이나 마셨습니다 회장님.”
그러나 회장의 주도는 확고했다.
“술 못 마시는 사위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네. 앉지.”
딸을 핑계로 기어코 백현을 자리에 앉히는 김도한 회장.
강백현은 결국 그의 권유에 못 이겨 술자리에 다시 앉고 말았다.
새벽 3시까지 계속 술자리가 이어졌다.
“자네는 큰 사람이 될 게야.”
“자네는 내 딸에게 인생을 걸어야 하네.”
“내 딸이 얼마나 훌륭한지 아나?”
똑같은 말이 이어진다.
김도한 회장은 회사를 위한다고 딸에게 몹쓸 말들을 했던 과거를 후회했다.
“내가 다시 태어나면 성현이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줄 게야. 빌어먹을 동성이 놈은 다리 밑에 버릴 거고, 성현이한테 내 사랑 다 쏟을 게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자네한테 정말 미안하네.”
“아닙니다 회장님.”
“더 마시지. 냉장고에 술이 있을 걸세.”
“술 다 떨어졌습니다. 회장님, 이제 주무셔야 합니다.”
결국 김도한 회장은 잔뜩 취해서 서재로 들어가며 마지막 말을 이렇게 남겼다.
“성현이 방에 올라가서 자게.”
“회장님…….”
“나도 이제 크게 바라는 거 없어. 우리 성현이 행복하게만 해줘.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강백현은 김성현의 방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두 눈을 감는 강백현.
공무원 노조와 정치적 중립 앞에서 고민하던 그가 자신의 결심을 굳혔다.
‘회장님, 두서는 없었지만,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제 고민에 대한 답이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