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15화
새로운 환경은 언제나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아이고~ 우리 아저씨, 상태가 왜 그래! 옷은 왜 이렇게 헤졌어?”
센터장은 토요일에도 넉살 좋은 얼굴로 나와 윤석동을 비롯한 세 사람을 맞이해주었다.
사회복지사 박재성은 센터장과 잘 아는 사이다보니 친근한 태도였다.
“누나, 잘 좀 해주세요. 3년 동안 움막에서 사셨나 봐요.”
“아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일단 옷부터 드려야겠다. 어르신, 혼자 속옷 갈아입을 수 있으세요?”
“나, 건강해!”
“건강한 건 아는데~ 위생적으로 조금! 아주 조금 그렇잖아요! 네?”
센터장은 통통한 체형의 중년 여성이었다.
넉살 좋은 그녀는 곧바로 지원물품 박스를 개봉해 빨간색 내복을 꺼내들었다.
“아저씨, 혼자 갈아입을 수 있죠? 빨리빨리 갈아입어요. 그리고 옷은 저기 수염 기르는 동생이 가져다줄 거예요. 여보! 여기 새로운 아저씨께 어울리는 옷 좀 가져와.”
“아~ 진짜! 소개를 해도 수염 기르는 동생이 뭐냐?”
“으이구! 이 진상아! 그럼 게으른 사람이라고 할까?”
“하늘같은 남편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일이나 똑바로 해. 아! 남푠, 여기 아저씨, 방 배정해드리고 간단한 사용규칙 좀 설명해드려. 나는 재성이랑 얘기 좀 하고 있을게.”
센터장의 남편은 장난스런 얼굴로 질투를 내비쳤다.
“하여간 젊은 애만 보면 저렇게 눈이 돌아간다니까!”
“뭐래! 빨리빨리 안 움직여?”
센터장은 남편과 윤석동 어르신을 보낸 후,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재성이 요즘 어떻게 지내?”
“그냥 그렇죠. 누나는 어때요?”
“요즘 어려워 죽겠어. 겨울이라 춥잖아. 안 그래도 어제까지 등유 지원 안 돼서 자원봉사자들이 기름 지원해줘서 겨우 보일러 땠다. 공무원들 진짜 너무 일 못하는 거 아니야?”
“그렇죠. 이런 시설 만들어만 놨지,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후속지원은 사실 미비하니까요.”
“뭐~ 나라 살림 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 근데 한편으로는 이해도 해. 너무 많이 지원을 받으면 운영하는 주체가 사람이다 보니까 유혹에 빠지잖아. 한 달에 시설로 800만원 들어오고 그러는데, 솔직히 빼먹을 수 있으면 빼먹긴 하겠더라.”
“아니~ 누나! 그런 말을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해요! 네? 백현아, 인사드려. 우리 센터장 고현숙 누나.”
“안녕하세요. 강백현입니다.”
강백현은 머쓱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전화 주신 분, 키도 크고 잘 생겼네. 뭐하시는 분이에요?”
“아, 충남도청 공직기강감사팀장 맡고 있습니다.”
“네? 공무원이셨어요? 아~ 재성아, 나 어떻게 해! 공무원 앞에서 공무원 욕을 한 거야?”
“저도 공무원입니다만?”
“아니, 넌 친하잖아. 아니~ 제가 말한 건 이 자리에서 다 잊으시고요. 아무튼 감사해요. 독거노인분 안 그래도 갈 곳 없으셨을 텐데, 어떻게 잘 모시고 오셨네요.”
“아닙니다. 저한테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재성이 형이랑은 진짜 친해서, 이렇게 저한테만 존댓말 하시면 족보 꼬입니다.”
강백현의 말에 고현숙이 잠깐 간을 보았다.
“어머, 그럴까? 그게 맞겠지?”
“말 놓을 거면서~ 누나, 어차피 공적인 자리도 아닌데 말 편하게 해요. 친한 동생이에요. 얘가 제 밑에 있었거든요. 근데 행정고시 패스하고 5급 붙어서 왔다니까요. 아오~ 인생 참 묘하죠?”
박재성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말하자, 강백현이 장난스런 태도로 받아쳤다.
“아니~ 형님도 5급 공채 지원하시면 되잖아요.”
“야~ 형이 나이가 몇 개인데. 애들 키우기도 바빠.”
“재성이 형 말 들으면 애기가 무슨 초등학교라도 입학한 줄 알겠네. 이제 겨우 3살이면서.”
“아니~ 누나! 3살이 얼마나 힘든데요. 요즘 조금만 눈 돌리면 혼자 뛰어다니다가 넘어진다니까요. 정신을 팔수가 없어요.”
“후후후. 6살, 7살 되면 장난 아니야! 그때부터가 시작이지.”
잠시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고현숙의 남편이 내려왔다.
“아이고, 이 여편네야. 젊은 애들하고 얘기하니까 기분 좋지?”
“말 좀 곱게 해. 재성아, 우리 아저씨, 친한 사람 앞에서 꼭 저렇게 저렴하게 행동한다? 이상하지?”
“하하, 그게 다 누나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동구 형, 현숙이 누나 사랑해서 그런 거 맞죠?”
“그거 알면 좀 적당히 앵겨라. 넌 내 생각 안 하냐? 아~ 아까 인사를 못했네. 옆에 젊은 청년은 누구야?”
“제 아는 동생이요 백현아.”
“네. 강백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그 분 걱정 말고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나름 조그마하지만, 여기도 국가에서 지원받고 운영하는 독거노인 지원센터거든요? 우리 마누라가 조금 부족해보여도 아주 진국이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부족한 건 뭐야. 저 아저씨는 항상 칭찬을 해도 저런다니까.”
백현은 두 부부가 합심해서 지원센터를 운영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자원봉사를 많이 하기에 느끼는 동질감.
저런 분들이 있어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직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 *
센터를 나온 백현은 박재성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재성이 형! 오랜만에 봤는데 포옹 한 번 해요.”
“그래. 잘 지내고. 네 소식 듣긴 했는데, 너무 열심히 하진 마.”
“제 성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형이 더 잘 알잖아요.”
“그렇지. 아~ 맞다. 너 홍성에서 구제역 발생한 거 들었냐?”
“네. 어제 그것 때문에 도청도 비상소집 한 번 걸렸었어요.”
“아, 그거 때문에 주말에 또 소집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원해야죠.”
“넌 모르겠지만, 그 작업 진짜 사람 할 짓 못 된다. 동물들 산 채로 매몰되는데, 걔네도 감정이 있는지 눈물을 흘리더라니까.”
“들어가요. 집에 애기 기다리잖아요.”
“맞아. 우리 선아가 육아 때문에 힘들다고 난리 피우겠다. 얼른 가서 교대해줘야지.”
“넵. 조심히 들어가세요.”
백현은 차를 끌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네.’
주진한 선배의 죽음은 다행히 타살이 아니었다.
자살. 왜 죽었을까? 거기에 대해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 점이 아쉬웠다.
세상이 깨끗하지 못해서? 아니면 더러운 세상과 타협해버린 자신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러나 결국 그는 자살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더 이상 원래의 삶으로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큼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집에 돌아온 백현은 샤워를 한 후, 지금쯤 시차로 인해 아침이 되었을 프랑스의 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별 일 없죠?”
- 백현 씨, 식사 했어요?
“아직이요. 배고파 죽겠네요. 이제 밥해서 먹어야죠.”
- 혼자 밥해 먹어요?
“엄마, 아빠 없을 땐 혼자 해먹죠. 나중에 김치찌개 만들어줄까요?”
- 아, 김치찌개, 완전 먹고 싶어. 여기 프랑스에 김치가 없어요. 미치겠어.
“후후, 그래요. 나중에 김치 싸들고 프랑스 한 번 더 가야겠네.”
- 진짜 와요. 오면 내가 시간 뺄 테니까.
“지금 한참 바쁘신 분께 가는 건 좀 아니죠. 로체 씨랑은 어떻게 얘기 되고 있어요?”
- 굉장히 긍정적이고, 의류를 제외한 한국총판은 저희 메리야트 호텔 측에 맡겨주신대요. 그래서 지금 그 밑작업 하고 있고, 곧 프랑스 현지 직원들이랑 같이 한국에 넘어가서 판매 전략 및 인테리어, 고객 응대 방법에 대한 교육을 시작할 것 같아요.
“근데 진짜 다행이네요. 로체 씨가 긍정적으로 보아주셨다니.”
- 호텔에서 명품을 파는 게 일반적이진 않지만, 바다 위의 호텔인 크루즈에서는 명품을 팔잖아요. 바다 위 호텔에서도 파는데 땅 위의 호텔에서는 왜 안 되냐는 논리로 접근하니까 흔쾌히 오케이를 해주셨어요.
“역시 실장님이 최고십니다. 성공하실 거예요.”
- 백현 씨, 내 성공이 백현 씨 성공인 거 알죠?
백현은 김성현의 간질간질한 말에 미소를 띠웠다.
“제가 좀 더 분발해야겠네요. 따라잡질 못하겠는데요.”
- 백현 씨, 저 오늘 홍보담당자 만나봐야 돼서 이만 끊을게요. 사랑해요. [쪽!]”
강백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쪽!”
이제 모든 것이 순탄해보였다.
부주시장에 대한 복수도, 사랑도, 소소한 행복도 쟁취한 상태.
1년 전, 좌천된 그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긴급 소집, 충남도청 공무원 방역 비상소집 안내]
구제역 발생지역이 부주시로 확대됨에 따라 비상방역 대책회의의 결정으로 내일부터 방역 비상소집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문자를 받으신 분은 소집대상이며, 소집 일정 및 장소는 첨부파일 확인 바랍니다.
소집 일정과 장소가 첨부되어 있었다.
홍성군 OO회관 앞. 그곳에서 방역을 위한 흰색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방역활동에 투입될 것이다.
그때 방역담당 공무원에게 전화가 왔다.
- 아이고, 방역담당 최치우입니다. 강백현 사무관님, 제가 문자를 잘못 보냈습니다. 소집대상이 남자 공무원 6급~9급이고, 5급 이상 간부급은 제외인데 제가 사무관님 나이만 보고 잘못 보냈습니다. 내일은 집에서 쉬시면 됩니다.
“아… 아닙니다. 저도 나가겠습니다.”
- 아니요. 집에서 쉬셔야죠. 문자 잘못 보내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주말 편히 쉬세요.
전화가 끊기고 강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5급 이상 간부급은 제외. 여자 공무원도 제외.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모르는 역차별이 21세기인 2016년에도 아직 진행되고 있다.
백현은 거기에 대해서 따로 할 말은 없었다.
다만, 자신이 5급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뿐이었다.
다음 날, 백현이 홍성군 OO회관 앞으로 나오자 많은 공무원들이 욕을 하고 있었다.
“와! 씨발. 일요일인데 이게 뭐야. 아 개 빡치네.”
“아니,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간부급은 빠지고 핫바리인 우리들만 개고생하고 있어. 어? 어떤 새끼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야?”
“원래 그랬잖아. 뭘 기대해. 그냥 까라면 까야지.”
차우현도 그 중 하나였다. 차우현이 같은 팀원 김태웅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아이구. 답답하네. 빨리 승진해야지. 안 그러냐? 태웅아.”
“그렇죠. 아, 전 사실 구제역 방역활동은 처음인데요. 이거 기분 좀 나쁜데요. 남자만 나오는 거 맘에 안 드네요. 간부급 안 나오는 것도 그렇고요. 저희 팀장님도 안 나오겠죠?”
“소집 대상 아니니까 당연히 안 나오지. 그게 나쁜 거냐? 팀장님은 평소 고생하잖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빨리 승진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인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그 당사자가 앞으로 걸어온다.
“차우현 주무관님, 김태웅 주무관 잘 지냈어요?”
“어? 팀장님은 오늘 소집 대상 아니신데 왜 나오셨습니까?”
“자원해서 왔습니다. 우리 팀원들 고생하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잖아요. 혹시 보호복 남나요? 남으면 같이 작업하죠. 작업반장님이 누구시죠? 이야기 좀 하고 와야 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