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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104화 (104/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104화

    다음 날 아침, 박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고에서 나왔다. 그러자 아침 일찍 출근해 마당을 쓸던 김 기사가 그를 보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도련님, 제 방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왜?”

    박창현은 김 기사의 말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쫓겨났나봐요. 회장님이 제 방에서 주무시라고 한 것 같아요.”

    “그럼 너는?”

    “제가 도련님하고 같이 잘 수 있나요? 그냥 차고에서 쪽잠 잤습니다. 피곤해 죽겠습니다.”

    김 기사는 박창현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

    “젊은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왜 도련님이 쫓겨났을까? 어제 강 비서 일은 어떻게 됐어?”

    “아, 진짜 그거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백현이랑 아가씨랑 언제부터 만났던 겁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네가 더 잘 알아야 되는 거 아니야?”

    “황당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전 당연히 아가씨가 고기웅 본부장하고 잘될 줄 알았거든요.”

    “그놈이랑 잘 되면 메리야트그룹 망한다. 어이구~ 나무만 보면 어떻게 해. 숲도 볼 줄 알아야지.”

    “네? 망하다뇨?”

    “성한그룹 놈들이 메리야트 잡아먹으려고 얼마나 벼르고 있는 줄 아냐?”

    “……”

    “아무튼 행동 조심해. 말 새어나가지 않게 잘 하고. 우리가 제일 조심해야 할 게 입단속인 거 알지?”

    “네.”

    박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도한 회장이 살고 있는 저택을 확인했다.

    넓은 테라스와 정원이 달린 고급스러운 주택.

    그리고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아가씨의 방.

    그때, 아가씨의 방 창문 커튼이 열리고 웃옷을 벗은 강백현이 모습을 비춘다.

    “아- 뭐야.”

    “뭐가?”

    “백현이, 아가씨 방에서 잤나 봐요!”

    같은 시각, 강백현은 커튼을 열며 새해의 첫 아침을 맞이했다.

    “안 피곤해요?”

    “실장님, 좀 더 주무세요. 전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안아줘요.”

    강백현은 김성현의 말에 웃음으로 대답했다.

    “네. 갑니다.”

    “빨리요!”

    백현이 얼굴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띄웠다.

    ‘피곤했겠다. 어제 하루 종일 비행기 타고 한국 막 도착했잖아. 생체리듬도 다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김성현 또한 백현과 포옹을 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백현 씨, 지치지도 않나 봐. 어제 힘들었을 텐데.’

    “실장님, 아침엔 미니멀하게 갈까요?”

    “맥시멈하게 가요.”

    “네. 실장님 뜻대로.”

    * * *

    한 차례의 아침 숙제를 끝내고 강백현은 자신이 원래 입고 왔던 양복과 코트로 갈아입었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파란 땡땡이 파자마가 걱정된 백현. 그의 표정을 본 김성현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왜요?”

    “회장님 잠옷 구겨진 게 신경 쓰여서요.”

    “괜찮아요. 아빠 모르게 할게요. 백현 씨, 20분만 기다려요. 우리 가족은 7시에 아침 먹거든요. 아~ 알겠구나.”

    “네. 저 먼저 씻을게요.”

    오전 7시, 1층에는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다.

    출근하시는 아주머니의 솜씨.

    노진희가 하는 일이라고는 식탁 위에 놓인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서 오늘의 메인인 시금치된장국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 뿐.

    김성현과 같이 내려온 강백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행히 노진희는 강백현에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비사위, 많이 먹어요.”

    “네. 네?!”

    강백현이 예비 사위라는 호칭에 깜짝 놀라 김성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강백현을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백현 씨, 어색해하지 말고 앉아요. 곧 가족 될 텐데.”

    “네. 실장님.”

    “실장님 말고, 이름으로 부르고요.”

    “아, 네. 성현 씨.”

    김성현은 4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에서 자신의 옆 자리에 백현을 앉히고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는?”

    “곧 나올 거야.”

    “응. 나 가족들 앞에서 할 말 있거든. 아직 확정적인 것은 아닌데.”

    “그래. 아빠 나오면 그때 얘기하자.”

    “응.”

    강백현은 김성현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이야기를 할까?

    “강 비서, 잘 잤나?”

    “네. 회장님, 파자마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어? 내 파자마?”

    강백현의 말에 김도한이 깜짝 놀라 말했다.

    그러자 김성현이 옆에 앉은 강백현의 허리를 꼬집으며 주의를 주었다.

    ‘아, 말하면 안 되는 거였구나.’

    “그래. 어제 잠은 잘 잤고?”

    “네. 잘 잤습니다. 성현 씨 방이 햇빛도 잘 들어오고, 보일러도 잘 들어서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강백현의 대답에 김도한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자네 혹시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가?”

    “네?”

    “동성이 방에서 자라는 내 뜻을 이해 못한 겐가?”

    “아… 몰랐습니다.”

    김도한 회장은 화들짝 놀라 김성현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무 일 없었지?”

    “뭐가?”

    “아니, 일 없었냐고.”

    “그걸 왜 묻는데.”

    김도한 회장이 말한 건 단순히 만나보라는 뜻이었는데, 사이가 급진전된 것 같아 조금은 당황한 눈치였다.

    “아빠, 그것보다 나 할 얘기 있어요. 중요한 일이에요.”

    김성현은 식사를 하다말고 분위기를 잡았다.

    “말해 봐.”

    “아빠 회사 넘긴다는 거, 마지막까지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회사 어려운 건 알지만, 임직원 분들께는 마지막까지 알리지 않았으면 한다고요.”

    김성현의 말에 김도한이 잠시 고민했다.

    “성현아, 네 고모, 고모부는 메리야트 호텔을 살릴 의지가 없어. 아마 공중분해 될 게다. 그들의 도움을 바란다면 전혀 가능성 없다고 미리 말해둘게.”

    “그게 아니에요. 혹시 몰라서 그래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미리 말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 봐.”

    강백현 또한 김성현의 생각이 궁금했다. 과연 그녀는 프랑스에서의 지난 6개월간 어떤 일을 했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샬롯의 신규 브랜드 라인 이름이 정해졌어요.”

    “네 디자이너 일 이야기니?”

    “네. 그 이름은 메리 프랑수아.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2세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왕비, 메리 스튜어트에서 따온 이름이죠. 43년 만에 새로 런칭하는 샬롯의 신규브랜드 《메리 프랑수아》는 맥시멀리즘에 입각한 디자인을 적용한 샬롯의 첫 브랜드에요. 저희 팀의 디자인이죠.”

    “성현아.”

    “저는 샬롯의 로체 씨한테 《메리 프랑수아》 브랜드의 한국총판 권한을 우리 메리야트 그룹에 넘겨달라는 요청을 했어요. 과도한 요구일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로체 씨는 임원진들과 고민해보겠다고 했고요.”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총판이 가능하다고 해도 매장을 섭외하고 조정하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해. 인테리어도 준비해야 하고, 설사 그게 가능하다 치더라도 4개월은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아.’

    김도한 회장 또한 강백현과 비슷하게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우리가 백화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잖아. 메리야트 패션도 매각해서 지금은 유통할 수 있는 기반도 사라졌고. 그걸 다시 매입해서 사업을 할 여력이 되지도 않아. 또, 총판을 얻는다고 해서 이제 막 신규 런칭하는 브랜드, 그것도 해외브랜드의 한국진출에 샬롯이 얼마나 투자해줄 지도 의문이야.”

    김도한의 부정적인 진단에 김성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아빠가 우려하는 것. 그런 무리한 진행 자체가 제 커리어까지 앗아갈 수도 있겠죠.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한 거예요. 성한 그룹과 함께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김성현의 말에 김도한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성한 그룹 이야기는 그만 하자.”

    “네. 식사해요.”

    “그래.”

    강백현은 김도한과 김성현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꼬였어. 메리야트 패션만 넘기지 않았어도 이렇게 일이 복잡해지진 않았을 텐데.’

    분명 메리야트 패션은 유통망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거래처도 있었다.

    그것을 성한그룹에 넘긴 이상 지금의 메리야트 호텔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잠깐. 호텔은 남아 있는 거잖아. 아직 호텔은 남아있는 거잖아!’

    “강 비서, 밥맛이 없나?”

    “아닙니다. 회장님,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긴 한데, 한 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그래. 말해보게.”

    강백현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았다.

    “유통기반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셨는데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게 뭐지?”

    “메리야트 호텔은 수십 년의 전통을 가진 브랜드이지 않습니까? 굉장히 고급스럽고 찾으시는 분들도 잘 사는 중산층 이상의 고객들이시고요.”

    “그렇지. 해외 브랜드다 보니 상표사용권으로 로열티가 많이 나가서 문제지만, 그런 점이 아직까지 우리 호텔이 유지 가능한 기반이 되고 있지.”

    “그렇다면 메리야트 호텔 1층에 《메리 프랑수아》라는 브랜드 편집샵을 열어보는 것은 어떠십니까? 물론 샬롯 측의 승인과 메리야트 호텔 본사의 승인이 있어야겠지만, 호텔 내부에 편집샵을 여는 것이 서로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회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강백현에게 확신은 없었다. 다만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싶어서 짜낸 아이디어였다.

    헌데 그 말을 들은 김도한이 갑자기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

    “기발해! 확실히 그렇게 하면 유통문제는 해결될 수 있어. 그리고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게 있네. 우린 본사의 통제를 받지 않아. 상표는 사용하지만,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메리야트 호텔은 한국 기업이네. 미국의 통제를 받지 않지. 오너인 내가 한국인이지 않나.”

    “그럼 샬롯 측의 승인이 문제겠네요.”

    강백현의 말에 김성현이 고민하다 전화를 걸었다.

    “성현 씨, 어디에 전화 거세요?”

    “프랑스는 아직 12월 31일 밤 23시에요. 다행히 1월 1일이라서 아직 로체 씨가 잠에 들진 않았을 거예요. 전화하면 받겠죠.”

    그녀의 생각대로 로체가 전화를 받는다.

    영어로 대화하는 김성현. 김성현이 한국 총판권에 대한 제안을 건네며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0분간의 통화.

    김도한 회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김성현의 통화결과를 기다렸다.

    “Yes! Yes! Yes! Thank you! Thank you! 로체, Happy New Year!”

    감사의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은 김성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됐어요! 아빠! 로체 씨가 호텔 내 편집샵을 열어주는 것을 승인했어요.”

    “응. 그래.”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기존 백화점에 입점한 샬롯의 의류를 제외하고 목걸이, 구두 등 악세사리 류는 메리야트 호텔 내에서 판매 가능하도록 고려해보겠대요.”

    “정말? 그게 정말이야?”

    “네.”

    김성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김도한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지옥행 열차 앞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을 일궈낸 것은 모두 딸인 김성현의 능력.

    그러나 김성현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적절한 조언, 적절한 판단.

    회장 앞에서는 보통 기가 죽어 수동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인데 강백현은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바로 제시했다.

    그 아이디어를 적용할 수 있을지 즉각 판단한 자신의 역할도 물론 중요했지만, 그것을 바로 실행하고 협상에 임한 딸 또한 이미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삼박자의 조합.

    그래서 김도한은 모처럼만에 얼굴에 웃음을 띄울 수 있었다.

    “강 비서.”

    “네. 회장님.”

    “식은 언제 올리나?”

    “네?”

    “빨리 올려. 우리 성현이한테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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