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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99화 (99/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99화

    강백현이 전화를 끊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차우현 주무관이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왜 기다리고 계셨어요. 업무 보시지.”

    “팀장님이 제 업무 관련 건으로 전화하고 계신데, 제가 어딜 갑니까? 아무튼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오늘 소주나 찐하게 하시죠.”

    “회식인데요?”

    “끝나고 2차는 따로 가셔야죠.”

    “하하, 콜입니다!”

    2015년 마지막 해, 공무원들의 회식자리는 딱딱하다.

    먼저 도착한 감찰팀장 오복주는 연장자답게 참석자들의 자리를 정했다.

    “실장님 앞에는 각 팀장님들 앉으니까 자리 비워둡시다.”

    조사팀장 최기철 또한 오복주 팀장과 잘 맞았다.

    그런데 오늘은 의견이 좀 갈렸다.

    “실장님 앞에는 팀장님하고 제가 앉고, 실장님 옆 자리는 새로 오신 강 팀장이 앉는 거죠?”

    “아니, 실장님 옆에 강 팀장이 왜 앉아? 평소처럼 앉아야지. 희진 씨, 그리고 현희 씨 실장님 옆으로 와.”

    오복주의 말에 감찰팀 9급 공무원 김희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 조금 부담스러워서요.”

    “공무원 하루만 할 거야? 옆에 앉아서 실장님 술도 따라드리고, 재밌는 농담도 해야 이쁨 받지. 안 그래?”

    “……”

    “뭐해! 빨리 앉지 않고. 사람 민망하게 만들 거야?”

    “네. 앉을게요.”

    김희진이 강요에 의해 실장님 옆자리에 앉자, 최기철 조사팀장이 현희 씨를 불렀다.

    “나현희 주무관도 앉아.”

    “네.”

    김희진과 나현희가 어쩔 수 없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고태준 실장 옆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감사팀이 도착했다.

    강백현을 비롯한 4명. 그들이 늦게 도착하자 오복주 팀장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팀은 회식 자리는 일찍 와줬으면 좋겠네요. 강백현 팀장? 안 그런가?”

    “아, 저희 감사팀은 정시에 오라고 해서요. 감찰팀하고 조금 분위기가 다릅니다. 아아, 우리 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요.”

    강백현이 씩 웃으며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차우현이 방긋 웃으며 오복주와 최기철이 들으라는 듯 대답했다.

    “아이쿠~ 저는 구석에 앉아야겠네요.”

    차우현의 말에 강백현이 화답했다.

    “은혜 씨 술 별로 안 좋아하시죠? 차우현 주무관하고 같이 구석으로.”

    “네. 팀장님.”

    조은혜는 자신의 내심을 알아차린 강백현의 말에 방긋 웃었다.

    ‘우리 젊은 팀장, 센스 있다니까.’

    마지막 남은 김태웅이 강백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강백현은 자신 대신 두 명의 여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팀 강백현입니다. 오늘은 제가 주인공인 것 같아서, 인사 올리기 전에 자리 좀 정하고 가겠습니다. 두 분 실례가 안 된다면, 실장님 옆자리는 제가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저희 팀장님이…….”

    “하하, 오늘은 제가 주인공이어서요.”

    백현의 말에 두 여성이 슬쩍 웃다가, 고민하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언니, 언니가 일어나.”

    “아, 괜찮아. 현희 네가 일어나.”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위하는 현희와 희진.

    그들을 보며 강백현이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두 분 다 일어나시면 되겠네요. 김태웅 주무관, 실장님 옆으로 와요. 오늘 술 한 잔 찐하게 하면서 실장님한테 다시 잘 보여 보자고요.”

    “아…….”

    김태웅은 머리를 긁적이며 백현이 시키는 대로 아직 오지 않은 실장의 오른쪽에 앉았다.

    강백현이 오자마자 자리를 정리하자, 밑에 직원들은 수근덕대기 시작했다.

    ‘와, 센스 쩐다.’

    ‘젊은 친구라 그런지 감각 있네.’

    ‘잘 생겼네. 키도 크고.’

    ‘팀장들 두 꼰대랑은 달라.’

    잠시 후 고태준 실장이 도착했다.

    실장이 도착하자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

    실장은 중앙 테이블, 자신의 비워진 자리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뭐 다들 일어나 있고 그래? 음식은 시켰나?”

    “네. 모듬회 스페셜로 시켰습니다.”

    “그래. 다들 앉지. 먹자고.”

    고태준 실장은 자신의 왼쪽에 앉은 강백현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그런데 우측에 김태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네는 많이 반성하고 있나?”

    “네. 실장님, 죄송했습니다.”

    김태웅은 남들이 다 자신을 쳐다보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사실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차우현 주무관 뿐, 감찰팀도 조사팀도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한 지 꽤 된 상태라 이런 회식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그런데 실장의 첫 마디조차 반성하고 있냐는 질문이니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를 옹호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실장님, 오늘 와서 하는 말인데요. 김태웅 주무관이 여자 친구한테 홀려서 돈도 까먹고 공문서 위조도 했지 않습니까?”

    “아-그렇지. 여자 친구가 부주시 공무원이라고 했었지?”

    “네. 그 친구 징계를 김태웅 주무관이 맡았거든요. 근태 관리가 엉망이었는데, 그 부분 체크해서 징계하면서 저한테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겠다고 살짝 말했었습니다.”

    김태웅이 강백현의 말에 깜짝 놀라며 ‘내가 언제 인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흥미가 생긴 실장이 강백현을 향해 재촉했다.

    “계속 이야기해보게.”

    “네. 남자들 가끔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도박이나 이성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저지르는 그런 것. 그 친구가 얼마나 예뻤으면 공문서 위조하고, 불알친구까지 배신할 생각을 다 했겠습니까. 이제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직생활 한다고 저한테 말하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저희 직원들이 자신을 왕따시키는 건 아닌가 고민도 한다고 하고요.”

    “하하하, 왕따는 무슨! 열심히 해야지.”

    “태웅아, 왕따 아니고 실장님이 열심히 하라고 하신다. 얼른 술 한 잔 올려.”

    김태웅은 자신의 치부를 공개석상에서 드러내는 강백현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실장님께 술을 따르라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더구나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 강백현의 넥타이를 붙잡으며 항의할 수는 없는 일.

    그의 권유대로 고태준 실장에게 술을 따르자, 실장이 김태웅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남자가 실수할 수 있는데, 반복되면 가차 없어. 김태웅! 강 팀장 말대로 사회생활 조심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고태준 실장의 술잔이 가득차자, 강백현이 방긋 웃으며 자리를 주도했다.

    “실장님 잔 꽉 찼습니다. 아직 술 안 채우신 분 누구십니까? 옆자리, 앞자리 꽉꽉 따라주시고요. 알코올 못 드신다 싶으시면 술 같은 물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술 같은 물.

    아저씨 같은 농담에 빵 터지는 직원들.

    “아, 웃겨. 술 같은 물이래.”

    “물 같은 술 아닌 게 어디야.”

    “아~ 재미없거든?”

    “난 재미있는데?”

    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술자리에 웃음꽃이 피자, 고태준 실장도 기분이 좋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

    고태준은 자신을 도와주는 26명의 구성원들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벌써 2015년을 마무리하는 12월입니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네요. 올해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다들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올 한 해 마무리 지으실 일들은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으시고, 2016년 병신년에는 각자 꿈과 희망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위하여!』

    김태웅은 민망한 분위기에 술 한 잔을 넘겼다.

    그런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던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김태웅 주무관도 마셔!”

    “아. 네. 선배님.”

    “태웅이, 고생 많았다. 내년에는 잘 해.”

    “아- 선배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태웅 씨 민망할까봐 말 안 건 거 알죠? 앞으로 아는 척 많이 할게요.”

    “아- 네. 현희 씨.”

    그런 변화를 준 친구가 옆에 있었다.

    “하하하하, 아~ 감찰팀장님, 조사팀장님, 저희 친하게 지내요. 저는 업무적인 건 양보 못하지만, 이런 술자리나 사적인 부분은 뭐든 다 양보할 수 있습니다. 네? 표정 푸시고요.”

    “하하하, 강 팀장, 우리 친하지 않았나? 실장님 앞에서 왜 그러나?”

    “에이~ 오 팀장님하고 최 팀장님! 저랑은 아직 어색한 사이잖아요. 제가 잘 할게요. 한잔 올리겠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일촉즉발 상황까지 갔던 감찰팀장과 조사팀장 앞에서 넉살 좋게 술을 따라 올리는 강백현의 모습이 낯설다.

    ‘쟤, 원래 사회생활 잘했나? 친구들하고 있을 때랑은 딴판인데?’

    * * *

    시간이 흘러 1차 회식 자리가 끝나갈 때, 강백현이 김태웅을 바깥으로 따로 불렀다.

    “잠시 할 얘기 있어.”

    “아- 넵.”

    횟집 앞마당에 나온 그들은 담배 태우는 사람들로부터 살짝 떨어진 후 대화를 시작했다.

    “태웅아, 나 너 아직 용서한 거 아니다.”

    “뭐?”

    “너한테 기회를 준 거야. 앞으로 우리 관계 예전처럼 돌아가긴 힘들 거다. 물론 네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너 친구가 아닌 부하 직원처럼 대할 거야.”

    “…….”

    “그렇다고 너를 해코지 하려는 것은 아니다. 네 인생 바꿔주기 위해 노력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지금부터 새 시작 해.”

    강백현의 말에 김태웅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아니야. 고맙다.”

    “됐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지금은 내가 미울 거야. 네가 생각하기에 난 다 가진 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취했냐?”

    “취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난 내 주변 사람이 필요해. 가까운 사람. 날 도와줄 사람.”

    “미친 놈, 취했네.”

    “아무튼 열심히 살아라. 혹시 나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아이고~ 미친 놈. 됐거든?”

    그때, 김태웅과 강백현의 곁에 같은 팀원 한 명이 나타났다.

    “김태웅, 너 팀장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 선배님.”

    “팀장님 춥습니다. 들어가시죠.”

    “아, 차우현 주무관님, 감사의 말씀을 못 드렸네요.”

    강백현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이고~ 됐습니다. 이따 2차 가서 따로 말씀하시죠. 밖에 춥습니다. 얼른 들어가세요.”

    “넵. 들어가시죠.”

    “아니요. 전 태웅이 놈이랑 얘기 좀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네.”

    강백현이 다시 횟집으로 들어가고, 차우현이 궁금한 얼굴로 김태웅에게 물었다.

    “팀장님이 너한테 무슨 얘기 하셨냐?”

    “네?”

    “아니, 너 임마, 팀장님이 너 무시당하는 거 못 보겠어서 그렇게 분위기 조성한 거 알지? 넌 근데 누가 봐도 기분 나쁘다고 인상 팍팍 쓰고. 너 진짜 나쁜 새끼인거 알지?”

    “아…….”

    “무슨 얘기 했어?”

    “아니, 그냥 앞으로 친구 아니고 부하직원이라고.”

    “어휴~ 답답한 놈. 들어가.”

    차우현은 강백현과 김태웅 사이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궁금증이 풀렸는지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김태웅도 궁금증이 생겼나보다.

    “네. 그런데 선배님?”

    “응.”

    “2차는 어디로 가십니까? 저도 가면 안 됩니까?”

    “어. 안 돼. 인마. 넌 안 데려가.”

    “아~ 저도 데려가주시면 안 됩니까?”

    “왜? 너 오늘 회식자리 빼고 싶어서 나한테 10번은 얘기했잖아. 근데 지금은 술 고프냐?”

    차우현의 말에 김태웅이 대답했다.

    “네. 술 완전 고픕니다. 2차 저도 가게 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잘 말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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