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97화
고태준 실장의 딸과 만나보라는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나도 좋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있네. 내 딸 괜찮아. 미국에서 대학 나오고, 지금은 로스쿨 다니고 있지. 다만 걱정이라고 하면 공부만 해서 연애에 통 관심이 없단 말이야. 어때? 시간 되나?”
“아- 아닙니다. 말씀 주신 건 참 감사합니다만, 저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분에게 실망을 주고 싶진 않네요.”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지.”
강백현은 고태준 실장의 얼굴에서 실망한 표정을 보았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서른. 왜?”
“아- 아닙니다.”
“응? 뭐가 아닌데?”
“아니, 주변에 괜찮은 친구가 한 명 있긴 한데, 소개해드리기엔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서요. 아, 위로 나는 겁니다. 아래 말고요. 일단 주변에 좋은 사람 있으면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이만 나가보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실장님?”
“응?”
“오늘 성과분석회의 브리핑 정말 좋았습니다. 도지사님도 만족하신 눈치셨습니다. 저희 감사실 직원들 전부 다 만족하는 눈치였구요.”
“그랬나?”
“네. 정말 멋졌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강백현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고태준이 앞까지 나오며 배웅했다.
고태준 실장의 마음속에는 강백현이 들어서 있었다.
‘도지사님 마음까지 홀리다니, 젊은 친구가 정말 대단해. 하긴 나도 어쩔 수 없나?’
조금은 과격하고 무식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21세기에 와서 정의를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가 펼치는 정의에는 묘한 짠내가 깃들어 있었다.
그게 뭘까 잠시 고민하던 고태준 실장은 백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
방금 전에도 딸을 소개시켜준다는 말에 거절을 했지만, 다시 한 번 나이를 묻고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알아보겠다고 한다. 그런 말 한 마디에서 그의 성품이 흘러나온다.
‘보면 볼수록 괜찮단 말이야.’
한편, 강백현은 자신의 주변에서 좋은 사람을 찾다 고개를 저었다.
미국 유학파에 로스쿨이면 적어도 그에 맞는 상대를 찾아야 한다.
자신의 주변에서 한 명만 고르라면 최용규 선배가 딱인데…….
일단 죽은 사람은 패스.
그렇다고 주변에 학벌 좋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동기들이 있긴 하지만 걔네들은 너무 어리다.
오현수가 나이대가 맞긴 하지만, 지금은 지혜와 사귀는 중이니 패스.
‘어? 지혜 오빠. 지혜 오빠가 있었네.’
그래서 강백현이 전화를 걸었다.
울리자마자 5초도 안 돼서 받는 김지혜.
- 여보세요? 백현 오빠?
“어. 지혜야. 소개팅 자리가 있는데 생각 있나 해서 전화했어.”
- 소개팅이요?
“응. 너 말고 너희 사촌오빠 있잖아. 그 외교관. 우리 감사실장님 따님이 서른 살인데, 미국 유학파시고, 지금은 로스쿨 합격해서 다니고 계신가 봐. 어때?”
- 아, 물어볼게요. 그런데 오빠는 그 언니랑 사귀어요?
“아니, 아직 그런 건 아닌데?”
- 아니에요. 오빠가 전화했길래 그냥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그 언니 이번 주에 오죠?
“응. 넌 현수랑 잘 되고 있지?”
- 아니에요. 오빠, 들어가요.
“응. 그래. 지혜야. 한 번 물어봐줘.”
- 네. 들어가요. 저 지금 일하는 중이라서요. 아, 오빠는 제가 설득해놓을게요. 약속 잡아주세요.
“어. 고마워. 지혜야. 진짜 고맙다.”
- 아니에요. 오빠. 나중에 통화해요.
“응. 그래.”
강백현은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의 밝은 목소리와는 달리 지혜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마음에 걸렸다.
‘고맙긴 한데, 영 기분이 안 좋네. 아직도 나 좋아하는 거야?’
그때 최용규가 나타나서 강백현에게 핀잔을 늘어놓는다.
[처음부터 잘해주지 말았어야지.]
“네?”
[연고 발라주고 밴드 붙여주면 오해 안 하냐? 내가 여자여도 이 남자가 나 좋아한다고 오해하겠다. 얼른 걔 책임져.]
“뭘 책임져요. 아, 진짜 좀 그만해요.”
[야, 너 죽을 때 다 된 거 알지? 살생부에 너 있다고 했다. 조심해.]
“네? 그거 아직도 믿어요?”
[위험하다니까? 살생부 그게 진짜 위험한 거야. 죽는 거라니까.]
“알았어요. 그럼 제가 어떻게 죽는데요?”
[그걸 알면 내가 네 옆에 있겠냐?]
“저승사자한테 물어보고 와요. 그 사람은 뭔가 알 거 아니에요.”
[그게 안 보여서 그런다. 며칠 동안 찾아봤는데도 안 보여.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진짜.]
최용규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선배, 전 모르겠네요. 사고로 죽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죽는지 그런 거라도 알아봐줘요. 그거 정확히 모르면 입 뻥긋도 하지 마시고요.”
[......]
* * *
최용규는 한숨을 내쉬며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12월 말의 충청남도.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산과 논에 먼저 쌓이기 시작한 눈은 이윽고 아스팔트까지 점령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타이어가 눈을 녹이는 것도 한계에 달한 것이다.
‘이 놈의 저승사자는 어딜 간 거야?’
찾지 않을 때는 매번 먼저 얼굴을 내밀던 그가 최근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하늘에서 그 분이 찾아왔다.
저승사자 이성복이었다.
[어르신! 어르신! 용규입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최용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성복을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옛끼 이놈아, 정말 보고 싶었던 게냐?]
[그럼요. 어르신 보고 싶어 맨날 찾아다녔다니까요. 어딜 그렇게 다녀오셨어요?]
이성복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킨다.
위는 천국을 말한다.
[천국은 왜요?]
[영혼이 약해져서 회복하려 다녀왔다. 왜? 이놈아, 너도 이제 천국 갈 생각이 든 게냐?]
[아니요. 어르신, 전 항상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성현이랑 같이 가겠다고.]
이성복은 고개를 저으며 최용규에게 말했다.
[김성현만 데리고 가고 싶은 건 아니잖아.]
[네?]
[강백현, 그 친구도 천국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거잖아. 그래서 그 친구 옆에 계속 붙어 있는 거고.]
[물론 백현이가 천국 가면 좋죠. 근데 살생부에는 왜 적혀 있는 건가요? 언제 죽나요?]
최용규의 질문에 이성복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알고 싶으냐?]
[네. 어르신, 알고 싶습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운명을 거스르면 안 되는 게야. 그래도 알고 싶으냐?]
[아- 그래도 알고 싶은데요.]
이성복은 최용규의 의지를 확인하고자 말했다.
[아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냥은 못 알려주지.]
[어르신, 어떻게 해야 알려주시는데요?]
[제자가 된다면 고려해보지. 때마침 저승사자도 새로 뽑아야 할 때가 왔기도 하고. 어떠냐?]
이성복의 말에 최용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승사자가 되라고요? 제가요?]
[그래야 살생부를 보지? 저승사자가 아니고서야 산 자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알아?]
[아, 됐습니다. 어르신, 제가 저승사자를 왜 합니까?]
최용규의 말에 이성복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입에 올렸다.
[김성현, 그 아이가 죽어도?]
[성현이가 갑자기 왜요?]
[내가 그걸 자네한테 왜 이야길 하냐? 옜기! 됐다 이놈아.]
이성복은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뜨려 하자, 안달이 난 최용규가 바짝 붙어 물었다.
[성현이 어떻게 죽나요? 왜요? 뭐 때문에?]
[이놈아, 저승사자 할 거 아니면 묻지 마러. 옛끼 이 놈 새끼!]
[아, 어르신! 어르신! 어르신!]
[그럼 난 바빠서 간다.]
[아~ 같이 가요! 같이 가자니까요!]
* * *
강백현은 32살의 마지막을 가족과 보내고 싶었다.
‘아, 죽는다는 말 들으니까 괜히 기분이 묘하네.’
부모님보다 오래 살아야 되는데.
예로부터 부모보다 일찍 죽는 자식만큼 불효자는 없다고 했다.
아직 제대로 된 효도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강백현은 일찍 퇴근할 생각으로 부모님과 약속을 잡았다.
[강백현] : 오늘 가족 모임 있습니다. 아빠, 오늘 쉬는 날이시죠? 엄마도 식당 끝나면 찍어드리는 장소로 오세요.
[엄마] : 무슨 일 있어? 집에서 쉬고 싶은데.
[아빠] : 아들, 무슨 일 있어?
[강백현] : 오늘 한우불고기 먹는 날입니다. 제가 부모님 소고기 좀 사드리고 싶어서요.
[엄마] : 돈 아껴 써. 모으고. 결혼해야지.
[아빠] : 소고기 안 먹어도 된다.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마.
[강백현] : 이미 식당예약 잡았고 돈도 입금했습니다. 무를 수 없어요. 무조건 나오세요. 10만원 이미 입금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엄마] : 얘가 미쳤나 봐.
[아빠] :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아. 알았어. 장소 찍어 놔.
[강백현] : 네. 여기 장소로 오시면 돼요. 오후 7시에요.
강백현은 씩 웃었다.
식당 예약을 잡았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입금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물론 선의의 거짓말.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부모님은 돈이 아깝다고 절대 소고기를 먹지 않을 분들이기 때문이다.
‘아마 집에서 소고기 구워먹자고 해도 안 드실 거야. 응. 분명해.’
부모님이 얼마나 아껴 쓰는지를 알고 있기에 한 행동.
그래도 부담스럽진 않다.
공무원 8급과 공무원 5급의 월급 차이는 넘사벽이니까.
그때, 고태준 실장이 전화로 팀장 셋을 동시에 부른다.
- 강 팀장, 시간 되면 내 방으로 와.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바로 가겠습니다.”
강백현을 제외한 두 팀장도 성과상여금 이야기인 줄 알고 곧장 실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고태준 실장은 성과상여금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오늘, 우리 감사실 회식할 건데 가능한가?”
그의 이야기에 감찰팀장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감찰팀 전원 참석시키겠습니다. 무조건 참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자 조사팀장도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며 답했다.
“조사팀도 전원 참석하겠습니다. 저희도 전원 참석 가능합니다.”
지금은 잘 보여야 할 때. 오복주 팀장도 최기철 팀장도 실장이 좋아할 만한 발언을 한 것. 헌데 그때, 강백현 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죄송한데 저는 오늘 가족 행사가 있어서 참석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당일이라 저희 팀원들은 참석 가능한지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복주와 최기철은 강백현의 말에 속으로 씩 웃었다.
‘바보잖아. 지금 같은 타이밍에?’
‘생각이 없군. 생각이 없어. 성과상여금은 날아갔네. 잘 됐다. 넌 사회생활 좀 해야 돼. 싸가지 없는 놈.’
그런데 강백현의 뒤쪽 말이 의외다.
“아, 실장님, 아까 말씀하신 그 소개팅, 제가 아는 외교관이 있는데 혹시 괜찮을까요?”
“외교관?”
“네. 얼굴도 잘생겼고요. 행동도 바른 사람이에요. 제 아는 동생 오빠인데, 추천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도 한 번 만나본 적 있고요.”
“하하하, 외교관이라고 하니까 좀 끌리는데? 어디 한 번 사진 좀 줘보지.”
“네. 알겠습니다. 제가 그 분한테 연락해보고 실장님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식 불참은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야. 회식은 내일로 미루지. 내일은 가능하지?”
“네. 시간 빼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감찰팀도, 조사팀도, 우리 감사실 내일 전원 회식하는 걸로 하자고!”
팀장들이 실장실을 빠져나갔다.
웬지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드는 오복주와 최기철.
“이거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그런 것 같은데요. 뭐죠? 왜 실장님이 강 팀장 편만 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