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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94화 (94/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94화

    강백현의 결정에 최현희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노력이 헛것은 아니었어.’

    - 좋아요. 빠른 시일 내로 연락드려볼게요. 좋은 결정 하신 거예요.

    최현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빠, 해냈어요. 나도 할 줄 안다고요.’

    최현희는 지체없이 자신의 아버지 최장철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거활동으로 바쁜 아빠임에도 딸의 전화를 받는다.

    “그래. 현희야. 무슨 일이야?”

    “아빠, 약속 잡았어.”

    * * *

    한편, 강백현은 직장협의회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너무 실망스러워 사무실로 돌아온 상태였다.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오랜만에 돌아온 최용규 선배의 말에 강백현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말했다.

    “오늘 진짜 우울하네요.”

    [무슨 일 있었어?]

    “노조 때문에 연락이 와서 직장협의회 다녀왔었거든요.”

    [아- 크크크, 노조 가입하라고 했구나? 부지사는 어떻게 나한테 했던 이야기를 너한테 똑같이 하냐?]

    최용규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강백현이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그래서 선배는 어떻게 했어요?”

    [나? 당연히 노조에 가입했지.]

    “왜요?”

    [그래야 표면적으로 문제없는 사람으로 보이니까. 가입 안 하면 이상하잖아.]

    “선배는 어느 쪽이신데요?”

    [나? 성현이편?]

    최용규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장난치지 마시고요.”

    [난 중도야. 아니 중도였지. 모든 정책이 국민을 위한 정책은 아니잖아. 어느 때는 여당이 맞고, 어느 때는 야당이 맞고, 둘 다 맞을 때도 있고, 둘 다 나한테 안 맞을 때도 있고 그런 거지.]

    “그런데 왜 가입하신 건데요?”

    [정보를 얻기 위해서지. 공무원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게 노조잖아?]

    확실히 선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렇네요. 저는 이제까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고요.”

    [마음이 바뀐 거지?]

    “네. 올바른 정보를 취합하고, 내가 갈 길은 내가 선택한다. 역시 선배하고 대화를 하니 뭔가 의문점이 풀리네요.”

    그때, 최현희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백현 씨, 1월 1일 오후 2시, 종각역 인근 한정식 집, 거기서 아빠랑 나랑 백현 씨 3명이서 점심 먹는 것으로 약속 잡아놓을게요. 문제없죠?

    “아, 1월 1일이면 약속이 있는데요.”

    1월 1일, 휴일이긴 하지만, 김성현이 한국에 온다고 했다.

    하지만 최현희는 곤란해 하는 눈치였다.

    - 4선 국회의원은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아요. 더구나 선거철이잖아요. 그날로 해요. 백현 씨가 원했던 자리니까요.

    “알았어요. 1월 1일 오후 2시, 종각역 근처 한정식집으로 가겠습니다. 정확한 주소 보내주세요.”

    강백현의 전화통화를 확인한 최용규가 깜짝 놀라 물었다.

    [최현희? 내가 뒷조사 하던 최장철 국회의원 딸?]

    “네. 맞아요.”

    [너 뭐야? 노조 가입하려고 물어본 거 아니었어?]

    “네. 정보를 얻으려면 가입하는 게 맞긴 한데, 사실 그럴 필요가 있나 싶네요.”

    [응?]

    “저한테는 정보원이 있잖아요. 그 누구한테도 들키지 않고 증거도 남기지 않고 뭐든지 확인해 줄 정보원이요.”

    강백현은 방긋 웃으며 최용규를 응시했다.

    [나? 내가 정보원이 되라고?]

    “네. 요즘 다른 곳 자주 돌아다니시는데, 저를 위해서 좀 노력해주세요. 네?”

    [하아- 인마, 내가 돌아다니는 건…….]

    최용규는 자신이 왜 바삐 돌아다니는지 설명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이제 곧 너 죽을지도 몰라 인마. 그럼 성현이 또 난리 날 거고.’

    최용규는 백현이 죽으면 성현이 다시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내가 너 살리려고 얼마나 발버둥치는 지 알아? 아냐고!’

    살생부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최용규는 최근 김성현의 곁이 아니라 저승사자를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한 해가 가기 전, 강백현이 죽는 이유와 그 죽음을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너 죽으면 성현이는 어떻게 하냐? 이제 막 살려고 발버둥치는 중인데, 네가 그 버팀목인데!’

    최용규는 어느새 김성현과 강백현을 동일선상에 올려두고 있었다. 이승에 남은 이유는 가족도 아닌 김성현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강백현이라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그걸 모르고 자신이 뜻대로 움직여주길 바라고 있다.

    아직 죽어보지도 못한 철없는 녀석이 꿈을 위해 작은 목소리로 부탁을 한다.

    “선배, 협조해주실 거죠? 선배가 저 대통령도 만들어 준다고 하셨잖아요! 이 작은 부탁도 못 들어주시는 건 아니죠?”

    [일단 가만히 있어 봐. 네 생각이 다 맞는 거 아니니까.]

    “알아요. 하지만 절 다른 사람이 가만두지 않는다고요.”

    [미친 척이라도 해. 그럼 관심 끊을지도 몰라.]

    “……. 실망입니다.”

    강백현의 삐진 모습에 최용규가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고 쳐다보았다.

    [‘그래. 토라져 있어. 그 여유, 그 행복한 시절, 조금이라도 더 누려. 죽으면 다 끝장이니까.’]

    최용규는 죽음은 외롭다고 생각했다.

    죽어보니 알았다. 다른 자와 교류할 수도 없고, 이루고자 했던 꿈과 희망은 다른 자에게 송두리째 빼앗겨버리고, 허망한 감정만 남는 이 기분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온다.

    [성현이랑 정식으로 데이트하기 전에 전화라도 해. 성현이는 먼저 연락해주는 사람 좋아해.]

    “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선배는 제가 성현 씨 만나는 거 절대 용납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그게 맞아. 성현이 기쁘게 해주라고.]

    “넵. 퇴근하고 바로 연락할게요. 프랑스는 아직 새벽이니까 지금은 일러요.”

    * * *

    강백현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퇴근 후, 앞서 전화 온 070 번호, 아마 인터넷 전화인 듯한 번호로 전화로 걸었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백현 씨?

    “네. 실장님.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뭐하세요?”

    - 백현 씨 생각?

    “넵? 제 생각이요?”

    - 재미없었어요? 흐흐, 백현 씨가 맨날 느끼하게 대답하니까 내가 장난 좀 쳐본 건데?

    “아주 재미없었습니다. 너무너무 재미없는데, 이거 큰일이네요.”

    백현의 말에 김성현이 새침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 큰일이라뇨?

    “대한민국 여성패션의 선두주자인 김성현 디자이너님께서 이런 장난을 치시다니, 부하직원들이 알면 웃겠어요.”

    - 크크, 뭐래~ 아 짜증나. 지금 어디에요?

    김성현이 강백현의 근황을 물었다. 내심 반가운 눈치였다.

    “오늘 봉사활동 가요. 성탄절 전야제라서 산타복 입고 윤수 만나러 가야죠.”

    - 아……. 기다리겠네. 빨리 가요. 이따 전화할게요.

    “넵!”

    강백현이 가는 곳은 보육원. 성탄절 쓸쓸한 어린 친구들을 위해 12월 24일만큼은 빼먹지 않고 선물을 챙겨 방문한다.

    강백현은 산타복장으로 갈아입고 보육원을 방문했다.

    그러자 원장님께서 거실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향해 반가운 표정으로 소개했다.

    “올해도 산타할아버지가 오셨어요! 다들 인사!”

    『우와! 산타할아버지닷.』

    『선물 주세여!』

    강백현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정현이, 이리 와. 할아버지가 선물 줄게.”

    “선물 뭐에요?”

    “뜯어봐.”

    “우와! 내가 갖고 싶었던 거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정현이가 선물을 열어보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너 변신 로봇 가지고 싶다고 했지? 형이 이거 구하느라 마트에서 줄 선 거 아냐? 기뻐해줘서 고맙다.’

    강백현은 방긋 웃으며 다음 순서를 불렀다.

    “수종이! 앞으로 나와.”

    “넵!”

    “수종이한테는 무슨 선물이 도착 했으려나?”

    수종이가 선물을 받고 너무너무 기뻐한다.

    수종이가 받고 싶어했던 선물은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크레파스 세트.

    “수종이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지?”

    “넵!”

    “형태, 민복이, 서진이도 같이 나와.”

    “응.”

    세 명이 달려 나오자, 산타할아버지로 분장한 강백현이 봉투를 나눠준다.

    “어?”

    “이게 뭐에요?”

    “앗, 문화상품권이다.”

    만원짜리 상품권 한 장씩 들어가 있는 봉투.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고 해도 상품권 맛은 안다.

    초등학생들한테 문화상품권은 일종의 특권.

    그때 백현의 얼굴에 윤수가 보였다.

    “윤수. 앞으로.”

    “칫. 산타도 아니면서.”

    “앞으로 안 오면 선물 없어.”

    “나가요. 나가요.”

    뭐가 그리 토라졌는지 윤수가 잔뜩 화난 눈치다.

    하긴, 벌써 10살, 곧 11살이 되는 윤수다.

    ‘윤수, 너 이거 받으면 좋아할 거야.’

    윤수가 산타할아버지로 분장한 강백현을 보며 말했다.

    “칫, 한 달에 한 번씩 오겠다는 약속도 안 지키고서. 상품권이나 로봇 필요 없거든요?”

    “스마트폰인데 정말 안 받을 거야?”

    “어?”

    강백현은 거금을 들여 윤수에게 스마트폰을 선물했다.

    물론 고가폰은 아니었다.

    그래도 국산기종으로 골랐다. 그 이유는 수리를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와! 스마트폰이에요?”

    “그럼 산타할아버지는 바빠서 이만 물러가요. 내년에 또 봅시다.”

    『모두 산타할아버지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고맙습니다.』

    강백현이 다시 차로 돌아가 산타분장을 벗고 보육원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신이 난 얼굴로 다 같이 거실에 모여 만화영화를 보고 있다.

    백현은 원장실로 향해 인사를 드렸다.

    “원장님, 오랜만에 들려요.”

    “응. 백현이 소식 들었어. 사무관 합격했다며.”

    “네? 들으셨어요?”

    “응. 부주시 예산관련해서 감사도 했다며. 그것 때문에 지자체 예산이 좀 남게 되어서 삭감되었던 보조비가 지급되었더라. 솔직히 사정이 어려웠는데 800만원이 한 번에 입금 돼서 3월까지는 숨통이 좀 트일 것 같아.”

    원장이 방긋 웃으며 백현의 활약을 칭찬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제가 한 일은 아니에요. 원래 공무원들이 해야 하는 일들인데, 부주시장이 예산을 다른 곳으로 전용하는 바람에 그랬던 거죠. 그래도 다행이네요. 누가 얘기했어요? 이런 거 원래 업무상 비밀이라서 얘기하면 안 되는데.”

    “백현이 후배 태곤이라던데?”

    “아, 태곤이요? 나중에 술 한 잔 사야겠네요.”

    그때, 누군가가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작은 실루엣, 아이다.

    “들어와.”

    “원장님! 산타할아버지가 스마트폰! 어?”

    윤수가 강백현을 보고 갑자기 멈칫했다.

    “윤수야. 오랜만이다.”

    “형아, 형아가 산타할아버지였지?”

    “아니. 산타할아버지는 다른 곳 가셨지. 왜 모르는 척 해?”

    이미 알 거 다 아는 윤수다.

    “스마트폰 잘 쓸게. 형이 준 거 알아.”

    강백현은 이제는 알 거 다 아는 윤수에게 산타할아버지의 진실을 알렸다.

    “그래. 스마트폰 요금은 형이 내니까 이상한 사이트 들어가지 마라.”

    백현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윤수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야동 안 볼게.”

    “어?”

    “나도 야동이 뭔지 알아. 나 내년이면 초등학교 4학년인데?”

    강백현이 윤수의 말에 위기감을 느끼며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님, 스마트폰 다시 뺏어야겠는데요?”

    “괜찮아. 자녀스마트폰 어플 깔고 안전모드로 돌려놓으면 돼. 그건 내가 관리할게.”

    “아. 그런 것도 있나요?”

    “그럼. 그런 거 모르면 애들 통제 안 돼. 백현이는 빨리 장가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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