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92화
최현희는 자신을 무시하는 강백현의 몰상식한 행동에 치를 떨었다.
아예 차단했는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멍청한 거야? 아빠가 인정한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는 거야?”
* * *
최현희는 하루 전, 자신의 집에 온 아빠의 보좌관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부주시장이 아무래도 낙선될 것 같습니다.”
“그래?!”
같은 여당이지만, 반대세력.
100% 당선이 확실시 되는 반대세력의 몰락에 최장철은 기꺼이 기뻐했다.
“하하하, 정말 대단한 청년이야. 이번에 수석으로 졸업한 강백현이라고 했었나?”
“네. 놀랍게도 전 부주시 공무원 출신으로 부주시장의 압력에 자진퇴직한 후, 5급 공무원에 붙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수석으로요.”
“그건 이미 알고 있네. 문제는 과연 그런 친구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졌는가 하는 거지.”
“여기 그 친구 사진입니다.”
보좌관이 강백현의 사진이 담긴 프로필을 뽑아두었다.
국회의원 요구자료로서 강백현의 인사기록 카드를 제공받은 것이다.
“보다시피 자력은 좋지 않습니다. 그 흔한 외국유학경력조차 없고, 가진 재산은 대출 7천만원을 낀 1억1천만원 아파트 한 채가 전부입니다. 그것도 부모재산이지요.”
보좌관의 말에 최현희가 씩 웃었다.
“완전 거지야. 별 볼일도 없는 놈이네요.”
그러자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장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현희야.”
“응. 아빠.”
“넌 저게 별 볼일 없어 보이니?”
“네?”
“제일 무서운 게 저 없는 재산이다. 저 없는 배경이 정치판에선 그 놈을 최고로 만들어줄게야. 저 놈을 반드시 우리 쪽 세력으로 영입해야 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10년, 아니 20년에서 30년은 건재할 수 있어.”
최현희는 아버지가 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강백현에게 집착하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수석이란 타이틀이 대단한 것은 맞다. 그런데 왜 거지새끼라는 게 제일 무섭다는 거야?
하지만 아빠의 저런 간절함을 들으니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백현과 안면이 있는 자신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자원했다.
“그럼 내가 걔 설득해보면 되지?”
“가능하겠어?”
“무조건 가능하지.”
최장철은 평소 못 미더운 딸의 자신 있는 대답에 기회를 주었다.
“그럼 쟁취해 와. 그 놈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내 앞으로 데려오면 내가 내 모든 정치 생명 걸고 현희 너를 최고의 여성 지도자로 키워주지. 이건 일종의 시험이다. 알겠니?”
“아빠, 그 말 지켜. 꼭 지키는 거다?”
* * *
그 이후 최현희는 강백현의 근황을 묻기 위해 조성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오늘 가산디지털단지에서 동기들끼리 모임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껄끄럽고 친하지 않은 동기들이었지만, 아빠가 탐내는 강백현을 영입하기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모임에 참석했다.
그런데 자신을 보자마자 일부러 자리를 뜨는 그의 개념 없는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보좌관에게 전화해서 고속버스터미널에 강백현 이름으로 예약된 티켓까지 확인하고 터미널 앞에서 기다렸다.
분명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서 대화를 시도했는데….
그때 최현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 만났어?
“만나긴 했는데….”
- 결과는 나중에 들을 테니 일단 집에 들어와. 아빠, 당원활동 때문에 인스타에 오늘까지 가족사진 근황 올려야 돼. 이번 슬로건이 가족 사랑이거든? 오늘내로 올려야 되니까 얼른 들어와. 술 마신 건 아니지?
“지금 바로 들어갈게요.”
- 그래. 시간은 많아. 당장의 결과를 원하진 않으니까, 얼른 집에 들어 와. 넌 네 할 일만 하면 돼. 나머진 아빠가 알아서 할 테니까.
최현희는 자신의 실패를 예상이라도 한 듯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아빠의 행동에 속이 쓰렸다.
하지만 이게 자신의 장점.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래. 아빠의 도움이 되려면 내가 잘 하면 돼. 그리고 내가 잘 나면!’
* * *
월요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자신이 기안한 문서를 실장님께서 결재하셨는지 확인한 강백현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렇게 감사계획을 바꾸셨네?’
강백현은 고태준 감사실장과 부지사가 말한 『자네 뜻대로 하게』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위에서 문서를 수정해서 결재하면 의미가 없다.
지금 수정된 감사계획 문건도 그랬다.
정기감사는 2년에 한 번씩 한다.
내년인 2016년에는 홍성, 서천, 서산, 천안, 금산, 논산이 해당되고, 그 후년에는 그해 실시하지 않은 그 외의 시, 군이 해당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내년인 2016년에 실시하는 정기 감사 일정이 모두 바뀐 것이다.
‘여당 소속만 먼저 편성했어. 나한테 총대 매라는 거잖아?’
대통령이 당선된 여당 소속이 시장이나 군수로 있는 홍성, 서천, 서산, 청양이 3월부터 차례대로 편성되어 있다. 반면 야당 소속이 재직 중인 금산, 논산은 10월, 11월로 뒤쪽에 편성되어 있는 것이다.
강백현은 자신에게 일언반구없이 감사일정이 바뀐 이유를 알아보려 실장님을 찾아가려 하다가 먼저 친한 차우현 주무관을 불렀다.
“주무관님, 잠깐 자판기 커피 어떠십니까?”
“좋죠. 하하, 주말 잘 쉬셨습니까?”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강백현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차우현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아, 팀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감사계획 일정이 변경되어서요. 온-나라 시스템 기록 확인해보니까, 실장님께서 중간에 수정을 하셨네요.”
그러자 차우현 주무관이 강백현을 응원했다.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네?”
“정치적 논리에 휘둘리지 마시고 그냥 소신껏 행동하시면 됩니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는 일이 바뀐 건 아닙니다.”
“그렇죠. 하지만 한쪽 정당만 파고 든다는 뉘앙스를 풍길 순 있는 일입니다. 이건 조치가 필요하겠네요.”
“조치요? 음… 잘 하시는 분이라는 건 알지만….”
“알아서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표정이 엄청 좋으십니다?”
“하하하, 마누라하고 자식들, 해외여행 보냈거든요. 돈은 좀 썼지만 자유를 얻었죠. 오늘 끝나고 한잔 어떠십니까?”
차우현의 말에 강백현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콜이죠! 일단 업무는 끝내고요.”
* * *
다시 사무실에 돌아온 강백현은 잠시 고민하다 실장님께 대면보고를 청했다.
“실장님, 시간 되십니까?”
“응. 들어오지.”
감사실장은 강백현을 보며 소파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안 올린 감사계획 일정이 수정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내가 수정했네. 문제될 게 있나?”
고태준 실장은 일부러 감사일정을 조정했다.
무작위로 편성된 일정을 적대정당인 여당 소속의 기초단체장부터 감사하도록 조정한 것이다.
그런데 강백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정 자체가 지자체의 중요일정을 피해서 결정한 부분인데, 청양군의 고추축제와 서산시의 머드축제, 그리고 금산군의 인삼축제가 실장님께서 변경한 감사일정하고 겹치게 됐습니다. 이거 각 지자체로 바로 공문 내려가면 큰일납니다. 지금이라도 회수하셔야 합니다. 이미 지자체 내년 일정 다 확인한 부분이여서 이건 저희가 조정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강백현의 말에 고태준 실장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하나만 생각했는데, 강백현은 둘을 생각해두었던 것.
강백현은 업무를 함에 있어 대충이 없었다.
각 시, 군과 협조해서 가장 원만하게 감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사전에 고려해서 편성했던 것인데 그것을 실장이 틀어버려 문제가 된 것이다.
“그걸 왜 지금 말하나?”
“실장님께서 병가 휴가 중이셔서 보고 드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단 부지사님 결재하시기 전에 회수해주시면 제가 다시 기안해서 수정보고 올리겠습니다.”
“그거 일정, 부지사님이 정하신 거야.”
“부지사님이 실장님께 감사일정을 조정하라고 하신 거였습니까?”
“그래. 자네가 부지사님께 직접 전화 드리게. 내가 지금 전화 드리기가 뭐해. 이미 올렸잖아.”
“알겠습니다.”
강백현은 지체 없이 충남 부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충청남도에서 2번째로 높은 사람이었지만, 지난주 안면을 터두었기에 전화 정도에 주저하진 않았다.
- 부지사 오성국입니다. 누구시죠?
“감사팀장 강백현입니다. 부지사님, 주말 잘 지내셨죠?”
- 아, 반갑네. 자네가 전화를 다 하고, 혹시 마음이 정해진 겐가?
부지사는 젊은 친구의 전화에 반가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함께 하겠다는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강백현의 대답은 기대와는 달리 업무적인 내용뿐이었다.
“내년도 감사계획 기안 올린 것, 아직 결재 안 하셨던데 반려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정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 왜지?
“부지사님, 지자체 일정 고려해본 결과 수정된 감사일정으로 진행하면 지자체 연간계획 자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저희도 감사를 원활히 진행할 수 없고요. 최대한 바쁜 시기는 피해야 공무원들도 감사받을 준비를 하지 않습니까?”
- 일정 조정은 어렵겠는데?
“지자체 축제 일정하고 3곳이나 겹칩니다. 이건 무조건 수정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사님이 의도하신 바는 알겠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업무조정하시면 오히려 너무 뻔해보여서 제가 총대를 못 맵니다. 일단 제가 다시 수정공문 올릴 테니, 결재 부탁드리겠습니다.”
강백현은 부지사의 의도인 여당 소속 지자체의 감사 자체는 그대로 두고 날자만 한 주나 두 주 뒤로 미루어 지자체의 중요 행사와 겹치는 불상사를 막았다.
부지사 및 실장의 의도를 충족하면서도 지차제 공무원들의 업무 편의도 배려한 전혀 새로운 안이었다.
‘정면 돌파하겠다는 건가?’
부지사는 새로 수정한 기안을 보며 강백현이 자신의 계획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장 3월. 3월부터 감사일정이 시작된다.
여당 소속의 부정부패가 강백현의 손에 의해 계속 드러날 거고, 세간에도 크게 회자될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였기에 고태준 실장과 오성국 부지사는 최종 결재를 마쳤다.
‘이걸 받아들였다는 건 우리 편으로 오겠다는 거지? 그래. 잘 생각했네.’
이윽고 각 시, 군으로 강백현이 기안한 내년도 감사계획이 하달되었다.
기본문구, 원스트라이크 아웃이 포함된 문건.
그리고 여당만 저격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일정.
한편, 부주시장은 해당 공문을 보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새끼가! 날 재물로 바쳐? 밟아놨어야 돼. 어떻게든 징계를 했어야 했는데.’
하늘 모르고 날뛰는 신임사무관의 행동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버렸고,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 또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감찰 조사를 받는 와중에도 선거활동은 해야 하고 선거자금은 필요한데 도와줄 사람은 없다.
시장이란 직위 자체가 선거활동에선 굉장히 제약이 많은데, 이번에는 돈도 모이질 않는다.
더구나.
- 시장님, 저번에 준 돈 돌려주십시오.
“춘복아, 한 번 준 돈은 다시 안 돌려줘.”
- 시장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러다 같이 죽습니다? 네?
“야!”
- 선관위하고 감찰 쪽에서 제 연락처 받아갔는데, 제가 뇌물 줬다고 진술하면 시장님도 끝이지 않습니까?
“이-씨팔! 그러면 너도 죽고 나도 죽어. 지금 장난하냐?”
- 그러니까 시장님은 제가 드린 돈만 돌려주시면 됩니다. 네? 같이 살자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부주시장은 깨달았다. 자신의 정치인생은 이것으로 끝났다는 것을.
한편, 강백현은 감사계획이 통과된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시장님, 그리고 실장님,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절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겁니다.’
사무관 이상의 직급만 신청 가능한 국비유학과정이 있다. 최하 1년의 경력이 필요한 과정이다.
동기들은 경력이 부족했지만, 강백현은 이미 공무원 경력 3년을 넘겼기 때문에 유학을 신청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강백현은 국비유학과정 등록을 위해 서류를 작성한 후 이를 메모보고를 통해 담당자에게 보내며 생각했다.
‘전 처음부터 5급 공무원이 되면 대학원 진학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부주시장에 대한 복수도 마쳤으니 조금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겠죠. 실장님, 그리고 부지사님, 뒤를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