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90화 (90/139)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90화

고태준 실장과 같이 사무실에 돌아온 강백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업무에 집중했다.

고태준 실장은 검토하던 문건을 눈으로 확인한 후 씩 웃으며 강백현에게 말했다.

“감사계획은 잘 봤네. 나머진 내가 수정할 테니까, 자네는 문서 기안해서 올려놔.”

“네. 실장님.”

강백현은 실장과의 대화를 끝낸 후 최용규를 찾았다.

아까 다방에서 최용규 선배가 말하려던 게 무엇인지 알고자 했던 것.

그런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의 연락이 왔다.

인재개발원 동기 4인방의 채팅방.

[조성환] : 형님, 누님들 잘 지내고 계세요?

[오현수] : ㅇㅇ. 성환이 네가 웬일이냐?

[조성환] : 연말인데 한 번 모여야죠. 수료하고 다들 연락이 뜸하셔서 제가 먼저 연락드립니다. 이번 주 주말 시간 가능하신나요?

[김지혜] : 꼭 봐야 돼?

[오현수] : 저 다음 달 군대 갑니다. 봐야 돼요.

[김지혜] : 군대?

[조성환] : 네. 영장 나왔어요. 입대하랍니다. ㅠㅠ.

강백현은 과거 룸메이트의 입대 소식에 답글을 달았다.

[강백현] : ㅇㅇ. 나 이번 주 주말 시간 가능할 듯.

[조성환] : 넵. 지혜 누님은요?

[김지혜] : 응. 나도 시간 내 볼게. 군대 간다는데 어떻게 하니? 나라도 가줘야지.

[조성환] : ㅋㅋㅋ. 고맙습니다. 지혜 누님 오시면 현수 형님도 오시겠네요.

[오현수] : 앙! 장소 남겨놔. 되도록 토요일이면 좋겠다.

[조성환] : 네. 내일 저녁 7시,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역 4번 출구에서 뵙겠습니다.

[강백현] : ㅇㅇ.

2주만에 동기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3개월 동안 함께한 추억.

정말 소중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강백현의 머릿속을 헤매고 있었다.

같은 시각.

또 한 명의 사내가 과거를 상기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언제까지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거지?’

고기웅은 성한 그룹이 소유한 제주도의 한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커다란 목장이 딸린 별장으로, 자신의 형과 관리인이 함께 거주하는 별장이었다.

“기웅아, 마음 좀 풀어. 편하게 생각하면 되잖아.”

친형인 고기준의 말에 고기웅이 분노의 감정을 토해냈다.

“형, 지금 기분 좋아? 내가 이런 취급 받으니까 기분 좋은 거지? 어?”

“기웅아, 또 흥분한다. 넌 왜 그렇게 세상을 복잡하게 살아? 그냥 욕심 안 부리고 살면 편해. 우린 풍족하잖아.”

고기준의 평온한 표정을 본 고기웅의 마음은 더 불타올랐다.

“그러셔? 내가 형 속을 모를 줄 알아? 형, 할아버지한테 신장 떼 준 거 다 재산 물려받으려고 그런 거였잖아. 지금 형 속으로는 나 엄청 비웃고 있는 거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난 그냥 조직검사 후에 할아버지랑 신장이 맞았고, 그래서 이식해드리고 싶어서 한 것뿐이야. 넌 왜 항상 삐뚤어지게 생각하냐?”

“개소리 집어치워. 형의 검은 속을 모를 것 같아? 형이 급성거부반응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지금의 성한그룹은 형 차지였겠지. 그래. 인정해. 형의 그 욕심, 자기 신장을 내어주면서까지 성한그룹을 먹어버리려고 했던 용기, 난 그렇지 못했으니까.”

고기웅의 말에 고기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하자.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네가 그런 말 한 거 아시면 용서 안 하실 거야.”

“형 사실은 건강하잖아. 지금 건강 다 회복됐는데도 기회가 오길 기다리는 거잖아. 안 그래?”

“넌 내가 탄 휠체어가 장난으로 보이니?”

“다 쇼야. 쇼! 쇼라고!”

“나 경영에 관심 없다고 했지? 재산도 지금 물려주신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감사해. 60억이야. 목장 포함해서 60억이나 물려주셨어. 넌 내가 여기서어떻게 더 욕심을 부린다고 그래?”

고기준은 동생인 고기웅을 설득하려 했다.

언제부턴가 동생은 일이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마약, 여자, 노름에 손을 댔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인 마냥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조종했다.

왜 그랬을까?

착하고 순하고 욕심 없는 동생이었는데.

고기웅은 그 이유를 10년 만에 밝혔다.

“10년 전에 아버지가 말하시더라. 성한그룹은 기준이가 물려받을 거라고. 그러기 위해서 할아버지한테 신장을 내놓았다고. 아는 거 없어? 형! 진짜 아는 거 없냐고!”

“그만하자. 너랑 말이 안 통해.”

“이것 봐! 형,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죽일 사람이 형이야. 난 형을 뛰어넘기 위해 인간이길 포기했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성한그룹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고. 근데 형은 신장 하나로 퉁 치잖아. 지금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잖아.”

고기웅의 선 넘은 발언에 고기준이 소리를 질렀다.

“고기웅!”

“그래. 이제 성격 나오네. 형하고 난 물과 기름이야. 섞일래야 섞일 수가 없지.”

동생의 발언에 고기준도 자신의 진심을 토해냈다.

“너 다 가져. 성한 그룹 가지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난 하나도 관심 없고 그저 제주도에서 편하게 여유 즐기며 살고 싶다. 여기 머무르는 동안 서로 말 섞지 말자.”

“그래. 형 이렇게 또 선 긋는다? 나랑 말 섞기 싫다는 거지?”

“야! 넌 마약이나 끊어. 공항에서 바지 벗고 난리치니까 할아버지도 널 용서 못하시는 거지. 널 왜 여기 보냈겠냐?”

“씨발, 그 이야기 하지 말랬지? 마약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고! 귀신 씌였다니까.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어.”

“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 말 섞지 마. 서로 감정만 더 상한다.”

답답했던 고기준이 휠체어를 밀며 별장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찬바람이 무섭게 부는 12월의 겨울.

대한민국 최남단 제주도조차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추운 날씨였다.

고기준은 자기 동생의 타락한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누구보다 우애가 좋은 형제였는데.

그까짓 돈이 뭐라고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걸까?

‘병신 같은 놈, 귀신은 또 무슨 귀신이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진짜.’

* * *

다음 날이 되었다.

강백현이 떠날 채비를 마치고 구두를 신자, 그의 엄마가 물었다.

“아들, 어디 가?”

“아, 엄마 나 오늘 서울 가요.”

“서울은 왜?”

“연수원 동기들이랑 보기로 했거든요. 걱정 마세요.”

“술 적당히 마셔! 그리고 슬슬 연애도 해야지?”

“네?”

“나이 32이야. 미진이랑 헤어졌으면 다른 사람도 만나 봐야지.”

“아- 하하, 조만간에 인사드릴게요. 썸 타는 사람 있어요.”

“어? 누군데? 누구? 누구?!”

강백현은 엄마의 집요한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린다니까요.”

부주시에서 서울까지 1시간 40분.

130km 떨어진 거리지만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그리 멀진 않다.

서울에 도착해서 7호선을 타고 가산 디지털 역까지 한번에 도착한 백현이 4번 출구 앞에서 동기들을 기다렸다.

“현수야! 오랜만이다.”

“네. 백현이 형, 오랜만입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오현수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옷을 꽤나 화려하게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오현수가 강백현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형! 옷빨 죽이는데요? 왜 이렇게 차려입고 오셨어요?”

“어? 아, 그냥 입은 건데?”

“아, 진짜 키 크니까 뭘 입어도 잘 어울리네요. 반칙이네. 반칙.”

“뭐가 반칙이야. 다 보세구만. 싸구려 아이템 조합만 잘한 거지. 비싼 옷도 아니다.”

“아무튼요. 형, 저 지혜랑 요즘 소원하거든요? 형이 오늘 지원 좀 팍팍 해주세요.”

“지혜? 너희 둘이 사귀었던 사이 아니었냐?”

“네. 그런데 그 후 진행이 별로 없네요. 솔직히 지혜가 연락도 잘 안 받아요. 형은 그 분이랑 연락 자주 하세요?”

“어. 어제도 했었는데? 성현 씨는 매번 똑같지. 근데 나도 마음은 있는데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으니까 쉽지는 않네.”

“아, 연애는 왜 이렇게 힘든 걸까요?”

오현수의 말에 강백현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네가 좀 더 로맨틱하게 해봐. 대쉬도 적극적으로 하고, 마음도 털어놓고, 좋은 곳도 데려가 보고.”

“아, 아무튼 오늘 노력해볼 테니까, 형 지혜 옆 자리만 앉지 마요.”

“그래. 알았어. 밀어줄게.”

강백현의 말에 오현수가 안심했다.

오현수에 이어 도착한 사람은 조성환이었다.

“형님들! 멀리서 오셨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 야. 넌 자기가 약속장소 잡았는데 제일 일찍 나왔어야지.”

“아~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형! 여기 4번 출구 앞에 맛있는 포차집 있어요. 거기로 가요. 불닭발 좋아하시죠?”

“소주랑 마시면 금상첨화지.”

“네. 바로 가시죠.”

가산디지털단지역 4번 출구 앞에는 유명한 닭발집이 있었다. 다른 안주도 많이 팔지만 불닭발이 유난히 맛있어서 대부분의 손님들이 불닭발을 찾는다.

“몇 명이세요?”

“여기 3명이요. 불닭발 하나랑 계란말이 하나 그리고 장순막걸리 하나 주세요.”

“네. 여기 불닭 하나, 계말 하나, 장막 하나.”

원형 테이블에 앉기 전에 일행들은 의자 뚜껑을 열고 각자의 짐을 의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본 안주로 나오는 옥수수콘 치즈에 막걸리를 곁들이며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아, 백현이 형, 충남도청 감사실 가서 대박 치셨다면서요?”

“어? 그건 또 누가 그래?”

“아유~ 모를 리가 있나요. 부주시장 목 날아가게 생겼다던데, 아무튼 형님은 진짜 핫해요. 핫해.”

오현수가 강백현의 근황을 먼저 이야기했다.

“말했잖아. 나 원래 감사실 간다고. 그 정도는 해야지.”

“오우야. 무서워. 아 맞다. 형이 저한테 프랑스 가서 협박한 거 기억나요?”

“내가 무슨 협박을 해?”

“형이 공무원 돼서도 유흥하고 다니면 가만 안둔다고 하셨잖아요.”

“아~ 너 인마! 그때 밤 샜잖아. 왜 늦었냐? 어디 갔었냐?”

강백현이 방긋 웃으며 오현수를 취조했다. 그리고 오현수가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김지혜가 나타나며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아아! 백현 오빠, 오랜만이야.”

“어. 앉아. 앉아.”

“성환이 너 이제 군대 가냐?”

“넵 누님. 앉으세요. 막걸리 따라드릴게요.”

“응.”

김지혜는 막걸리를 받으며 앞에 앉은 오현수의 발을 자신의 발로 차버렸다.

그러자 오현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아아아아! 아파!”

“어? 왜? 왜?”

강백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현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김지혜가 오현수의 말을 끊고 강백현에게 말했다.

“살 찝혔나봐요. 그나저나 오빠는 그 여자분 하고 어떻게 되고 있어요?”

“아, 누구?”

“프랑스에서 만났던 재벌 3세 김성현이요.”

“아, 잘 돼가고 있어.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잘 될 생각도 있고.”

“그래요?”

“어. 왜?”

“아니, 아니에요. 오빠 한 잔 해요.”

“응. 4명 다 모였는데 짠 하자.”

“넵!”

강백현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4명의 모임에 막걸리 잔을 들어올렸다.

친할 수밖에 없는 사이. 그런데 오현수가 백현의 옆구리를 찌른다.

‘아아아, 알았어.’

막걸리 한 잔을 넘긴 후, 잔을 채우는데, 조성환의 전화가 울렸다.

“아-.”

“왜?”

“형님, 죄송해요.”

“뭔데? 가 봐야 돼? 친구랑 이중약속 잡았어?”

“그건 아닌데요. 저희 동기 중 한 분이 여기 꼭 굳이 오신다고 하셔서, 아니라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런데?”

“오셨대요. 아는 선배여서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어물정저물정 하면서 넘겼는데, 지금 바로 여기로 오신대요.”

“상관없어. 같은 동기면 뭐, 문제없지.”

“그래. 성환아, 걱정하지 마.”

“형님, 누님, 감사합니다. 아- 미안하게 됐네요.”

“누군데? 동기면 우리가 아는 사람이지?”

강백현은 문제없다고 말한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강백현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뻘쭘해진 3명.

“성환아, 나 앉아도 돼?”

“네. 현희 누님, 여기 바로 앉으세요.”

불청객, 최장철 국회의원의 딸 최현희의 등장이 못마땅한 강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성환아, 나 먼저 갈게.”

“네?”

“말 섞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서, 실례인 걸 무릅쓰고 자리 뜬다. 재밌게 놀아.”

최현희는 자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강백현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강백현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성환아, 나도 백현 오빠랑 같이 나가볼게.”

성환이의 입대 전 마지막 자리라서 나온 게 아니라 강백현을 보러 나온 김지혜 또한 그를 따라나서고 지혜가 일어나자, 오현수 또한 자연스럽게 자리를 떴다.

“성환아, 형도 지혜랑 같이 가볼게. 현희 씨랑 같이 대화하고 끝나면 합류하자.”

“아… 네.”

최현희는 이 상황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은 맞지만, 이렇게 찬밥 대접을 받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한다.

“누님, 저도 누님하고 둘이 같이는 못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일어날게요. 맛있게 드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