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89화
예상치 못한 윗사람의 등장에 강백현은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지사님, 공직기강 감사팀장 강백현입니다.”
“아-아, 앉아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요. 이번에 새로 왔다고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말에 강백현이 부지사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부지사가 자신을 안다지만 강백현은 그를 도청 1층의 액자 사진으로 접했을 뿐이다.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놀란 표정 보게. 자네 유명 인사야. 나보다 더 유명인사라고.”
“네?”
그럴 리가 없었다.
유명인사라니. 고작 감사활동 한 번 했을 뿐, 방송에서 다뤄지긴 했지만 짧은 보도가 나간 것뿐이고 그에 따른 파급력도 그리 크지 않았다.
때문에 유명인사라는 말은 강백현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오성국 부지사가 고태준 실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어봤나?”
“아, 아직 답변 못 받았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직접 물어보지.”
오성국 부지사는 강백현을 응시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강백현은 50대 중반 사내의 행동에 의례 하는 인사처럼 악수를 하고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강백현의 손을 잡고 흔들며 이상한 이야기를 해댄다.
“금손이야. 금손, 자네 같은 겁 없는 젊은 친구들이 있어야 세상이 바뀌는 법이지.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는 정치적 중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고태준 실장으로부터 쌍화차 같은 것이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고태준이가 그걸 써먹었구만. 그래. 정치적 중립이란 국가 공무원으로서 자치사무와 국가사무 양쪽을 집행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지. 그걸 다른 말로 하자면 국가 세력에 대한 반대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지.”
그리고 ‘반대적 성격’이라는 말. 그건 확대해석하면 테러, 국가 전복 등이 떠오를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
하지만 오성국 부지사가 그런 뜻으로 발언한 것은 아닐 거라고 강백현은 생각했다.
부지사는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사무관을 향해 보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 어렵게 이야기 하지 않겠네. 자네는 여당과 야당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어떤 것을 고르겠나?”
강백현은 여당과 야당이라는 말에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럼 지금 생각하게. 자네가 부주시장을 향해 한 행보는 명백한 여당 죽이기였네. 지방 선거 결과가 나오면 알겠지만, 자네는 여당의 낡고 부패하고 타락한 인재들의 약점을 정확히 노렸지.”
“약점이요?”
“그래. 특히나 충청도는 여당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하거든.”
강백현은 솔직히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모르는 눈치로군. 수도권을 제외하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적 없는 유일한 지역이 바로 충청도지. 즉, 여당과 야당 둘 다 다 아직 민심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충청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야.”
강백현은 부지사의 말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왜 이렇게 불러내서 자리를 마련한 걸까?
“하하, 너무 긴장할 것 없어. 대답만 해주면 돼. 여당과 야당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자네는 어디를 고르겠나?”
그들은 강백현이 야당을 고를 거라고 생각했다.
부주시장의 소속이 대통령과 같은 여당이고, 강백현이 시장을 공격했기에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의 복수심은 감사결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징계 대상자만 무려 52명.
그래서 여당의 국회의원들은 남들 모르게 충남도지사에게 항의한 바 있었다. 누가 부주시에서 감사를, 그것도 특별감사를 진행했냐고 난리를 친 것이다.
물론 대통령과 반대로 야당 소속인 충남도지사, 그리고 평생 공무원으로 지냈지만 남모르게 야당을 지지하는 부지사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실장은 자신에게 날아올 화살이 두려워 휴가 및 병가를 내고 백현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무조건 강백현이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이게 웬 걸?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국회의원들은 이 신임 사무관의 출신성분을 조사했다.
부주시 말단 공무원 출신.
공익제보를 했다 좌천된 사실과 그를 무리하게 징계하려다 실패했던 부주시장의 행보.
여당의 국회의원들은 이게 국민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사건 자체를 일축하고 언급 자체를 꺼리게 된 것이다.
선거기간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자칫 이 일이 커지면 여당에게 반대급부가 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당 소속 자치단체장 한 명의 실수가 선거의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기에 부주시의 감사에 대해 일체 언급을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헌데 그걸 알게 된 부지사가 집요하게 강백현을 물고 늘어졌다.
“자네는 너무 설쳤어. 그런데 천운이 따라서일까? 자네를 압박하고 괴롭혔던 지옥 같은 과거가 지금에 와서는 자네를 지켜주는 철옹성 같은 방패가 되고 있네. 여당 중 누구라도 자네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게야.”
강백현은 그제서야 부지사와 실장이 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야당 입장에서 자신은 꽤 필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걸 단번에 알아차린 야당의 누군가가 강백현을 영입하라고 말단인 이 둘을 보낸 것이다.
강백현 입장에서 고태준 실장과 오성국 부지사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직속라인이다. 더구나 둘 다 공무원 선배.
업무 결재 라인부터 이 둘을 거쳐야 하니 당연히 그들과는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의 정치적 성향이었다.
“부지사님과 실장님은 둘 다 야당 소속이신 겁니까?”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대답은 하지 않겠네. 그 답은 자네의 대답을 들은 이유로 미루지. 자네는 여당과 야당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디를 택할 건가?”
부지사는 집요했다. 고태준 실장도 여기에서는 강백현의 대답을 기다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행히 구세주가 등장했다. 김 마담이었다.
“어머! 우리 오 지사님도 오셨네. 오면 온다고 말을 했어야징!”
“아니, 김 마담! 변한 게 없네? 여전히 예뻐.”
“아이구! 변하면 되나? 장사하려면 잘 꾸며야지. 쌍화차지?”
“어. 가져다 줘.”
“응. 금방 갖다 줄게.”
김 마담이 들어온 사이 생각할 시간을 번 강백현이 고민 끝에 대답했다.
“둘 중 꼭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겁니까?”
“그래. 그게 안 되면 이야기는 성립이 안 되지. 이미 자네 마음은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부지사는 확신에 찬 얼굴로 강백현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강백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부지사님, 초면에 죄송하지만, 전 둘 다 선택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도 불행 중 다행.
부지사는 안심했다. 강백현은 여당이라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속한 여당 편만 아니라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지. 자네가 우리 뜻에 동조만 해준다면 우린 자네를 스타로 만들 걸세.”
“네? 부지사님, 저는 그럴 인물이 아닙니다. 학교도 지방대 나왔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자네 같이 형편없는 스펙이 지금 세상에는 오히려 스펙이 되는 걸세. 그리고 이미 5급을 수석합격하면서 자네의 현재 능력을 스스로 증명했지 않나?”
부지사는 강백현을 얻고 싶었다.
그를 키워 자신과 자신이 속한 야당이 다시 부흥하는 꿈을 꾸었다.
3년에서 5년, 아니 1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럴만한 자질을 벌써부터 가지고 있었다.
흙수저, 평범한 인생, 그러나 공익제보 후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5급 공채 수석입학 후 감사원 지원.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데, 결단력과 행동력까지 두루 갖췄다.
부지사는 강백현이 모든 것을 다 갖췄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속한 곳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충분히 키워줄 생각인데 이를 마다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강백현의 고집은 대단했다.
“부지사님, 전 여당과 야당, 둘 다 관심 없습니다. 애당초 정치에 관심도 없고, 그것을 통해 성공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공무원이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강백현 또한 이게 부지사와 실장의 뜻에 반하는 대답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단력 있게 대답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 때문이었다.
[괜찮겠냐? 너 지금이라도 한쪽 고르는 게 좋을 거야.]
‘선배는 끼어들지 마십시오. 제 인생입니다. 제 인생이요. 네?’
강백현은 최용규를 째려보는 것으로 자신의 심정을 전달했다. 그러자 최용규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어휴~ 고집불통! 그러다 적만 늘어 인마.]
하지만 강백현은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았다.
공무원이란 자고로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고위공무원들의 이런 행동을 보고 그 결심은 더 분명해졌다.
공무원들의 정치적 의무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은 멈춰야 했다.
부지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실망스럽군.”
강백현은 그의 짧은 대답에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부지사는 포기를 몰랐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인재가 흔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여당 입장에서는 굉장히 곤란한 인물, 즉 이 친구가 좀 더 거물이 될 때까지 지켜볼 생각이 있는 것이다.
“아니야. 허나 난 기다리겠네. 그리고 윗선에는 자네를 키워보겠다고 말해보겠네.”
“네?”
“집권여당과 달리 우리는 한 몸이지. 그들은 언뜻 보면 굉장히 큰 세력 같지만, 그 집단 내에서는 각기 다른 인물을 차기 대선 주자로 밀고 있네. 즉,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모이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이야. 그때까지 난 자네를 키워보겠네. 물론 자네는 거부해도 좋아. 다만 거부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옭아매보지.”
강백현은 부지사의 호언장담에 할 말을 잃었다.
옭아맨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고태준!”
“네. 부지사님.”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자네에겐 내가 따로 언질을 주겠네.”
“알겠습니다. 강 팀장, 가지.”
“네. 실장님.”
강백현이 고태준 실장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먼저들 일어나. 난 김 마담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네.”
강백현은 고태준 실장과 다방을 빠져나왔다.
고태준은 강백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강 팀장.”
“네. 실장님.”
“자네는 큰 기회를 놓칠 뻔 했어.”
“큰 기회요?”
“그래.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는 아주 큰 인생의 기회지.”
“그렇습니까? 전 큰 위험을 피한 것 같은데.”
“허허, 이 사람이! 아직 기회는 남았네. 부지사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신다는 건 윗선에서 자네를 인정하고 있다는 거니까.”
강백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은 정치에 관심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부정부패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못된 공직자 및 단체장들의 행동을 교정하고자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전 오늘 발언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장님과 부지사님의 정치적 성향이 어떤지도 관심 없습니다.”
“후후, 재밌어. 그리고? 또 할 말 있나?”
“옭아맨다고 옭아매지지도 않을 겁니다. 저는 제 할 일을 할 겁니다. 그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니까요.”
강백현의 대답을 들은 고태준이 씩 웃었다.
“그래. 자네는 자네 뜻대로 하게. 돌아가지.”
고태준은 젊은 사무관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소신 있게 발언하는 그를 키우는 게 자신의 일.
‘그래. 하지만 자네는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게 될 게야. 자네를 키워내는 게 나의 역할. 얼마든지 발버둥치고 도망쳐보게. 이미 자네는 우리의 손아귀 안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