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88화 (88/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88화

    김성현과의 아침 통화를 마친 강백현은 기분 좋은 얼굴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프랑스는 아직 늦은 밤이라는 말에 강백현은 자신은 지금부터 출근해야 한다며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지만, 김성현은 오히려 오늘은 불금 아니냐며, 아직 목요일인 프랑스보다 낫지 않냐고 응수했다.

    “성현 씨, 이만 끊을게요. 잘 자요.”

    “백현 씨, 스마트폰 너무 꺼두지 마요. 다른 사람이 걱정해요.”

    “아~ 성현 씨가 걱정한다고요?”

    “아니, 내가 걱정한다는 게 아니고 부모님이나 친구들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백현 씨 걱정을 왜 해요?”

    “아- 그렇군요. 제가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해도 괜찮다는 말씀이네요?”

    강백현의 느끼한 말투에 옆에 있던 최용규가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야야야!]

    그런데 김성현, 예상 외로 강심장.

    - 데이트해 봐요. 우리 서로 사생활 신경 쓰지 말기 할까요?

    “네?”

    - 백현 씨도 멋진 이성이랑 만나서 데이트 하고, 나도 프랑스에 멋진 이성 만나서 데이트 하고. 서로 사생활 존중해주기. 어때요?

    “아… 그건 반칙이지 않습니까?”

    - 왜요?

    “저야 아침 내내 바쁘고, 공직생활 하니까 누구 만날 시간이 없는데 성현 씨는 일 자체가 잘생긴 모델 만나는 일이잖아요. 성현 씨한테만 너무 유리한 조건인데요?”

    - 아~ 됐어요. 우리 서로 사생활 존중해주기. 그럼 난 잘게요. 출근 잘해요!

    “아… 성현 씨! 성현 씨!”

    전화가 끊어졌다.

    070으로 온 전화.

    스마트폰으로 국제전화를 쓰는 건 비싸니까 인터넷 전화를 사용한 모양이었다.

    ‘아, 실수했네. 괜히 떠 봤나?’

    생각해보니 자신도 데이트 꽤나 해보긴 했지만 김성현도 데이트 경험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바로 옆 유령이 이전의 데이트 상대.

    “선배, 성현 씨는 뭐 좋아합니까?”

    [뭐?]

    “음식이나 특별한 장소, 뭐 그런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있지. 있긴 한데, 내가 왜 너한테 그걸 알려줘야 되냐?]

    최용규의 불만스런 표정에 강백현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선배는 성현 씨가 근본도 모르는 남자 만나는 거 허락하실 겁니까? 차라리 저 같은 사람이 옆에 있어주는 게 선배 입장에서도 좋잖아요. 대화도 되고, 걱정도 덜 되고, 제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백현의 말에 최용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아니야. 성현이 신랑감으로 넌 아니라구.]

    “선배가 어떻게 생각하든 전 성현 씨랑 잘 해볼랍니다. 출근할게요.”

    강백현이 주섬주섬 옷을 입고 출근길에 나선다.

    * * *

    오늘의 사무실 분위기는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팀장님, 잘 쉬셨습니까?”

    “아, 네. 주무관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하하, 우리 마누라가 바가지를 박박 긁어서 거실에서 잤지요. 그래도 뭐~ 아침에 콩나물국은 끓여줘서 다행인 것 같습니다.”

    “콩나물국이 왜 다행인가요?”

    “원래 밤늦게 들어가면 아침이 아예 없거든요. 어제는 밤 11시 즈음 들어갔으니 콩나물국이라도 나온 거지요. 하하하, 팀장님도 나중에 결혼해보시면 아실 겁니다. 애정수치는 아침 밥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을요.”

    강백현이 차우현의 말에 방긋 웃었다.

    그때, 차우현 주무관이 스스로 작성한 문서 하나를 가져오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저 초안 작성한 건데 검토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검토요?”

    “네. 접수한 문건 말고 저희가 기안해야 할 문건들이 있습니다. 원래 팀장님께서 작성하시는 거긴 한데, 제가 일단 작년 문서 기준으로 작성해봤습니다.”

    차우현 주무관이 가져온 문건은 『2016년도 충청남도 공직기강 감사계획』이었다.

    충청남도에 위치한 각 시, 군 및 국가소속기관을 대상으로 내년의 감사계획을 수록한 문건.

    즉, 미리 어떤 방향으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감사를 하겠다고 통보해서 해당 기관이 스스로 점검 및 대비할 수 있도록 하달하는 문서인 것.

    “그러네요. 작년 기안자가 최용규 사무관님이셨네요.”

    “이제 고인이 되셨죠. 학교 선배라고 들었습니다만, 정의롭고 훌륭하신 분이셨고 고지식한 면도 없지 않아 있으셨죠.”

    “고지식하다면….”

    “그 분에 대한 것은 사석에서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문건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강백현은 2016년도 감사계획 문건을 확인해보았다.

    사실 이건 처음 보는 문건은 아니었다.

    9급 공무원일 때도, 8급 공무원일 때도, 1년에 한 번씩 부서별로 하달되는 문건이었기 때문이다.

    ‘볼 때마다 많은 도움이 됐었지.’

    감사결과를 보면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다.

    공무원이 자신의 직무 범위 안에서 민원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선 안 되는 게 있는데, 이건 경계가 애매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럴 때는 감사결과 문건을 확인해보면 꽤나 도움이 된다.

    2016년도 충청남도 감사계획.

    2015년도 감사계획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단순히 2016년도로 숫자만 수정한 건 아니었다.

    1주일 전, 상급기관인 감사원에서 내려온 『2016년 감사원 감사계획』이라는 문서를 바탕으로 세부를 수정, 자신에게 검토해달라고 내민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내용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강백현은 문서만 봐도 차우현 주무관이 얼마나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상급자에게 싹싹한 게 아니라, 문서를 분석할 줄 알고 거기에서 말하는 핵심을 파악, 이를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까지 있었다.

    ‘높이 올라가시겠구나.’

    말만 뻔지르르하고 업무는 대충대충인 김태웅과는 정 반대 스타일. 상대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문서를 조작하는 녀석과 같은 사무실에 있다는 게 불쌍할 정도다.

    강백현은 총 40장은 넘어 보이는 감사계획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잘 몰랐던 용어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현 실태는 이러했다.

    1. 제 9회 지방선거 기간 중 공직사회의 정치적 중립 위반.

    2. 최근 안전사고가 빈번하여 국민의 안전 불감증이 우려됨.

    3. 공직자 청렴지수 하락으로 인한 시민들의 부정적 태도.

    그에 따른 감사 중점은?

    1.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 행위 척결을 위한 적극적인 감찰 활동.

    2. 취약요인 파악하여 사전 감사를 통해 안전사고 예방 강화.

    3. 청렴지수 상향을 위한 적극 감사. 부정부패는 원스트라이크 아웃.

    강백현은 감사 중점 사항 중 3번 항이 마음에 들었다.

    부정부패는 원스트라이크 아웃.

    한 번 걸리면 공직에 발도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는 용어.

    “차우현 주무관님, 이것도 감사원에서 내려온 겁니까?”

    “아닙니다. 팀장님이 좋아하실 만한 문구인 것 같아서 넣어봤습니다. 그 용어는 뺄까요?”

    “아니요. 저한테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실장님이 결재를 해주실까 싶은 건데요. 실장님 위에 부지사님과 도지사님도 계시고요.”

    “그렇죠.”

    그날 오후, 고태준 실장은 출근하자마자 강백현이 기안한 『2016년도 충청남도 공직기강 감사계획』이란 문서를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용어가 공격적이군. 원 스트라이크 아웃?’

    분명 신임 사무관으로서 패기는 있었다. 결단력도 있고, 그에 따른 추진력도 있다.

    문제는…….

    “강 팀장, 잠깐 시간 되나?”

    “네. 실장님.”

    “잠깐 커피숍으로 좀 가지.”

    “네.”

    사무실 내에서 이야기를 꺼내기 부담스러웠던 고태준 실장이 강백현을 도청 앞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50대에게는 익숙한 다방.

    그러나 30대인 강백현은 처음 방문해보는 이 분위기가 굉장히 낯설었다.

    “태준 오빠! 오랜만이네.”

    “응. 김 마담! 쌍화차 두 잔.”

    “응. 금방 준비할게. 옆에는 누구?”

    “우리 감사실 신임사무관이야. 나중에 따로 소개해줄게. 차부터 가져와.”

    “아~이. 진짜 항상 까칠하다니까.”

    다방은 어두웠다.

    커튼으로 가려진 방 안.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분위기에 강백현은 사뭇 움츠려들었다.

    실장님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이렇게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자신을 데려온 걸까?

    그때 최용규가 옆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 또 저 지랄 하네.]

    ‘네?’

    최용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강백현은 고태준 실장이 안내하는 방에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강 팀장.”

    “네. 실장님.”

    “자네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강백현은 정치적 중립이란 말에 깜짝 놀랐다.

    처음 질문이 꽤나 파격적이었기에 문제였다.

    “저는 나라의 녹봉을 받는 공무원으로서 어느 정당에도 치우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게 정치적 중립이지. 그걸 지켜야 되는 게 나라를 위한 길이고.”

    고태준 실장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분이셨구나. 내가 오해했나? 왜 굳이 이런 곳까지 데려와서 그걸 물어본 거지?’

    그때 최용규가 자신만 알 수 있는 말을 내뱉었다.

    [하아- 저 레파토리, 진짜!]

    고태준 실장이 의도하는 바를 모르는 강백현은 진중한 표정으로 실장님의 다음 말을 경청하는 수밖에.

    그때 마담이 익살스러운 눈웃음을 치며 들어왔다.

    “쌍화차 2잔 가져왔어. 옆에 앉을까?”

    “아니, 됐어. 둘이 따로 할 이야기 있으니까, 오늘은 얼씬도 하지 마.”

    “응.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버튼 눌러. 알았지?”

    “그래. 김 마담, 나가 봐.”

    평소에도 여기 자주 오는지 고태준 실장은 다방 안주인과 꽤나 친근한 사이 같았다.

    그녀가 나간 후, 고태준 실장은 쌍화차를 음미하고는 백현에게도 차를 마시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강백현이 쌍화차를 마시자, 고태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쌍화차를 뭐라고 생각하나?”

    “쌍화차요?”

    “그래. 쌍화차. 자네가 방금 마신 차 이름이지.”

    강백현은 잠시 고민하다 도저히 정답이 떠오르지 않아, 자신의 생각대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쌍화차란 부족한 기운을 보충하는 음료란 뜻이네. 즉 건강에 좋다는 뜻이지.”

    “아-, 그런 의미가 있었네요. 모르는 걸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백현은 최대한 상급자의 비위를 맞추었다.

    단순히 쌍화차가 좋아서 꺼낸 이야기는 아닐 터. 그렇다면 그가 왜 여기로 자신을 데려왔는지 이유를 알아내야했다.

    최용규가 옆에서 이야기 해주면 좋을 텐데, 그는 팔짱을 끼고 더 이상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다.

    ‘뭡니까? 이 자리에 부른 이유가 뭡니까?’

    그때, 고태준 실장과 강백현이 있는 곳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 누가 또 오는 거야?’

    예상은 적중.

    강백현은 갑자기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하, 이 친구인가?”

    “네. 부지사님, 이 친구가 이번에 제 밑으로 들어온 강백현 사무관입니다. 강 팀장, 처음 뵙지? 오성국 부지사님이시네. 인사드리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