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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87화 (87/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87화

    감찰과 경찰, 그리고 공직기강감사실이 모여 부주시에 큰 선물을 선사했다.

    제 9회 전국지방선거를 한 달여 앞둔 상황, 부주신문에 부주시 공무원의 부패가 대서특필되었고 부주시의 SNS에는 시장과 관련된 업체가 수의계약을 독점, 사익을 취해왔다는 내용이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그럼에도 뉴스에는 단 2분짜리 보도영상으로 다뤄지고 넘어갔을 뿐이다. 이를 본 강백현은 불만족스러운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차우현 주무관이 강백현의 표정을 확인한 후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안 좋으십니까?”

    “네?”

    “팀장님 표정이 많이 어두워 보이셔서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팀장님, 나중에 소주 한 잔 하시죠. 저희 좀 더 친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팀장님 부하는 딱 3명밖에 없는데 뭘 그렇게 어려워하십니까?”

    차우현 주무관의 말에 강백현이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주무관님, 오늘 끝나고 술 한 잔 하실까요?”

    “좋죠. 그 말 언제 하시나 기다렸습니다.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지요.”

    차우현은 강백현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오늘 저녁 술자리를 예약하려 했다.

    하지만 연말이라 좋은 곳은 다 예약이 차 있어 곤란한 표정을 짓는 차우현. 그에게 강백현이 말했다.

    “그냥 국밥집 가시죠. 든든한 순대국밥이 전 좋습니다.”

    “그럴까요?”

    도청 뒤편, 시장골목에는 유명한 순대국밥집이 하나 있다.

    45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 가게, 여기 안주인은 30대부터 일하셨다는데 75세인 지금도 정정하게 장사를 하시니 단골이 많은 편이다.

    “할매! 저희 왔어요.”

    “그려. 국밥 2개에 소주는 뭘로 줄까?”

    “진이슬이요. 찐한 놈으로 주세요.”

    여기서 찐한 놈은 도수가 높은 술을 말했다.

    사석에서 둘이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강백현이 차우현 주무관에게 평소와는 다른 높임말을 썼다.

    “형님, 한잔 올리겠습니다.”

    “아니, 형님은 좀. 제 상사신데….”

    “첫날 말씀드렸잖아요. 사석에서는 형님으로 모시겠다고요.”

    강백현의 말에 차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했었구나.’

    그런 차우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강백현이 손을 들어 추가 주문을 했다.

    “아! 맥주 한 병 추가요. 소맥 말아먹을 거라서 잔도 2개 주세요.”

    강백현은 주인이 가져다주는 유리잔에 소주를 1/10정도 따른 뒤, 맥주를 반까지 부어 최적의 비율을 완성했다.

    한 입에 털어 넘기기 딱 좋은 비율.

    “건배하시죠. 형님.”

    “그래. 아이고~ 말 편하게 하려니까 쑥스럽네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차우현은 소맥 한 잔을 마신 후, 강백현에게 의견을 말했다.

    “그냥 존댓말 하는 게 저는 편한 것 같습니다. 존댓말로 할게요.”

    “아, 괜찮은데.”

    “아닙니다. 그나저나 팀장님, 오늘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결과가 마음에 안 드네요.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다뤄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간단히 다루고 넘어가서 조금 화가 납니다.”

    강백현이 왜 의기소침했는지 알게 된 차우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그렇게 생각 안하네요.”

    “……”

    “뉴스로 다뤄진 것 자체가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해요. 충청남도 부주시, 인구 7만의 조그마한 도시에요. 대한민국 5300만 인구의 1/700 밖에 안 되는 소도시죠. 그런 소도시의 뉴스를 국가 공영방송에서 다뤄줬어요. 이게 얼마나 큰 사건인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차우현은 소맥 한잔을 들어올렸다.

    작은 국밥집 테이블에서 두 사람의 건배가 조용히 올라갔다.

    소맥을 한숨에 들이킨 차우현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

    “복수심에 불탄 젊은 사무관이 오자마자 대형 사고를 터트렸습니다. 그는 부주시 8급 공무원 출신으로 내부고발자로 몰려 좌천된 후 복수의 칼을 갈고 5급 공채를 수석으로 합격했죠.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뉴스에 나올 법한 이야기인데, 그 수석으로 합격한 당사자가 인생 역전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국토부, 재경부, 환경부 등을 마다하고 한직인 감사원에 지원했어요. 그리고 칼을 휘둘렀죠.”

    차우현의 말에 강백현이 자신의 시선을 부하 직원에게 고정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왜 저런 말을 할까 의문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보기 좋게 휘두른 칼날은 정확히 상대방의 약점을 찔렀습니다.”

    “약점이라뇨.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요. 아마 손을 많이 써 두었을 거예요. 변호사를 선임하여 지루하게 시간을 끌 겁니다. 지루한 싸움이 되겠죠.”

    “지루한 싸움이라뇨. 오늘 부주시장 선거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입니다. 지표 확인해보시죠.”

    여론조사 결과가 부주일보에 떡 하니 올라와 있었다.

    2주 전에는 여론조사에서 45.3%의 지지율을 보였던 부주시장.

    지금은 27.3%까지 떨어진 상태.

    반면, 2위 김경선 후보는 31.3%로 기존 부주시장의 지지율을 단숨에 뛰어넘어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지역사회는 입소문이 빠릅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의 시장이 부패했다고 해보세요. 관심이 없겠어요? 지역 커뮤니티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만큼 팀장님이 하신 일은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부패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안 되지요. 그러니 너무 의기소침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잔 더 드실까요?”

    차우현이 다시 소맥을 따랐다.

    아까와는 달리 소주의 비율이 높아졌다.

    오늘 한껏 취해보겠다는 심산.

    “술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럼요. 마누라랑 술,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술이죠. 술은 제 인생의 동반자거든요.”

    “저는 아내가 없으니, 아내를 택하고 싶어도 택할 수가 없네요. 오늘은 저도 술을 동반자 삼아보겠습니다.”

    기분이 풀어진 강백현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과 만나니 허름한 국밥집 안주와 4000원짜리 소주와 맥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제가 한 말 잊지 마세요. 이제 곧 팀장님은 여론의 주목을 받으실 겁니다.”

    “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복수심에 불탄 8급 공무원이 5급 공무원이 되어 돌아온 이야기. 인생의 성공을 마다하고 남들 기피하는 감사원으로 와서 자신과 함께 했던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밝혀내고 복수하는 이야기.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열광할 겁니다.”

    “아… 설마요. 그렇게까지 저한테 관심을 가질까요?”

    “지금은 아니겠죠.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거라는 것에 제 인생을 걸겠습니다.”

    차우현은 방긋 웃으며 3번째 소맥 잔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주도를 알았다.

    술을 즐기며 마시는 법을 아는 것이다.

    그가 분위기를 유도하자 아직 새파랗게 어린 32살의 신임사무관 강백현도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참된 사람과 못된 사람이 주변에서 구분되기 시작하겠지요.”

    “참된 사람과 못된 사람?”

    “네. 국가의 기강과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과 국가보다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확실하게 구분이 될 겁니다. 아, 저는 물론 강백현 팀장님 입장에서는 참된 사람일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팀장님 편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저도 헌신적으로 밀어드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제 살 길을 찾은 후에 도와드리겠다는 말이지요. 너무 저를 믿진 마십시오.”

    “아… 말씀만이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강백현은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해준 차우현 주무관이 너무 고마웠다. 먼저 술자리를 제안하고 상황을 말해주는 사람도 얼마 없는데, 한발 더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니 이보다 더 고마운 사람도 없다.

    “하지만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참된 사람 뿐 아니라 못된 사람을 구분하시라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꺼낸 겁니다.”

    못된 사람과 참된 사람.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은 과연 뭘까?

    차우현 주무관의 생각이 궁금해진 강백현이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 소맥 잔을 들었다.

    “역시 주도를 아시는군요.”

    소맥을 한잔 먹고, 국밥 집에서 나온 술국 한 수저를 입에 넣는다.

    그러자 소맥의 쓴 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특유의 알딸한 느낌만 남는다.

    기분 좋아진 차우현 주무관은 자신이 정의하는 못된 사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강백현 팀장님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생길 겁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또는 상대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은밀한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그때는 아무도 믿지 마십쇼.”

    “……”

    “자신의 가치관과 본질을 믿고, 정치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신념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때 비로소 참된 사람과 못된 사람이 정확히 구분되실 겁니다.”

    차우현 주무관의 말이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는 강백현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위해서 저런 말을 해준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요. 저야말로 고맙죠. 저도 강백현 팀장님과 같은 이유로 공직기강감사실에 지원했거든요. 다만, 그렇게 움직여주는 상사가 없어서 문제였지만요.”

    차우현도 같은 생각이었다니.

    강백현은 그제서야 왜 차우현 주무관이 자신의 말에 묵묵히 따라주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셨군요. 아픈 과거가 있으셨겠네요.’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차우현 주무관이 알아서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같은 부서에서 일한지 2주 밖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까지 터놓고 물어볼 사이까지는 아니니까.

    “소맥 한 잔 더 할까요?”

    “한잔만 하실 겁니까? 전 먹고 꼴 때까지 계속 마실 겁니다.”

    그날 강백현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차우현 형님과 같이 소맥 10잔을 스트레이트로 마셨고, 결국 집 대신 근처 모텔 방에서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아침, 강백현은 꺼놓은 스마트폰을 켰다.

    - 부재중 전화 (107)

    윤미진 (58회)

    김태웅 (33회)

    모르는 번호 (14회)

    불과 하루 만에 착신된 전화 목록이다.

    ‘윤미진, 58통이나 전화했냐? 분명히 감사결과 철회해달라는 거겠지?’

    강백현은 고개를 저으며 윤미진의 부재중 전화 확인을 누르고 기록을 삭제했다.

    김태웅도 마찬가지다. 전부 기록삭제를 눌렀다.

    그런데 모르는 번호 14통 중에 070으로 시작하는 전화가 두 통 있었다. 그것도 불과 30분 전에 걸려온 전화.

    강백현이 가장 최근에 걸려온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네. 강백현입니다. 전화하신 분이신가요?”

    - 백현 씨, 전화는 왜 꺼뒀어요?

    그녀가 말한 11글자에서 누구인지 감이 왔다.

    “아, 성현 씨, 별 일 없죠?”

    - 나 다음 달에 한국 가요. 프랑스는 휴일이 기네요. 1월 1일 공휴일 맞죠?

    “아, 넵. 프랑스는 아닌가요?”

    - 아~ 진짜, 이럴 땐 눈치가 없다니깐.

    그때, 한동안 프랑스에 가 있던 최용규가 나타나서 말했다.

    [약속 있다고 해.]

    - 아, 그날 시간 비워둘게요. 데이트 코스도 잡아놔야겠네요. 어딜 가야 우리 성현 씨가 마음에 든다고 할까? 이거 참 고민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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