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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81화 (81/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81화

    강백현은 윤미진이란 이름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수백 번을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추억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김성현 실장 밑에서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녀와 함께 했던 끔찍한 쇼핑 시간이 떠올랐고.

    고기웅 본부장이 김성현에게 비싼 선물을 줄 때도 윤미진의 반응이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윤미진은 남자에게도 최악, 여자에게도 최악이었다.

    물질 만능주의, 성공 우선주의에 사로잡혔던 윤미진.

    기억 속에서 지워보려고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 녀석을 보면 자꾸만 그녀가 떠오른다.

    “잠깐! 그 놈 왔다. 끊어봐.”

    김태웅이 전화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을 들은 강백현이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김태웅 주무관, 누구랑 통화하나요?”

    사무적인 말투가 비꼬는 말투로 들린 김태웅은 그만 사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내가 누구랑 통화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물론 더 이상 흠 잡힐 생각은 없었기에 말 자체는 존댓말이었다.

    김태웅의 공격적인 대응에 강백현도 곱게 응할 리는 없었다.

    “업무도 미루고 급하게 전화하는 상대가 혹시 내가 아는 윤미진 주무관이 아닌가 싶어서요. 윤미진 주무관이었습니까?”

    “……”

    김태웅은 강백현의 질문을 무시했다.

    대답조차 하기 싫은 상대.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미진이가 백현과 다시 사귀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

    불과 5분 전, 김태웅은 윤미진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미진아, 잘 있냐?”

    - 미친 거 아니야?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지?

    “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렇게 나올 거야?”

    - 헛소리 작작하고 끊어. 네가 갑자기 결혼한다고 난리 피워서 내가 곤란했던 것은 생각 안 해? 6주 만에 청첩장 만들고 주변에 소문 다 내고 다녔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끼친다.

    “너도 그땐 동의했잖아.”

    - 내가 언제 동의해?

    “알면서도 아무 말 없었던 건 동의 아니야?”

    - 그거야 오빠가 부자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거지. 집도 다 대출 끼고 산거고, 외제차도 렌트였으면서 도대체 내가 뭘 믿고 오빠랑 결혼하는데? 거지새끼가.

    “와~ 윤미진, 진짜 너 독하다.”

    - 그것뿐이야? 오빠 징계도 받아서 정직 당했잖아. 쪽팔려서 어떻게 만나. 나까지 싸잡아서 욕먹을 텐데. 안 그래?

    윤미진의 말에 배신감을 느낀 김태웅이 본론을 던졌다.

    “너 나랑 헤어지고 강백현이랑 다시 사귀냐?”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면 됐고.”

    - 잠깐! 뭐 들었는데? 토시 하나 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이번에 그 새끼 5급 사무관 되어서 돌아왔더라. 그것도 5급 공채 수석으로 붙어서. 근데 강백현이~ 잠깐! 그 놈 왔다. 끊어봐.”

    * * *

    이게 방금 윤미진과의 통화에서 있었던 일.

    김태웅은 미진의 대답에 속으로 안심하며, 백현의 앞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데 때마침 강백현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 백현 오빠, 내 번호 지웠어?

    김태웅은 익숙한 목소리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통화했던 윤미진이 강백현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둘의 사이가 자신의 예상보다 더 최악이었던 것.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그럼 끊겠습니다.”

    - 오빠, 나야. 미진이. 오빠 전 여친.

    윤미진의 목소리를 들은 김태웅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백현이 전화음 크기를 줄이며 그녀의 목소리를 자신이 들을 수 없게 했다.

    “어. 웬일이야?”

    - **********. ********.

    “그런데?”

    - ******.******. ********.

    “그래서?”

    - *****. *******. *******.

    “나 지금 부주시야. 오후 6시 30분?”

    - ****. *******.*****.

    “알았다. 그때 보자.”

    김태웅은 강백현의 말만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유추해보았다.

    부주시, 오후 6시 30분.

    그건 오늘 퇴근하고 둘이 만나겠다는 이야기.

    아니나 다를까.

    차우현 주무관이 돌아오자, 강백현이 미소를 지으며 경과를 물었다.

    “주무관님, 어떻게 되셨습니까?”

    “일단은 팀장님 말씀대로 위반사항이 확실하더군요. 그것 말고도 오수처리 공법업체 선정 과정에서 문제된 것도 있었습니다. 진술서랑 관련자료 제출 요구했으니 곧 결과가 나오겠지요.”

    “그렇군요. 주무관님은 회계 파트니, 오늘 시에 이야기를 해서 사무실 한 곳에 자리 잡으시고, 각 부서별 회계 자료를 가져오라는 방향으로 진행해주세요.”

    “아, 그럴까요? 그나저나 팀장님, 마음 쓰리시겠네요. 과거 부주시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다들 안면 있는 분들일 텐데, 이렇게 매정하게 돌아서서 행동하시는 게 결코 쉽진 않을 것 같은데요.”

    차우현의 말에 강백현이 씩 웃었다.

    “여기 저 말고도 아는 사람들 뒷통수를 후려까는 사람이 하나 더 있죠.”

    “네?”

    차우현이 강백현의 말에 깜짝 놀라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질렀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자신은 그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둘이 있을 땐 선배, 아우를 하자는 상급자가 자신을 저격할 거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시선은 다른 한 명에게 돌아간다.

    김태웅이 분노의 감정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다.

    ‘아, 쟤는 그럴 만하지.’

    상황을 이해한 차우현이 방긋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래도 팀장님은 공정한 공직기강 확립을 위해 이러시는 거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랬던 것 아닙니까? 그런 놈이 아직도 공무원을 버젓이 하고 있으니 문제겠지만요.”

    “그렇죠. 옛날이면 최소 유배였죠. 지방 한직으로 쫓겨나 흰 소복만 입고 갇혀 지내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공무원들에 대해서 상은 너무 과분하게 주고 벌은 너무 관대해서 문제예요.”

    “하하, 좀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죠.”

    “만약에 제가 조선시대 임금이었다면, 부패한 관리들을 적발하면 유배가 아니라 사형을 시킬 겁니다. 나라의 녹봉을 받는다는 사람들이 나라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받아들이겠죠. 김태웅 주무관, 안 그런가요?”

    강백현의 화살이 김태웅을 향하자, 차우현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와! 진짜 세다. 왜 이렇게 재밌냐?’

    물론 그건 최용규도 마찬가지였다.

    [ㅋㅋㅋㅋㅋ. 미친 새끼. 빨리 미진이나 혼내러 가. 기대된다.]

    최용규의 말을 들은 강백현이 차우현 주무관에게 말했다.

    “원래 오늘 일 끝나고 지역 동사무소 돌면서 근무기강도 보고 회계자료도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오늘 오후는 문화재과 먼저 방문하고, 내일은 저랑 김태웅 주무관이 같이 지역 동사무소 위주로 돌겠습니다. 차 주무관님은 내일부터 부서별 회계자료 모아서 분석 좀 해주세요.”

    “아, 넵. 알겠습니다.”

    그래서 일정이 살짝 바뀌었다.

    원래 미진이의 뚝배기를 깨러 가려 했던 강백현은 내일 일정과 바꿔 문화재과로 향했다.

    문화재과의 비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백제문화제 준비를 맡고 있는 곳은 일회성 비용으로 행사 준비로만 30억을 지출하는 곳이었다.

    물론 30억 모두가 비리에 연루된 금액은 아니다.

    그러나 백현이 확실히 아는 비리가 있다.

    바로 강백현이 지난 날 최용규에게 제보했던 그 분야였다.

    문화재 과장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나타났다.

    “백현아, 이제 나랑 같은 사무관 됐네. 와서 앉아. 차 한 잔 하자.”

    “아, 오랜만입니다.”

    긴장으로 굳은 문화재 과장. 강백현은 그에게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백현은 공무원들이 사용하는 온-나라 시스템에 접속했다.

    접속한 후 기록물 관리함에서 해당 문건을 찾아냈다.

    “호-오. 팀장님 이건?”

    “제가 11개월 전 제보했던 자료들입니다. 제 전임자이신 최용규 팀장님께 제보했던 그 문건들이죠. 다행히 아직도 출력 가능한 상태네요. 1년만 더 지나면 열람 불가가 되었겠지만, 참 다행이죠.”

    5년이면 파기될 예정인 문서들.

    그건 문서보존기간이 5년이어서 그렇다.

    지금 백현이 열람한 『백제문화제 조형물 입찰계약서』, 『백제문화제 축제 간 조경업체 선정 결과』자료가 바로 그것.

    강백현이 쓴 웃음을 짓는다.

    ‘진한 선배, 드디어 선배님이 저한테 목숨 걸고 맡긴 자료를 쓸 수 있겠네요.’

    기숙사 선, 후배 관계였던 주진한 선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자살을 한 걸까? 아니면 자살을 당한 걸까?

    그리고 옆에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죽음의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최용규 선배의 귀신도 있다.

    ‘최용규 선배와 주진한 선배의 죽음이 부주시와 연결되어 있다면, 다음 목표는 분명 나겠지?’

    강백현은 이게 위험한 자료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고 누구까지 손이 닿아 있을까?

    그게 누구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기득권 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것.

    절대 주진한 선배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이제는 밝혀야 할 때였다.

    “4년 전, 주진한 주무관은 문화재과에서 백제문화제 기획/준비 담당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문서를 기안했었죠.”

    “아….”

    “그리고 당시 백제문화제 기획계장을 맡고 계셨던 분은 현재 시에서 문화재 과장을 맡고 계신 조한돌 사무관이시죠.”

    강백현의 말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문화재 과장 조한돌이 언성을 높였다.

    “강백현!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해. 여기 사람도 많은데 도대체 뭐하는 거야?”

    과장의 이런 초조한 반응을 강백현이 놓칠 리가 없었다.

    “조한돌 사무관이 지금 굉장히 흥분한 상태입니다. 물론 그렇겠죠. 제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야야야. 너 왜 그러냐? 어? 백현아. 너 내가 1년 동안 너 키워줬잖아. 너 문화재과 처음 왔을 때 생각 안 나? 너 우울증 걸린 거 내가 얼마나 케어했었는데, 내가 매일 너 술도 사주고, 밥도 사주면서 같이 지냈던 거 생각 안나?”

    강백현이 조한돌 사무관, 아니 전 조한돌 계장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그런 적이 있었네요. 하루 종일 업체 만나러 다닌다고 자리 쏙 비워두고 자신의 일을 2년차 말단인 저한테 떠넘겼던 상사의 모습이 뚜렷하게 기억납니다. 아아아, 물론 그 술값하고 밥값도 수의계약으로 계약했던 업체 직원을 불러 계산시키던 그 상사의 모습이요.”

    강백현의 말에 조한돌 과장이 낯빛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친구였던 김태웅은 깜짝 놀라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독기를 머금은 강백현을 보니, 이제까지 자신에게 한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무서워. 저 자식,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지?’

    하지만 강백현은 두려움을 몰랐다.

    지금 이 건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다고 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강백현이 살벌한 표정을 짓고는 문서 기록을 차우현 주무관에게 넘겼다.

    “채증하고, 기록해두세요.”

    “네. 팀장님.”

    “김태웅 주무관은 차우현 주무관 도와서 관련 업체의 연락처와 주소, 현재 영업중인지 폐업중인지 기록해서 오늘 저녁까지 저한테 넘겨주세요.”

    강백현의 무거운 목소리에 김태웅이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강백현은 자신이 일했던, 또 자신의 전임자였던 주진한 선배가 앉았던 그 책상 자리를 바라보았다.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진한 선배의 기억이 백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진한 선배, 늦었죠? 선배의 억울한 심정, 이걸로 풀어지실지 모르겠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선배가 마지막까지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이제 밝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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