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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75화 (75/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75화

    강백현은 김성현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큼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보안절차를 거치는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오현수는 비행기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백현에게 딱 붙어서 물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 같은데, 완전 예쁘시던데요?”

    “응. 메리야트 그룹 장녀 김성현 실장님.”

    “어? 설마 블랑샤 만든 그 분 아니세요? 그 패션쇼로 올해 엄청 유명했잖아요.”

    오현수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패션쇼 무대에 직접 나와서 언론 1면을 장식했었지. 그때 생각하면 진짜 아찔하네.”

    “와, 대박이다. 형! 어떤 관계에요? 아까 키스까지 하는 거 보니까 장난 없던데?”

    “어? 봤냐?”

    “그럼요. 아주 잘 봤죠. 로맨스 영화 찍는 줄 알았어요. 프랑스 파리 드골 공항 A게이트 앞에서 이별을 앞두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남녀의 애틋한 모습. 그걸 놓칠 리가 없잖아요!”

    오현수의 장황한 말에 강백현이 피식 웃었다.

    “그만해! 나도 좀 의외였다. 성현 씨가 직접 공항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네.”

    “아무튼 잘 하셨어요. 아, 형!”

    “왜?”

    “저랑 자리 바꿔요.”

    “응?”

    “지혜 옆 자리시잖아요. 형이 창가 앉으세요. 제가 중앙 커플석에 앉을게요.”

    “난 괜찮은데? 지혜랑 앉아도 상관없어.”

    강백현은 오현수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오현수가 평소와는 달리 자신의 마음을 더욱 강력하게 어필했다.

    “아니에요. 지혜 옆 자리 앉았다가 형수님이 알아차리시면 큰일나잖아요. 미리 예방차원에서 형 혼자 앉으시는 게 좋죠. 다 형을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그래. 나야 뭐 상관없는데, 네가 좀 귀찮을지 모르겠다. 지혜 걔가 말이 워낙 많잖아.”

    “괜찮아요.”

    오현수는 강백현의 말에 조그마한 상처를 입었다.

    김지혜는 자신에게는 말을 잘 걸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강백현 옆에만 앉으면 혹시라도 백현이 지루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쉬지 않고 말을 걸어대는 것이다.

    그런 행동을 야속하게 생각하는 오현수.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이미 김지혜가 기대했던 사랑은 물거품이 되었고,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은 산소 호흡기를 단 채 진행 중이었으니까.

    예상하기라도 한 듯, 김지혜의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오현수의 귀를 때렸다.

    “누가 자리 바꾸래?”

    “널 위해서 바꿨어.”

    “이게 왜 날 위한 건데?”

    “알면서 왜 그래?”

    “미쳤냐? 아오! 진짜 내 인생에 너 만난 게 최대의 불운이다.”

    온갖 부정적인 말을 쏘아대는 김지혜.

    하지만 이제 그런 말조차도 사랑스럽게 들리는 오현수.

    둘은 그렇게 티격태격 하면서도 대화를 이어갔다.

    한편, 강백현의 옆에는 최용규가 들러붙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성현이 포기 안 할래?]

    “안 해요.”

    [너 죽고 나 죽는 거 보고 싶지?]

    “선배는 이미 죽었고, 전 죽으려면 멀었죠.”

    [글쎄다. 아무튼 성현이 얼른 포기해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아니야.]

    “무슨 말을 해도 이제 포기 못합니다. 포기 안 해요.”

    [아아아아, 진짜!]

    최용규는 결국 자신의 화를 못 이기고 비행기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먼 여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홧김에 지구 곳곳을 둘러보는 것이다.

    인간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빠른 귀신이지만, 사람들을 해코지 하려면 결국 영혼의 힘이 필요하다.

    결국 그냥 둘러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최용규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와 나란히 날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엄청난 배신감.

    [아! 열 받아. 강백현 저 새끼 진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성현이와 천국으로 같이 가려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든 후배가 원망스럽다.

    그때 때마침 이성복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르신! 어르신!]

    재빠르게 따라붙는 최용규.

    그리고 그를 귀찮은 듯 쳐다보는 저승사자 이성복.

    [이놈아, 무슨 일이야?]

    [아니, 제 여자 친구를 가로챈 놈이 있어서요.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싶어서요.]

    [에이! 이놈 봐라! 아직도 이승에 미련이 남은 거야?]

    [당연하죠. 어르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랑 성현이는 무조건 같이 천국 간다니까요.]

    최용규의 확신에 이성복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이놈아! 어차피 천국가도 새로 만날 수 있어. 갈아 타. 갈아타면 되잖아.]

    [그럼 성현이랑 영원히 함께 못하잖아요. 어? 그런데 새로 만날 수 있다고요?]

    [천국에는 좋은 배우자감이 넘쳐나지. 나 좋아하는 할멈도 다섯은 될 걸? 천국 올지 말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미련 갖지 말고 얼른 자네도 성불하는 게 어때?]

    이성복의 말에 최용규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아니요. 그럼 제 결심은 더 확고해지네요. 만약에 성현이가 백현이랑 잘 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죽고 나서 저한테 올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천국에 못 올 수도 있다니까?]

    [성현이는 무조건 옵니다. 그리고 결국엔 저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클클, 고집이 황소고집이네. 누가 자넬 설득할 수 있을꼬. 그럼 난 바삐 갈 데가 있어서.]

    이성복이 최용규에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러지. 아, 어디보자. 다음 차례는 누구였더라?]

    살생부를 펼치고는 다음에 죽을 운명인 사람을 확인하는 이성복. 그가 웃음을 짓는다.

    [왜 그러세요?]

    [아니, 오늘은 퇴근이 빠를 것 같아서. 한 건만 해결하면 되거든. 아~ 조만간에 만날 걸세.]

    [네. 영감님.]

    이윽고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최용규는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살생부 명단에 백현의 이름이 올라가 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아~ 성현 씨? 나 한국 잘 도착했어요. 지금 뭐해요?”

    뽀뽀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김성현에게 전화하는 강백현이 야속한데,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하다.

    살생부에 올라왔다는 것은 얼마 살지 못할 운명이라는 뜻.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태연히 연애에 집중하는 강백현이 딱할 뿐이다.

    - 모닝커피 마시고 있어요. 백현 씨는 아직 공항이에요?

    “네. 저는 지금 뭐하게요?”

    - 음, 버스 예약? 아니면 식사?

    “실장님 생각.”

    - 네?!

    “김성현 씨 생각한다고요.”

    - 아~뭐야? 아침, 새벽부터 느끼한 멘트 날릴 거예요? 이따 톡으로 해요. 저 출근해야 되니까. 조심히 들어가요.

    강백현은 끊어진 전화를 내려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해외정책연수가 끝났으니 이제 연수원에 돌아가면 짐을 싸야 한다.

    최종성적 발표 후 곧바로 수료식이 진행될 것이고, 각자 인사명령에 의해 5급 공무원으로서 첫 역사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인재개발원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강백현은 김지혜가 옆자리에 앉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내심 안도했다.

    아직 어린 친구라 그런지 칭얼거림도 심하고 질문도 많은 동생이었다.

    그런 지혜가 현수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행기로 오는 내내 서로 말다툼을 해서 신경이 이만저만 쓰였던 게 아니다.

    비즈니스 석에 탔는데도 불구하고 승무원이 주의를 줬으니, 단순한 다툼은 아니었을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룸메이트인 성환은 아직 국내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백현은 그날 밤 최용규도 조성환도 없이 방을 혼자 쓸 수 있었다.

    * * *

    다음 날, 해외 정책 연수에 참가했던 동기들 전원이 연수원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오늘은 연수원 직원들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우왕좌왕하고, 서류를 들고 사무실에 들락날락하고 있다.

    “성환아, 연수원에 무슨 일 있어?”

    “제가 듣기로는 인사혁신처 공직기강감사팀 떴대요.”

    “인사혁신처 공직기강감사팀?”

    “네. 정기감사는 아니고, 특별감사인가 봐요. 예정에 없던 거죠.”

    “누구한테 들었냐?”

    “학교 선배들이 알려주던데요. 오늘 인재개발원에 특별감사 뜬다고, 조심하라고요. 감사 결과는 딱 두 가지 밖에 없대요.”

    조성환의 말에 강백현이 귀를 기울였다.

    “두 가지가 뭐야?”

    “상과 벌. 잘한 사람한테는 표창, 못한 사람한테는 징계 또는 고발. 그래서 감사가 무서운 거죠. 형님도 공무원이셨으니까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강백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으면 좋았지. 회계감사, 보안감사. 그게 지방에서 잘 돌아가겠냐? 자기 동네 선배 아들, 학교 형, 친척 동생, 이런 사람이 감사하는데 그게 정상적으로 돌아가겠냐고.’

    혈연, 지연, 인맥 등 빽으로 돌아가는 공직사회.

    그럼에도 특별감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건 공직기강감사실이 일 하나만큼은 잘하고 있다는 것.

    과연 무슨 제보를 받았기에 감사를 하고 있는 걸까?

    돈을 빼돌린 걸까? 아니면 뇌물을 받은 걸까? 그게 아니면 수의계약을 잘 못 체결했나? 누군가에게 특혜를 줬나?

    인재개발원은 딱히 돈을 빼돌리기 쉬운 것도 아니고, 빼돌린다 해도 큰 금액이 불가능해서 그럴 만한 메리트가 없어 보였다.

    경쟁이나 입찰에 의거하지 않은 수의계약에 얽힌 문제일 가능성이 제일 크긴 한데, 요즘은 수의계약의 기준이 2천만원에서 천만원으로 낮아져서, 천만원 이상의 금액은 조달청을 통해 계약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니 수의계약으로 비리가 저질러질 가능성도 그리 크진 않아보였다.

    ‘도대체 뭘까?’

    아무리 봐도 성적조작 정도 밖에는 예상되는 게 없었다.

    ‘선배, 어디 있는 겁니까? 왜 찾을 땐 없는 건가요?’

    강백현은 성주단지에서 선배의 손톱을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1분도 되지 않아 최용규 선배가 강백현의 주변에 나타났다.

    [크크크, 인마! 야야야! 간지러워 죽겠어 인마. 그만 만져.]

    강백현은 이어폰을 귀에 꼽고 전화하는 척 하며 선배에게 물었다.

    “지금 인재개발원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줘요.”

    [무슨 일?]

    “인사혁신처 공직기강감사팀 떴대요.”

    [알았어. 금방 알아보고 올게.]

    최용규가 사라지자 이어폰을 빼는 강백현.

    조성환은 그가 누군가와 통화한 것으로 여기고 물었다.

    “누구에요?”

    “아는 사람 있어.”

    “아, 형님도 빽은 있으시구나. 하긴, 공무원 생활 오래하셨으니까 알아볼 인맥은 있으시겠네요.”

    강백현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최용규가 돌아왔다.

    [해외정책연수 관련해서 조사 들어간 것 같아.]

    “네?”

    [마일리지 무단 적립 관련 제보가 있었고 그에 따라 전반적인 사항을 A부터 Z까지 다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아.]

    “그래요?”

    강백현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해외정책연수 인원 중 3명에게 인재개발원장 이름의 표창이 수여되었다.

    나머지 14명에게는 항공마일리지 몰수 및 과징금 3배, 그리고 경고장이 날아갔다.

    그렇게 해당 상벌이 반영된 최종성적이 발표 되었다.

    1등 961.4점 강백현 교육생

    2등 954.3점 김지혜 교육생

    3등 947.2점 조성환 교육생

    15등 911.9점 오현수 교육생

    146등 849.3점 최현희 교육생

    해당 점수를 확인한 강백현은 미소를 지었다.

    ‘공직기강감사팀 누가 부른 거지? 오히려 더 잘 됐네. 압도적인 1등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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