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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러 왔습니다-73화 (73/139)
  • 뚝배기 깨러 왔습니다 73화

    김지혜의 실망과 별개로 강백현이 앉은 테이블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거의 3개월 만에 만난 것이다.

    “백현 씨, 제가 디자인한 구두, 이제 샬롯에서 진열되기 시작했어요.”

    윤진희의 말에 강백현이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와! 진희 씨, 드디어 성공했네요.”

    “아~ 그럼요. 이제 저도 샬롯의 구두 디자이너랍니다.”

    백현은 평소에 숫기가 없던 윤진희의 밝은 모습이 낯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연주의 자랑이 이어졌다.

    “뭐~ 진희 씨가 스타트를 끊었으니까 저도 자랑 좀 할게요. 제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메인스트리트에서 보이는 백화점 1층 매장의 마네킹이 입었답니다. 이게 얼마나 큰 건지 백현 씨는 알런지 모르겠네요.”

    고연주의 자랑에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알죠. 제가 대현백화점 판교점 편집샵 얻으려고 엄청 고생했던 것 아시잖아요. 그런데 프랑스 파리 백화점 1층, 메인 스트리트 거리의 마네킹이라뇨! 그것도 샬롯! 엄청 대단하죠.”

    백현의 장황한 칭찬에 고연주와 진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기야~ 나도 하나 하긴 했는데.”

    “아, 속옷이요? 여성용 속옷이죠?”

    “어? 어. 어떻게 알았어?”

    “뭐, 알죠. 왜 몰라요. 그래서 마르코 씨는 근황이 어때요?”

    “아니! 자기야! 말 좀 들어봐. 프랑스 애들이 한국하고 좀 달라. 란제리 쪽을 많이 입는데, 사이즈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 조금 다르더라구. 그래서 내가 디자인한 속옷이 아직 안 걸리긴 했는데.”

    “알았어요! 그런 거 설명 안 해주셔도 돼요.”

    “후후, 알았어. 자기한테 꼭 자랑하고 싶었는데.”

    마르코가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메인은 따로 있었다.

    김성현이었다.

    “실장님, 요즘 어떠세요? 만족하고 살고 계신가요?”

    “그럼요. 하루하루 행복하죠. 그나저나 혹시 고기웅 본부장 소식은 전해들었나요?”

    김성현의 걱정은 고기웅, 그리고 자신의 동생 김동성, 그로 인해 지금의 행복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불구속 기소 됐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내용이 언론에서는 밝혀진 게 없네요.”

    “그렇군요. 아~ 미안해요.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봐. 다들 드시죠!”

    김성현은 슬픈 표정을 지우고 애써 웃음 지으며 동료들에게 술을 권했다.

    김성현을 옆에서 지켜보는 최용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벌 새끼들 진짜, 빠져 나가는 데는 선수라니까. 성현이도 알고 있는 거지. 이걸로도 쉽지 않다는 거.]

    강백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게 좀 강하게 좀 나가시지. 어휴~ 바지 벗는 걸로는 임시조치 밖에 안 되잖아요.’

    빙의가 얼마나 위험부담이 큰 행위인지, 사실 백현도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영체가 힘을 잃고 투명하게 된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이를 회복하려면 당분간 천계에 다녀와야 한다는 것도.

    즉, 영체로서의 삶을 일정부분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백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일단 지금의 행복에 만족하기로 했다.

    맛있는 음식과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

    그리고 누구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성현 씨가 앞에 있으니까.

    이윽고 백현의 근황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백현 씨는 프랑스에 웬일이에요?”

    “어. 잠깐만, 일행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랑 온 거 아니야? 백현 씨 빨리 말해요. 지금 빨리 해명해야 해.”

    고연주와 윤진희가 쌍으로 백현을 압박했다.

    “자기야. 실수하지 말고 말해.”

    마르코도 한몫 한다.

    강백현은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사실 전 5급 공무원에 합격한 상태고요. 성적이 괜찮아서 해외정책연수 오게 되었어요. 오늘이 그 첫째 날이고. 우연히 또 실장님 회식장소와 제 숙소가 겹쳐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거예요.”

    “우연 아닌 거 아니에요? 아니, 이 넓은 프랑스 파리에서 어떻게 이렇게 만나?”

    “연주 씨! 우연이에요.”

    “아니, 실장님 보러 온 거 아니에요? 맞죠? 맞죠?”

    강백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만나면 멋있게 고백해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니 모양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연주 뿐만 아니라 김성현까지 백현을 압박했다.

    “뭐 켕기는 게 있나봐. 진짜 여자 친구랑 온 거 아니야?”

    김성현의 말에 강백현은 낯짝에 두꺼운 걸 깔기로 했다.

    “아니에욧! 실장님 보러 왔죠. 모두가 다 계획이었어요. 실장님 보고 싶어서 5급 공무원 지원해서 합격했고요. 실장님 만나고 싶어서 프랑스로 해외정책연수 신청했고, 실장님 여기 오실 줄 알고 미리 호텔도 여기로 잡자고 말해뒀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획이었네요. 어때요? 제 계획! 실장님 저한테 썸 좀 타시나요?”

    백현의 말에 갑자기 빵 터지는 일행들.

    “백현 씨,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아니, 정말 너무 웃겨. 원래 진지한 사람 아니었어요?”

    연주와 진희의 질문에 백현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항상 진지하면 어떻게 사나요? 가끔은 농담도 하고 살아야지. 아~ 물론 이 모든 게 계획이었다는 건 농담이 아닙니다. 실장님, 제 마음 받아주시나요?”

    김성현은 몸을 파르르 떨며 대꾸했다.

    “아~ 완전 싫어! 아~ 백현 씨 그렇게 하면 여자 못 만나요.”

    “만나겠죠. 운명의 상대, 있을 겁니다. 식사하시죠.”

    오랜만에 만난 팀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저녁식사를 마쳤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아쉽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프랑스에서 만난 한국인들.

    그래서 더 재밌었던 시간.

    하지만 디너타임은 곧 끝나고, 집에 돌아가야 될 시간이 도래했다.

    “백현 씨, 해외정책연수 잘 하고 가요. 한국 갈 때 한 번 연락주고요.”

    “네. 실장님. 오늘 즐거웠습니다. 들어가세요.”

    “아~ 아쉽다! 백현 씨, 우리랑 같이 프랑스 왔으면 좋았잖아요.”

    “5급 공무원이래잖아. 진희 얘는 진짜 왜 그래? 눈치가 없어.”

    아쉬움을 달래고 모두가 헤어질 시간. 와인을 마셔서 그런지 다들 기분이 알딸딸하고 좋은 상태다.

    백현은 현수와 지혜가 있던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샴페인 병과 빈 음식접시만 몇 개 덩그러니 놓인 자리.

    함께 하지 못해 미안했던 백현이 생각했다.

    ‘내일 만나면 사과해야겠네.’

    호텔 방으로 돌아간 백현은 잠겨있는 방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카드키 그냥 가지고 나올 걸.’

    그래서 룸메이트인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 녀석, 받질 않는다.

    안내데스크까지 가서 여권을 제시해서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야 추가 카드키를 받을 수 있었다.

    백현은 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짐을 풀고 씻기 시작했다.

    고단했던 하루였다.

    장거리 비행을 거친 후 대사관을 견학했다. 거기에 아는 사람들과 와인을 마시면서 한참을 웃으며 이야기했더니 뒤늦게 피로가 찾아든 것이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 현수는 어디 갔지?’

    호텔 침대에 누운 백현은 잠이 들었다.

    * * *

    같은 시각.

    오현수는 김지혜와 함께 근처 펍에 들렸다.

    프랑스 파리의 번화가에 있는 밤늦게까지 여는 술집이다.

    대도시라 그런지 백인, 흑인, 황인 구분 없이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지혜는 맥주 한잔을 쭉 들이키더니 오현수에게 물었다.

    “아, 오빠 난 매력 없어?”

    “그런 걸 왜 물어?”

    “아니! 내 마음 설레게 만들어 놓고, 날 계속 밀어내잖아.”

    “누가?”

    “누구긴 누구야! 백현 오빠지!”

    김지혜가 속마음을 털어놓자 오현수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오현수는 이 3개월간 같이 지내면서 눈길 한 번 주질 않는 김지혜가 야속했다.

    반면, 김지혜는 자신을 설레게 해놓고서 정작 중요한 지금은 피하기만 하는 강백현이 야속하다.

    그런 둘이 만나니 대화가 되질 않는다.

    “백현이 형이 뭐가 좋냐?”

    “사람 좋은 데 이유 있냐? 좋으니까 좋은 거지.”

    “꺼져. 사람은 지내봐야 아는 거야.”

    “같이 지냈잖아. 인재개발원에서 밥도 같이 먹고, 가끔 술도 마시고, 편의점 같이 가서 연고도 사서 바르라고 했단 말이야.”

    강백현의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를 떠올리는 김지혜.

    오현수가 다시 한 번 맥주를 원샷한 후 대꾸했다.

    “그거 어장관리야. 아까 봤지? 거기 친구들 만나서 히히덕거리는 거. 마음은 거기 가 있는데, 네가 보이겠니?”

    “아~ 진짜, 계속 속 터지게 할래?”

    “네가 속 터지는 행동 하니까 그런 거잖아. 술이나 마셔.”

    맥주가 데킬라로 바뀌었고, 데킬라가 그들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 * *

    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고가 저질러진 상태였다.

    외로웠던 두 사람.

    그리고 알코올이라는 마법의 약물에 취해 벌어진 일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아이! 진짜.”

    “야! 네가 유혹했잖아.”

    “야이 미친놈아. 그건 취해서 그런 거고, 진짜 하는 게 어디 있어? 아 진짜!”

    침대에서 알몸으로 정신을 차린 오현수와 김지혜.

    서로의 실수를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랴?

    김지혜는 답답한 마음에 오현수에게 신신당부했다.

    “백현 오빠한테 입 뻥긋도 하지 마. 알았어?”

    “너도 입 조심해. 누가 보면 나 혼자 잘못한 줄 알겠네.”

    “아~ 진짜, 빨리 나가줘. 빨리빨리! 아, 방 혼자 쓴다고 해서 다행이지. 둘이 쓴다고 했어봐. 아, 이걸 어떻게 수습할 거야.”

    “둘이 썼으면 애초에 사고도 안 났지. 아무튼 나중에 이야기해. 벌써 아침 7시네.”

    “조심히 들어가. 동기들한테 들키지 말고.”

    “너나 잘 하셔.”

    김지혜는 떠나는 오현수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짜증나. 처음이었단 말이야! 아~ 진짜.”

    그러나 오현수 또한 마찬가지.

    “너만 처음이었냐? 나도 처음이었거든?”

    김지혜와 오현수는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 * *

    한편 최용규는 김지혜와 오현수 사이의 일을 눈치 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일이 왜 이렇게 풀리냐!]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지만, 그래도 김성현은 사후세계에서 자신과 함께 했으면 하는 최용규였다.

    때문에 그녀에게 어떠한 남자도 접근하지 않길 바랐는데.

    자신의 직속후배인 강백현이 계속 썸을 타자 불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한편, 강백현은 오현수가 아침 7시에도 들어오지 않자 걱정되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헌데 현수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가이드에게 연락을 할까 했는데, 다행히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현수야. 왜 지금 와? 너 뭐했어?”

    “아, 택시 타고 번화가 갔다가 술집에서 술 마시다 조금 졸았어요.”

    “그래? 잠도 못 잤겠네. 아침은 어떻게 할래? 같이 먹을까?”

    “아니요. 형 혼자 드세요. 전 아침 패스하고 좀 더 잘게요. 아침 9시까지 호텔 로비에서 모이는 거 맞죠?”

    “응. 그래. 그럼 내가 8시 20분 즈음에 다시 깨워줄게. 좀 자.”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형.”

    “고맙긴, 깨우는 게 뭐가 고마워. 아~ 난 지혜한테 연락해서 같이 아침 먹자고 해야겠다.”

    강백현이 그 말을 끝으로 스마트폰을 열었다.

    “형! 안 돼요.”

    “어? 왜?”

    “아니, 지혜가 어제 여자 동기들하고 밤에 술 한 잔 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아침도 아마 여자동기들하고 먹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전화해볼게.”

    백현이 스마트폰으로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걸 보며 오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제발 받지 마라. 응? 제발 받지 마!’

    그런데 김지혜는 오현수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아버리고 말았다.

    - 여보세요? 백현 오빠?

    “응. 지혜야. 아침 약속 있니? 같이 조식이나 먹자. 7시 30분 어때?”

    - 아, 알았어요. 오빠. 씻고 바로 내려갈게요.

    “응. 그래. 30분에 보자.”

    - 네. 오빠. 그때 봐요.

    오현수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어제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 오현수를 향해 최용규가 소리쳤다.

    [이봐!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아니다. 먹으면 안 되지. 지혜랑 백현이랑 잘 되려면 네가 빠져줘야지.]

    강백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최용규의 말을 부정했다.

    ‘잘 되긴 뭘 잘 돼. 내 스타일 아니라니까.’

    조식이 차려져 있는 3층 레스토랑.

    사람들이 하나하나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현은 테이블에 먼저 앉아 김지혜가 오기를 기다렸다.

    김지혜는 늦지 않게 도착했다.

    “지혜야. 여기야.”

    “네. 오빠, 어제 친구들하고는 잘 만났어요?”

    “어. 오빠 전 직장 사람들인데, 지금 프랑스 샬롯에서 일하고 있거든.”

    “아~ 직장 동료였어요?”

    “응. 근데 너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아, 저녁 먹고 바로 들어갔는데,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많이 못 잤네요.”

    “어? 말이 틀린데? 현수가 어제 너 술 많이 마셔서 아침 못 먹을 것 같다고 하던데?”

    “네? 현수 오빠가요?”

    “어. 너 술 마시러 나갔다며. 너 왜 나한테 거짓말해?”

    김지혜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진짜, 말하지 말라니까, 왜 말해가지고! 어디까지 말한 거야? 진짜 짜증나! 오현수!’

    수습해야 하는 상황. 그래서 김지혜는 강백현의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니아니, 오빠, 제 말 들어봐요. 아니! 내가 현수 오빠랑 술 먹은 게 따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고.”

    “어?”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오빠가 술을 마시자고 해서 나가긴 했는데, 그게, 그게 아~ 어떻게 말해야 되지? 아무튼 아무 일 없었거든요. 현수 오빠랑 아무 일 없었어요. 오빠, 오해하실까봐.”

    김지혜의 당황한 표정에 백현이 오히려 당황했다.

    “아니, 너 여자 동기들이랑 술 마시러 나갔다며. 그게 아니었어? 현수랑 마셨던 거야?”

    “네?”

    “그걸 뭘 비밀이라고, 나 빼놓고 마셔서 미안해서 그랬던 거야? 난 그런 거 가지고 안 삐져.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난 또 뭐라고. 빨리 아침 먹자. 먹고 오늘도 힘내야지!”

    강백현이 웃음을 감추며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김지혜.

    그리고 그런 김지혜의 자폭 발언에 고개를 젓는 최용규.

    [‘아, 진짜 얘는 엘리트 집안이라는 애가 머리가 왜 이렇게 안 돌아가냐!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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